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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안톤 체홉과의 첫 만남은 일상의 평범함 속에 내재 된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려는 우리들의 자화상 같은 느낌이었다.
산울림 12집에 실려 있는 ‘불안한 행복’의 가사를 보면 나의 느낌을 공감해 주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예쁜 아내와 아담한 집과 새로 산 신발
창틀을 긁는 아침햇살 모르는 채 잠들어있는
내 아이의 포근한 이불
이 아침 부엌에서 들리는 수돗물 소리
나는 일어나 면도를 해야지 향긋한 비누냄새
앞치마를 두른 아내의 모습이 즐겁다
집이 좀 어질러져 있어도 좋다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떨어져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신문을 보아야 한다
앨범도 가끔 보아야 한다
나는 가난했었고
사진 속 내 눈동자는 불안해 보였지
어머니 아버지는 전란을 겪으셨고
나의 형은 젖이 모자라 죽었네
그렇게 불안하게 나는 나의 행복을 본다
‘어느 관리의 죽음’
분량은 2장에 불과한 짧은 단편이지만 작가의 의도는 확실하다. 작가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사소한 재채기에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는 주인공 이반 드미뜨리치 체르뱌꼬프를 통하여 정작 가진 자들은 관심 조차 없는 사건에 지레 겁을 먹고 비굴해 지는 소시민의 초라한 모습을 과장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였음이다.
‘애수’
마부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의 억울함이나 고통을 호소 하고 싶었을까? 아닐 것이다. 마부는 그저 상실의 슬픔을 그 ‘누군가’
와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부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공감해주는 대화 상대방은 처음부터 무리한 욕심이자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화가 불가능 하다면 넋두리 대상이라도 필요하다. 미치지 않으려면…..
‘어는 여인의 이야기’
‘시골에서 사귄 사람은 시골에서만, 그것도 여름에만 매력적인 법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한 문장만을 뽑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문장을 고를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아니 설명을 하려는 시도만큼 답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련한 첫 사랑의 느낌은 내 기억 속에서만 아름답고 유효할 뿐이다.
‘자고 싶다’
나는 자고 싶다. 아기는 계속 울어 댄다. 그래서 난 잘 수 없다.
유모가 잠을 못 자는 이유는 ‘누구’ 때문일까? 아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모는 아기를 목 졸라 죽인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노동과 쌓여만 가는 피곤함에 갑자기 아기를 죽이고, 드디어 잠의 행복감에 젖어 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섬뜩함과 동시에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이 단편을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소시민들이 가진 자들에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정작 고통의 원인 제공자인 권력 집단에는 순응하면서 같은 처지의 소시민들끼리 서로 증오하고 대결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공포적 우화 (호러물?)로 읽었다.
‘6호 병동’
주인공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정신과 의사이다. 병원에서 환자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그의 첫 번
째 반응은 자기 합리화이다.
“나는 해로운 일을 하면서, 나에게 속는 사람들로부터 봉급을 받는다. 나는 정직하지 못하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사회의 필요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지방 관리들도 해로운 일을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봉급을 받는다….. 그러니까, 내가 부정직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이 시대의 잘못이다…" (P86)
하지만 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본성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폭발하게 되고 갑작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친구들
에게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강제로 입원하게 된다. 주인공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정신 병원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지식인
이반 드미뜨리치를 만나게 되면서 이 세상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광인 취급을 받는 부조리한 사회임을 깨닫게 된다.
이외에도 농부들의 무지와 폭력을 경멸함에도 가난과 굴욕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연민이 배여 있는 ‘농부들’, 신분적, 계급적 차이로 인한 소통과 상호 이해의 부재의 씁쓸한 결과를 담담하게 그린 “새로운 별장’까지 그의 소설은 이념과 사상과 같은 거대 담론 보다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사에서 숨겨진 인생의 진리를 찾으려는 문학적 도구이다.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체홉의 소설은 ‘거대한 일에 대한 겸손한 무관심’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