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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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쯤 친구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우리나라 문학계는 SF소설 흥행기인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배명훈 등등

그러다가 레이 브래드러리, 켄 리우 같은 작가들이 쓴 소설로 이어졌다.

친구는 물었다. SF가 흥행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마도 지금 현실에서 짚어내지 못한 모순을 SF세계로 끌어오면 좀더 극명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 어릴 적에 접했던 SF 만화에서는 알약 하나가 식사를 대신하고 로봇이 집안일을 하는 그저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이 무조건 밝은 빛만 가져다주리라는 희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치지 못할 병이 없고 갈 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발달한 문명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눈부신 빛을 던져주었지만 그만큼 깊고 어두운 그늘을 동시에 드리웠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은 가진 자에게 더 많은 부를 주었고,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눈부신 빛을 올려다보느라 그것을 만들어낸 고된 노동을 잊어버리곤 했다. 아찔한 높이로 솟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면 분명 그 건축물을 쌓아올린 노동도 존재할 것이다. 그 노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건축물 앞에서는 그 노동의 가치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늘 끝에 사람이』에서 동명의 표제작 <바늘 끝에 사람이>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지구에게 우주로 향한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숙련된 기술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회사의 이전 작업장에서 위험한 일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주인공은 회사의 도움으로 망가진 귀와 팔, 심장 등을 기계로 이식하게 된다. 이상했던 점은 한쪽만 아프거나 다쳤는데 회사에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멀쩡한 나머지 부위도 잘라내고 기계 부속품을 신체에 끼워넣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 비용을 갚아가는 방식으로 월급에서 75%는 회사에서 떼어가고 나머지만 지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인공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회사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벌어진 산재였다. 만약 퇴직을 하면 갚지 못한 수술비는 고스란히 빚이 되는 시스템이라는 걸 주인공은 나중에 알게 된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었다. 경제 위기도 닥쳐왔다. 회사에서는 우주에서 일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복귀와 동시에 해고'라는 말도 안 되는 부당해고를 지시한다.

지금보다 약간 더 미래를 그린 SF소설이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실제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 하청 업체를 거쳐서 도급으로 노동력을 구하고 직접 하청업체를 만들어서 수수료를 떼는 회사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슬프게 마음을 울렸다.

기계가 몸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짓밟고, 무시하고, 때려잡고, 굶겨 죽이고, 사람을 절망의 궁지로 몰아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어도 우리 모두는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지상에서 7만 2천 킬로미터 위, 카운터웨이트 꼭대기에 사람이 남아 있다고.

바늘 끝에 사람이

거대한 자본 권력에 이은 소설들은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빨갱이 컴플렉스가 여전히 잔재하는 사회 전반에 퍼진 광기와 폭력,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


5.18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제주해양기지 반대 운동 등을 SF와 고전설화, 미스터리, 스릴러 등의 장르로 다양하게 변주하며 보여주는 이 소설집에 담긴 작가의 목소리는 '정의'롭다.

에둘러서 표현하지 않고 아프게 희생당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기 위해 딴 길로 새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와 사람들을 기억하고 써내려갔고 독자에게 보여준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살짝 벗어나서 내려다보면 오히려 현실이 잘 보일 때가 있다. 이 소설이 그 본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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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민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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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증과 광기는 우리 내면의 풍경을 드러낸다. 우리를 움찔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것, 혹은 열광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것들을 드러낸다. 공포증과 광기를 한곳에 모아놓으면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불안장애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미국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한 적이 있으며 역사 속에서 찾은 사건과 인물들로 생생한 이야기를 직조하며 쓴 책이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거나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이력이 있는 케이트 서미스케일이 쓴 이 책은 제목을 비롯해서 목차와 덧붙이는 말까지 모두 흥미롭다.

역사 속에서 찾은 사건으로 이미 수상경력이 있는 작가는 공포증과 광기가 진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책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다.

두려워하고 열망하는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에 처음 '공포증'과 '광기'라는 이름을 처음 붙여준 사람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러시. 이전까지 '공포증'은 육체의 병과 관련된 각종 증상을, '광기'는 사회적 풍조를 설명할 때만 쓰던 단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는 두 단어를 심리적 현상으로 새롭게 정의하면서 28가지 공포증과 26가지 광기를 열거했다.

