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침팬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 문학사상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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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시 제레드 다이아몬드다.

 

[총, 균, 쇠] 와 마찬가지로 그의 방대한 자료에 바탕을 둔 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과 이론, 그리고 어렵고 복잡한 과학적 이론을 일반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쓰는 저술가로서의 능력에 질투(?)를 넘어 존경심이 들 정도다.다. 설사 내가 그의 가설, 주장, 이론에 동의 할 수 없다고 해도 별 도리가 없다. 나에게는 그의 방대한 자료를 반박할 자료도 지식도 전무 하기 때문에 반박할 논리 자체가 성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제3의 침팬지]를 요약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일 뿐만 아니라 별 소득 없는 허사일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3의 침팬지]는 인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방대한 진화론 교과서라고 생각하고 필요한 부분을 그냥 외워두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내용을 전부 외울 수는 없는 일이므로 백과사전처럼 서재에 꽂아 두었다가 두고두고 긴요할때 찾아 보면 될일이다. 혹자는 내 생각을 과장이 심하다거나 비약이 도를 넘는다고 비판 할 수 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서 나의 느낌의 짤막한 글로 서평 - 물론 "주제넘는 시답지 않은 괜한짓" 과 동일어다 - 을 갈음하고자 한다.

 

1. 우리 인류가 침팬지와 공동 조상에서 분류 된 시점이 700만년 전이라고 한다. 언뜻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세월로 느껴지지만 사실 지구 나이 50억살을 감안해 보면 화장실에서 큰 일 보기에도 부족한 짦은 시간이다. 하루 24시간으로 환산 해보면 겨우 2분에 해당하는 시간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내 계산을 확신 할수 없으니 의심가는 분은 직접 계산하는 것이 좋을듯 싶다). 침팬지와 우리 인간이 98% 이상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 졸렬하게 동물원 우리에 있는 침팬지나 좀 더 먼 친척뻘인 고릴라나 오랑우탄을 못 살게 굴거나 비웃지 말기로 하자. 우리가 입장 바꿔 우리 안에 갇혀 있어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은 위대한 수렵인이 아니라, 식물성 음식이나 소형 동물을 얻기 위해 석기를 사용하는 약삭빠른 침팬지였던 것이다" p80

 

2. 저자 말대로 DNA 1.6%의 다름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즉 언어의 사용, 예술,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 농업 - 화학 물질남용은 빼기로 하자 - 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치자. 좀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지만... 위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방대한 자료와 막힘없는 논증에 딱히 할 말이 없다. 과학적으로 98% 이상의 유전자가 동일한 유인원과 인간에게 나타나는 문명의 큰 간극을 1.6%의 DNA에서 찾는 것은 진화생물학자인 저자에게는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 1.6%의 DNA가 정확히 어떤 DNA이고 정확히 어떤 역할을 수행 하는 지는 저자도 알지 못한다.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 할 것이다. 아니 알아내지 못했으면 한다. 무지하고 사악한 인간에게 과학은 때로는 괴물이며 고통이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진화론이 우생학이라는 괴물을 잉태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성 선택 - 도태라는 말보다는 요즘 학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어휘로 생각한다. - 설 (섹스, 배우자 찾기,혼외정사 등등) 에 대한 여러 실례와 가설이 매우 흥미롭다. 남사스러운 19금 내용이 많이 담아 있어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남자들은 꼭 참고할 내용만 짧게 언급하겠다.

 

사람(4분)

고릴라(1분)

피그미침팬지(15초)

침팬지(7초)

오랑우탄(15분)

 

4. 화학 물질 남용이라는 부정적인 인간만의 특징을 성선택설 관점에서 풀어낸 저자의 분석이 흥미롭다. 저자에 의하면 담배, 알코올, 마약등의 남용은 공작의 화려한 꼬리털과 같은 것으로, 비록 자신의 생존에는 오히려 독이 되는 특징이 미래의 배우자한테 본인의 우월한 유전자를 과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번식 능력에 해가 되는 화학 물질에 중독되는 것을 저자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 해 낼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이 말고도 느낀 점이 많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나는 저자와 생각이 다르다.  인간은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다른 종은 물론 같은 종인 인간들까지도 멸종하려고 했던 제노사이드 홀릭이다. 과거 우리 수렵, 채집민 조상에게 멸종이 무지에서 비롯되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던 반면, 현재 우리 인류에게게 멸종 행동은 의도적인 탐욕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 인류는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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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된 책이지만 정가제 실시전 세일에 질렀는데..
표지와 인쇄체가 딱 20세기 버젼이다.
지금은 21세기인데...

