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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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 사람들] 나에게는 참 특별한 책이다.

 

 

뭐 남들이 보기에는 매년 반복되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해 였겠지만 지루했던 재수 끝에 대학생 새내기로 시작했던 1992년은 치기 어린 승자의 흥분과 자기 도취로 점철된 순간 으로 기억된다. 그러다 갑자기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특별한 동기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전공 수업도 빼먹으면서까지 소설 위주로 책을 읽었는데 나의 기준은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무조건 산 다음에 여러 단편 소설 중 나와 맞는 작품을 만나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 내는 좀 무식한 독서 방법이었다. 1992년 양귀자 작가의 숨은 꽃 - 솔직히 지금에 와서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을 읽고 나서 그 작가의 작품 중에서 처음 고른 소설이 [원미동 사람들]이었다. 

 

 

친구들의 술먹자는 유혹도 마다하고 하루만에 단숨에 읽어 버린 책이니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내 생에 최고로 뽑는 책들중의 하나였다. 우리 사회의 평범한 소시민들의 단상을 부천시 원미동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압축해서 옮겨 놓은 작가의 과하지도 모자름도 없는 딱 그만큼의 글솜씨에 매료되었던 순간 이었다.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은 강력한 스토리 텔링의 힘이다. 이 단편들의 이야기와 인물의 내용적, 형식적 완성도는 압도적이다. 솔직히 요즘 소설들은 인간 내부의 의식과 감정으로만 천착하는 경향이 있어 이야기 자체의 힘이 떨어지는 심각한 단점을 숨길 수 없는 데 반해, [원미동 사람들]에 수록 된 각 단편들은 재미와 감동 모두를 두루 갖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진만이 아버지를 통해 실직자의 소외와 빈곤 문제를 다룬 [불씨], 원미동 토박이 농부 강만성 노인을 통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로 토지의 자본화로 인한 토착민과 이주민의 갈등을 다룬 [마지막 땅], 자본주의라는 잔인함과 천박함에 매몰되어 짐승이 되어가는 세상에 희생되는 소시민을 다룬 [한 마리의 나그네 쥐], 형제슈퍼와 김포슈퍼의 제살깍기 경쟁을 통해 도시 주변부의 부족한 재화/자원을 둘러싼 고달픈 생존 경쟁에서 무색해지는 소시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날것 그대로의 탐욕과 이기심을 다룬  [일용할 양식]여기서 모든 작품을 거론 할 수는 없지만 모든 단편들은 인간 삶의 슬픔과 고통,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보통사람들의 초라하지만, 그래도 단단한 자화상이니 한 작품도 빠짐 없이 꼭 읽어 보길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1980년대 서울특별시민이 되지 못한 주변부 보통 소시민들 삶의 고달픔과 슬픔은 지금 2015년에도 변함없는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양귀자 작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나 대안에는 관심도 재주도 없는 작가이지만 작가의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은 따뜻하고 고맙다.  

 

 

[중간생략] 나는 온몸으로 노래를 들었고 여가수는 한순간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발밑으로, 땅 밑으로, 저 깊은 지하의 어딘가로 불꽃을 튕기는 전류가 자꾸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질퍽하게 취하여 흔들거리고 있는 테이블의 취객들을 나는 눈물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그들에게도 잊어버려야 할 시간들이, 한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었다. 어디 큰 오빠뿐이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목에 메었다.

                                                                                                                       [한계령], p362   

 

 

사실 [나는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제목이 정확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 보고 나서 나는 양귀자 작가와 이별했다. 왜 작가가 그런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내가 알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범작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졸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이 넘어 다시 만난 [원미동 사람들]은 다시 한번 양귀자 작가에 대한 나의 첫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양귀자 작가는 20세기 단편 소설의 거장이다. 작가가 21세기에도 다시 한번 '양귀자표'  [원미동 사람들]을 써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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