이후 18세기 정신과 의사들은 좀더 복합적으로 공포증과 광기를 이해하면서 인류 진화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남긴 흔적에서 그것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새로운 공포증과 광기가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문물과 문화가 발생하면서 그에 따른 불안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공포증과 광기는 문화의 창작물이다. 각각의 공포증과 광기가 확인-혹은 창조-된 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공포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에서도 진화심리학자들은 많은 공포증이 적응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는 내용은 설득력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뱀에 물리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겼다는 것.

"특정 대상을 피하려고 하는 강박이 공포증이라면, 광기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강박"이라는 문장은 두 가지 단어를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99가지의 공포증과 광기를 소개하고 있다. 1부에서 8부까지 같은 종류에 속하는 공포증과 광기를 각 부에 묶어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1부는 개, 거미, 고양이, 뱀 등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공포증이고, 3부는 단추, 달걀, 인형 등 '물건에 대한' 공포증이다.

고독공포증, 광장공포증, 비웃음공포증, 휴대전화부재공포증을 다루고 있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타인'을 다룬 4부와 결정장애, 과대망상, 도벽, 음주광 등 광기를 다룬 7부는 변화의 속도에 따라 불안의 속도 역시 가속화되는 요즘 주목해볼 만하다. 특히 4부 '휴대전화부재공포증'은 누구나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웃음이나 고독이라는 주제는 가볍게 지나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공포증과 강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때 개에 물렸지만 개 공포증은 없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경험과 함께 3층이었던 피아노학원에서 내려다보던 골목에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유독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놀이공원에 가면 회전목마를 가장 좋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ㅎㅎ 발표공포증이나 적면공포증도 어느 정도는 있다. 막상 발표를 하면 하기 전보다 마음이 가라앉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안감을 주는 것.

어느 특정 시대에 발생하는 집단 유행적인 공포증도 흥미롭다. 비틀즈광이나 광대공포증 같은.

인형공포증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는 우리집 거실에 놓여있는 구체관절인형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1970년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형공포증에 관한 가설 하나를 수립했다. 더 진짜 같은 인형일수록 인간의 관심을 더 끌지만, 살아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진짜 같아지면 오히려 극식한 불안감을 준다는 가설이었다. 모리는 인간과 비인간 사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인간과 비슷한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돌연 역겨움으로 바뀌는 시점이 언제인지 그래프를 그려 보여주었다. 그 시점이 되면 그래프가 한순간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모리는 그래프 모양에 빗대 이 현상을 '불쾌한 골짜기'라고 불렀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7부 '멈출 수 없는 강박적 광기'에서 '방랑벽'에 대한 내용은 가부장에서 억압된 여성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돌아다니고 싶은 충동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은 집안 살림과 가정생활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때 여자들이 공장에 불려 나가 일하고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에는 방령벽 진단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샬럿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질병이 아니라 제도 속에서 억압받은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함께 읽어보며 우리 각자가 가진 공포증과 광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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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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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당분간은 좀 쉬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런 말도 해주었다. 엄마의 말에 나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너무 쉽게 부서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밤이었고, 엄마는 잠이 들었고, 나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깨어난 뒤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숨죽였으나 5평짜리 원룸에서 울음소리를 감추기는 어려워 복잡한 마음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2시를 넘겼고 엄마의 방엔 엄마와 방과 내가 있었는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도 작고 방도 작고 나의 울음소리도 작은, 모든 것이 작은, 그런 밤이었다. 아랫집 아저씨의 방화가 내가 그간 해온 오랜 고민을 해결했다는 게 어쩐지 허탈한, 그런 밤.

별일은 없고요? / 이주란

조도가 낮은 전구 아래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고요한 밤의 온기와 작게 웃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고 별일 없는 안부를 묻고 작은 짐을 나눠서 들어주는 낮의 소란이 떠오르는 소설. 맑고 투명해서 서럽고 슬프다가 슬핏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런.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묘사나 가슴을 간지럽히는 장면이 없는 이 소설집에는 (좋은 의미의) 별일은 없지만 (나쁜 의미의) 별일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불행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것이지만, 도무지 적응은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짊어진 불행을 향해 격한 감정을 토해내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묵묵히 견디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 대도시의 생활을 멈춘 다음 소도시나 시골의 작은 방이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자고 쉬고 먹고 걱정을 내려놓는 일.

빨리 읽어내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펼친 책에서 나는 5평짜리 원룸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밤의 풍경을 보고 말았다.

