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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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술술 읽힌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 읽고나니 이 책의 저자인 장류진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것 같은 기분.
나같은 독자가 있으리란 걸 예감했던지 작가는 이 단편 속 인물들에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들어있긴 하지만 자신과는 다르다는 방어막을 미리 쳐두긴 했는데..
어쩐지 그래서 더 작가와 싱크로율이 높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 아이러니는 뭘까? ㅎㅎ

이 책의 최대 장점은 현실적인 공감이다.
책 속 단편들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을 보고있는 것처럼 모든 상황들이 익숙하다.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준만큼 받을 수 있고 받은만큼 돌려줘야하는 사회의 기본 룰조차 몰라서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일도 다반사인 회사 동료,
열심히 뛰어 자신의 지시대로 성과를 낸 직원을 승진 시켜놓고는 알량한 자신의 인스타용 허세 과시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괘씸죄를 물어 승진을 취소하고 월급을 포인트로 주는 SNS 스타 회장님,
‘아메리카노 2천원‘이라는 가격표를 보고 들어간 손님에게 아이스는 4500원이라며 이탈리아인들의
핫커피 사랑에 대한 지식까지 과시하는 까페 사장님,
눈에 보이는 곳만 깨끗하게 청소하며 주인 몰래 요령을 피우고, 무례를 관심으로 포장해 사적인 영역까지 마음껏 침범하는 도우미 아주머니,
한때 긴장과 설렘을 오가며 썸을 타던 직장동료가 돌싱이 되었다는 소식에 그녀와 다시 새로운 로맨스를 꽃피우겠다는 욕망으로 그녀를 찾아가 젠틀한 매력을 어필하며 그녀와 밤을 보낼 기회만 엿보는 남자..
그들은 주변 곳곳에서 우리의 일상과 감정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내는 낯익은 사람들이다.
부당한 회장의 갑질에도 반항조차 못하고 포인트로 구입한 물건을 중고거래 해 살아가는 힘없는 을,
눈치 없는 동료에게 싫단 소리도 못하는 마음 약한 후배,
커피 한잔도 머리 속 가계부의 잔액을 생각하며 구매 해야하는 사회 초년생,
생활에 치어 잠깐의 여유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하는 대학생..
이들 역시 내가 이미 지나온 길 어딘가에 서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겪은 부당함과 속터짐과 분노와 공포와 부끄러움들은 힘없고 어설펐고 교만했고 지쳤던 때의 나에게도 있었던 일들이다.
소설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익숙하고 현실적인 그들의
모습이 나의 일처럼 느껴지기에, 어딘가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잠깐 훔쳐본 듯한 생생한 공감이 느껴진다.
(쓰고보니 바로 이 점 때문에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공감이라는 감정은
가끔 이렇게 대책 없는 확신을 낳기도 한다.^^)

책 속 단편들이 수기가 아닌 소설임을 알면서도 공감이 되다못해 마치 내가 겪은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생생한 심리 묘사를 바탕으로 한 저자의 뛰어난 필력 덕이다.
선하지만 눈치가 없고 사회적 룰에 맞출줄도 모르는
나이 많은 동료를 향한 분노와 거부감, 그와 동시에
꼭 그만큼의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인해 선뜻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결국은 걱정하는 주인공의 심리는,
소위 한 집단에서 고문관이라 불리며 무시 당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천진함으로 나름의 삶을 즐겁게 꾸려가는 이들에 대해 우리 모두 한번쯤은 느껴본 적 있었던 그 이율배반적인 껄끄러운 감정들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만든다.
첫 출근날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흘러가길 바라지만 과도한 긴장과 불안, 허황된 기대와 설렘등
복잡한 감정들의 하모니로 매순간이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위태로웠던 그 마음은 또 어떤가.
내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도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 눈치를 보게되고, 무례한 관심과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꼼수에 불쾌감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만 두겠다는 말에 애원조로 매달리게 되고 마는 굴욕적인 마음도,
하고싶은 일을 포기하고 그저 돈을 벌기위해 취직한 직장에서 4대보험, 연봉, 직원 혜택 등의 단어가 적힌 고용계약서를 쓰며 굴욕이나 비참함이 아니라 안도와 벅찬 행복으로 감사를 느끼는 을들의 서글픈 자각 등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우리가 삶 곳곳에서 만났던 감정들이 저자의 뛰어난 필력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느끼고 아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낄수 있도록, 그것도 나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표현 해내는 건 결코 쉽지않다.
그런데, 이 단편집이 첫 책이라는 작가의 필력이 이정도라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마지막의 ‘탐페레
공항‘이었다.
여행중 경유지로 들렀던 핀란드 탐페레 공항에서 함께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다 헤어진 뒤
낯선 나라의 할아버지가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보내주신 다정한 편지.
바쁜 일상을 핑계로 답장을 미루며 마음 속 한켠에
부담과 죄책감을 느끼던 주인공은 어느날 그 편지를
다시 보다가 도착 전에 사진이 구겨질까 걱정스러워
시리얼 포장지를 잘라 정성스럽게 붙였던 할아버지의
다정한 마음을 깨닫고 눈물을 터뜨린다.
지금이라도, 라는 간절함으로 편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선 불안과 기대 속에 신호음을 들을 때
내 마음도 같이 두근거리며 불안했고 제발 아직 살아계시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전화를 받은 할머니의 반가운 답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감과 함께 울컥하며 정말 다행이다,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지나간 순간은 우리에게 그리움과 후회라는 아픔을
남기지만, 되돌릴 수 있는 용기와 진심이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것.
독자들과 짜릿한 밀당을 벌이며 쥐락펴락 하다 마침내 해피엔딩을 던져주는 글, 멋지다!

쉽게 읽혔지만 감정의 희노애락을 제대로 경험하게 해준 책.
첫 작품의 만족도가 이정도라면, 하는 섣부른 기대로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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