그래도 제레드 다이몬드 이름만 들어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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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를 위한 변명 - 20세기 가장 뜨거웠던 경제학자에 대한 경의
피터 클라크 지음, 이주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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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 평전의 발췌본같은 느낌...
책의 편집 의도가 케인스 개인사인지 아니면 그의 이론인지 좀 모호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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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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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우선 역자가 밝혔듯이 우리 인간의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6.25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평범한 인간들이 받는 고통이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원죄의식의 필요 불가결한 원인이자 결과인지 근본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무신론자 또는 비기독교인들 예를 들면 박 군, 또는 장대령, 좀 더 확대하면 이 대위까지 에게 신에 대한 집착으로 광신도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해야 했던 박 목사와 신 목사는 인간의 이유 없는 고통과 죽음 앞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원망을 품게 된다.

 

북한 공산당들에게 최후를 맞기 전 다른 목사들이 자신들의 영혼과 종교적 용기와 구원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자 박목사는 기도를 거부하며 말한다.

 

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어 나를 위해서 조차도 기도할 수 없으니까…… (중간생략)……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는 나는 기도하고 싶지 않아!” (p214)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신의 대리인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목사의 양심에 눈을 감고 절망에 빠진 신도들의 종교적 구원과 영혼의 위로를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사회적 진실과 종교적 신앙이 충돌할 때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인가 하는 고민이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소?” 라는 신목사에게 원칙주의자 이 대위는 진실은 진영의 논리를 떠나 진실 그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목사의 궁극적인 고백은 신의 존재 자체가 설사 의심이 가고 신이 인간의 고통을 방치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극심한 고통에 내몰린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삶의 희망과 행복의 약속을 위해서는 “Fact”가 아닌 “Truth”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목사는 처음에는 12명의 순교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였으나 사실의 전모가 밝혀지자 나중에는 자신이 목사들의 처형 현장에 있었고 자신이 배신자라는 거짓말로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 목사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아래의 말에 그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한다”. P256

 

나는 미리 말하자면 무신론자다. 하지만 종교를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존재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철학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와 종교적 구원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물론 신 목사의 신앙적 양심과

진실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결정과 행동을 존중한다. 특히 초반의 추리소설 형식에 기댄 사건의 스피드 있는 전개는 가독성과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는 보너스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김빠지는 사건 전개와 비약은 이 소설의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소설 [순교자] 1964년에 첫 출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금 읽어도 전혀 낡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유는 이 소설이 형이상학적, 철학적 소설이라 시대의 유행이나 조류를 타지 않는다는 점과 동시에 역자의 유려한 번역에 기댄 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지만 다 읽고 나서 느낀 소회를 몇 자 적고 싶다.

 

1.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며 부채춤, 발레 공연 등을 한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히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과연 이런 신도들의 영혼과 구원을 위해 [순교자]의 신목사가 진실을 왜곡하려고 했던 것일까? 신 목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

 

2.     나는 자의식이 강하지도 않지만 절대적인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어린 시절 교회, 사찰, 성당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성직자들의 설교를 듣는 즉시 나도 모르게 스물 스물 올라오는 거북함과 거부감은 좀 체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종교에 갖는 최소한의 예의는 종교적 자유와 관용이다. 종교도 무신론자들에게 이 정도 예의는 차려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다.

 

3.     신문에서 읽었는데 우리나라 같이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가 드물다고 한다. 사실 종교라는 탈을 쓰고 죽으라고 서로 싸우는 다른 나라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갈등은 초등학생 골목 싸움 수준인 것 같긴 하다. 전세계에서 종교라는 미명하에 온갖 비인도적인 행위를 일삼는 집단들은 사실 종교를 모욕하고 종교라는 방패 뒤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비겁자요 위선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신목사를 북녘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는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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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오! 분명히 옮긴이가 있는데 한국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작가가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거기다 종교와 신과 인간의 양심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추리 소설 형식으로 풀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간만에 적당한 긴장감을 갖고 몰입하게 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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