그때부터 책을 빨리 읽어낼 수 없었고 책을 넘기는 순간들은 가벼울 수 없었다. 연작처럼 느껴지는 여덟 편의 단편을 읽을 때마다 오래전 내가 부서진 마음들이 오랫동안 억눌렀던 기억을 비집고 올라와 내 곁에 가만히 앉았다. 나는 그 기억과 함께 책을 읽었다. 부서진 마음에서 떨어진 먼지들에 목이 메였다. 나는 부서진 마음을 다시 붙이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오랫동안 슬펐다고 생각했다.

한번 부서진 마음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다. 작가는 부서진 마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고요한 눈빛으로 응원을 보낸다. 부서진 마음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따지지 않고 묻지 않고 온기를 나눠주는 사람들로 인해 이야기는 다음을 향해 갔고, 부서진 마음의 뾰족한 모서리는 아주 조금씩 둥글게 닳아져갔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에서 수연은 오랫동안 버텨왔던 도시의 삶을 멈추고 엄마 혼자 살고 있는 시골의 원룸으로 내려간다. 밀렸던 잠을 자고 더이상 잠이 오지 않는 밤. 사방이 조용하고 밤은 더 조용한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와 나의 울음 소리도 작은 그런 밤. 공간이 작으면 슬픔을 감출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슬픔은 공공연한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그 마음을 나도 받고 싶었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며 나눠주고 싶었다.

준경 씨가 가고 난 뒤 은영 씨와 나는 가로등 아래 나란히 앉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렸다. 바람결에 풀 향기가 실려 왔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어둘 때, 옷과 함게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을 주워 책 사이에 끼우거나 끼웠던 꽃잎을 꺼내 코팅기로 코팅하면 은영 씨로부터 쓸데없는 걸 한다는 타박을 듣기도 했다. 나는 나를 타박하는 은영 씨가 좋아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쓸데없는 일들을 했다.

여름밤

경아야, 뭘 좀 먹고 있어.

아줌마의 메시지였다.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신 다음 냄비 두 개를 열어보았다. 하나는 된장국, 하나는 호박죽이 들어 있었다. 나는 호박죽을 데워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조금 흘린 것은 호박죽이 너무 맛있어서도, 무언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한 때문이었다.

어른

수연, 보라, 경아. 이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은영이다. 좋은 별일은 없지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그런 사람이 되는 은영. 나는 은영과 만나고 싶었고 그런 은영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조금씩 젖어드는 것이 이 소설들의 매력이기도 한데, 자신의 말을 내세우지 않고 정답이라고 외치지 않는 은영같은 인물들이 그 한축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변화를 세세하게 잘 포착하고 있다는 점과 소박한 일상의 풍경을 공감되게 잘 그려내었다는 것.

이곳에 모여있는 모든 소설들이 부서진 마음을 내던지지 않고 모여앉아 작은 목소리로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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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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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의 패권 싸움이 멈추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상황을 볼 때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는 난처한 입장에 처할 때가 많다. 이럴 때일수록 외교의 중요성이 대두되곤 하는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오늘은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중국의 부패와 경제성장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중국에 대한 호감. 비호감 정서나 인권과 관련된 여러 지수와 무관하게 중국은 급속도로 경제적 성장을 이뤄낸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강력한 독재체제와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정치경제와 글로벌 영향력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한 명인 위엔위엔 앙은 '부패와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중국의 도금 시대를 비교 역사학 관점에서 설명하며 미국과의 비교를 통해 모든 부패가 발전에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모든 부패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여러 형태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부패의 4가지 유형으로 세분화하여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바늘도둑-소도둑으로 나누면서 사례를 들어주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제목과 차례에서 주는 무거움은 조금은 덜어내면서 읽을 수 있다.

전체적인 부패의 수준만큼 부패의 구조가 중요하다: 부패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부패는 러시아의 부패보다 덜 파괴적이다. 두 나라 모두 정실주의가 판을 치지만 중국에서는 성장을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부패 수준은 낮다. (급행료, 바늘도둑, 소도둑)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위의 내용에 대해 조금 들여다보면, 전통적으로 부패란 공무원이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로 정의하지만 이런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저자는 부패를 다음과 같이 세분화했다. 정부의 혜택과 서비스를 받기 위한 대가성 뇌물과 어떤 교환도 없는 횡령 및 갈취(도둑질), 고위 공무원이 벌이는 거대한 부패와 하위 공무원이 벌이는 사소한 부패. 이를 기준으로 부패를 분류하면 4가지 유형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저자는 각각 ‘바늘도둑, 소도둑, 급행료, 인허가료’라고 부른다.

모든 유형의 부패는 부정적이지만 경제에 동일하게 악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약물에 비유한다. 공공 재산과 사유 재산을 소진하는 특징을 가진 바늘도둑과 소도둑은 건강을 갉아먹고 성장을 방해하는 유해 약물. 급행료는 일종의 진통제라고 할 수 있다. 적은 뇌물을 이용하면 행정상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의 비즈니스에는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부패 역시 시민과 업계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성장에 해를 끼친다. 인허가료는 자본주의의 성장 촉진제, 스테로이드다. 바늘도둑, 소도둑, 급행료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지만 인허가료는 활발한 사업과 투자를 불러오기 때문에 경제 성장에도 일조한다. 하지만 스테로이드가 우리 몸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인허가료는 불만과 불평등을 고조시키는 폐해가 있다.

모든 나라가 각 유형이 비중 차이가 있을 뿐 이 4가지 유형의 부패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그 나라에서 어느 부패 유형이 지배적인지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한 나라의 부패 구조를 이해하고 성장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중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패 유형은 인허가료이다. 한국, 미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도 중국처럼 인허가료 부패가 지배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소득 국가라는 점이다. 반면 방글라데시와 가나에서는 급행료, 나이지리아에서는 소도둑, 태국에서는 바늘도둑이 지배적이다. 중국이 광범위한 부패 속에서도 빠르고 거대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부패 구조의 차이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중국식 이익 공유 모델로 이에 힘을 더하고 있다고. 이처럼 중국은 인허가료와 이익 공유제라는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 촉진제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사회에 팽배해진 불만과 불평등은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다. 마치 미국이 도금 시대를 넘어 진보 시대로 나아간 것처럼 말이다.

평소 잘 접하지 않았던 생소한 개념을 다룬 책이라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저자의 반복되는 설명과 재미있는 세분화에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어낼 수 있어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돌아서면 다시 잊어버릴 것 같지만, 저자의 결론처럼 '부패를 새롭게 보아야 중국과 세계가 보인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다.

이 책은 2가지 핵심 증거를 제시했다. 첫째 부패는 항상 나쁘지만 모든 유형의 부패가 경제에 똑같이 나쁜 것은 아니며 같은 종류의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부패를 박멸함으로써 발흥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부패의 박멸이 아니라 부패의 정성적 진화(폭력과 도둑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으로)를 통해 발전했다. 부패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부패 영향과 측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영향을 구분해야 한다. 내가 첫걸음을 뗐고, 다른 동료들이 이 길에 동참하길 바란다.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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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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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는 배달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생산 활동을 하는 일터다. 오토바이와 택배차가 달리는 동선을 이어보면, 도시 전체를 돌리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가 드러난다. 배달노동자들은 이 기계에 몸이 빨려 들어가거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다. 공장 안에서 벌어졌다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산재다. 하루 6명이 일하다 사망해도 변화가 없는 나라다. 이 사망사고는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닫힌 공장의 파쇄기에서, 시골의 비닐하우스에서, 펜스가 쳐진 공사현장에서,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을 내뿜는 공장 안에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 그러나 플랫폼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기계는 차량 운전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민, 유코차를 끌고 가는 부모 꿀잠을 자고 싶은 주민 옆에서 돌아간다. 김용균이 죽은 석탄발전소가, 삼성 노동자가 죽은 반도체 공장이 내 집 앞 길거리에서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언젠가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버스와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인 6차선 도로였다. 도로를 꽉 채운 차량에 비해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신호는 짧았다. 다음 신호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차량들은 꼬리물기를 했고, 그로 인해 신호를 못 탄 다른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 사이로 오토바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녔다.

서로 뒤엉켜 엉망으로 돌아가는 도로를 보면서도, 보행자인 나는 내가 건너는 횡단보도가 확보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을 뿐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도로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언제쯤 신호가 바뀌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충돌에 이은 쿵 하고 추락하는 소리.

버스가 왼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 아래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었다. 운전자는 오토바이에서 조금 떨어져서 쓰러져 있었다. 일순간 차량들은 멈췄고 버스 운전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때 나는, 보행신호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쓰러진 오토바이 운전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을까. 크게 다쳤을까.

오토바이 운전자는 잠시 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주저앉았다가 쓰러졌다. 꽉 막힌 도로라서 버스가 속도를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방향을 트는 순간 부딪혔으니까 충격이 컸을 것이다. 주변을 맴도는 소리들이 들렸다. 정말 라이더들이 문제야. 저러니까 사고가 나지. 자기만 다치면 모를까,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잖아. 맞는 말이었다. 시민들에게 배달 오토바이는 위협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번에도 버스가 차선을 바꾸려고 하는 순간 오토바이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벌어진 사고였다.

도로에서 위험한 라이더들을 많이 본다. 어쩔 때는 정말 사고가 날 것 같아서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다. 차에 타고 있으면 내가 탄 차에 부딪힐까봐 놀라고, 걷고 있을 때는 보행신호에 달려드는 오토바이에 놀란다. 정말 라이더들의 운전은 너무 위험했다. 문제였다. 그럼, 정말 라이더들의 모든 문제의 원인일까.

코로나 이후로 배달플랫폼은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빠르게 배달되는 음식들은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였다. 사람들의 휴대전화에는 배달앱들이 몇 개씩 깔렸다.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빠르게 맛있는 음식을 집에서 먹을 수 있다. 새롭게 나타난 어떤 버튼은 더 빨리 배달이 된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할인 쿠폰을 선물로 준다. 배달 버튼을 누르지 않을 이유가 사라진다. 일회용 플라스틱이 쌓이고 도로 위 교통사고가 쌓이고 매장업주들의 부담이 쌓이지만, 소비자들에게는 배달플랫폼기업이 주는 편리함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소비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배달플랫폼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조함 '라이더유니온' 초대 위원장이자 7년 차 배달라이더 박정훈 작가가 일하면서 직접 겪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안전의 문제, 배달노동자들의 독특한 직업 환경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법과 제도에서 방치된 배달산업의 구조와 전투 콜이 노동안전에 미치는 영향, 빠른 배달과 위험에 내몰린 배달노동자들을 양산시키는 알로리즘의 속성, 사고가 나도 책임을 지우기 어려운 배달산업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한 후 기업의 책임을 묻는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산재 신청과정과 방법을 다룬 부록은 마지막에 있다.

<뼈가 부러져도 다시 오토바이에 오르는 이유> 부분을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면허가 없어도 오토바이가 없어도 괜찮은 이 세계에서 초보는 늘 환영이다. 하지만 라이더가 되면서부터 모든 책임은 오직 라이더에게 있다. 그 다음 챕터에 나오는 전투콜은 라이더에게 과속을 부추긴다. 과속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갑자기 달려드는 오토바이 때문에 놀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화가 났었으니까. 과속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라이더의 안전을 위해 이륜차 배송을 없애고 자동차 배송만을 하자고 하면 찬성해줄까. 라이더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빠른배송을 포기하라는 주장을 한다면, 찬성해줄 수 있을까.

우리 눈에 쉽게 보이고 자주 보이는 배달노동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배달산업은 배달노동자의 생명을 먹으며 계속해서 성장했고, 도로는 전쟁터로 변했다. 전사자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지고 살아남은 자는 '딸배(배달노동자를 비하하는 은어)'가 된다.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날에 쿠팡이츠는 5건 하면 추가 보너스를 주겠다는 알림과 문자를 보냈다."는 배달 라이더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노동자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숨겨진 배달플랫폼기업의 태도는, 노동자를 사람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소중하다. 자유는 좋다. 자유는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자유는 위험하다.

'노동의 자유' '노동의 유연화' ...이런 말들이 들려오면 저울에 무게를 재고 싶어진다. 누구의 기준에서, 누구에게 좋은 '자유' '유연화'인지.

글의 시작부분에서 나는 사고를 낸 배달노동자의 위험한 오토바이 운전에 대해 비난하는 시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에 나는 배달노동자와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다.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널 수만 있다면 도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전투는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시민이자 소비자이자인 나는 배달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배달노동자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다. 배달앱을 누르는 소비자는 배달플랫폼기업을 성장시켰고 그 성장의 동력에는 라이더들이 존재했다. 소비자는 빠른 배달의 편리성을 마음껏 누리면서 그걸 완성시키기 위한 도로 위 라이더에게는 비난을 한다. 배달플랫폼기업에게는 하는 방법을 모르니, 눈에 보이는 라이더들에게만 그렇게 한다.

비단 배달플랫폼 뿐 아니라 수많은 플랫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좁은 범위의 자유와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 "노동이 쪼개지고 유연화되는 것만큼 기업도 쪼개지고 유연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모든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지우는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극들을 잊지 말자. 자유와 유연화를 자주 말하는 이에게 묻고 싶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뭉퉁거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정확히 말해달라고.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출근했다가 무사히 퇴근해 소중한 사람과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게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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