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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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당분간은 좀 쉬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런 말도 해주었다. 엄마의 말에 나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너무 쉽게 부서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밤이었고, 엄마는 잠이 들었고, 나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깨어난 뒤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숨죽였으나 5평짜리 원룸에서 울음소리를 감추기는 어려워 복잡한 마음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2시를 넘겼고 엄마의 방엔 엄마와 방과 내가 있었는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도 작고 방도 작고 나의 울음소리도 작은, 모든 것이 작은, 그런 밤이었다. 아랫집 아저씨의 방화가 내가 그간 해온 오랜 고민을 해결했다는 게 어쩐지 허탈한, 그런 밤.

별일은 없고요? / 이주란

조도가 낮은 전구 아래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고요한 밤의 온기와 작게 웃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고 별일 없는 안부를 묻고 작은 짐을 나눠서 들어주는 낮의 소란이 떠오르는 소설. 맑고 투명해서 서럽고 슬프다가 슬핏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런.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묘사나 가슴을 간지럽히는 장면이 없는 이 소설집에는 (좋은 의미의) 별일은 없지만 (나쁜 의미의) 별일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불행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것이지만, 도무지 적응은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짊어진 불행을 향해 격한 감정을 토해내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묵묵히 견디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 대도시의 생활을 멈춘 다음 소도시나 시골의 작은 방이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자고 쉬고 먹고 걱정을 내려놓는 일.

빨리 읽어내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펼친 책에서 나는 5평짜리 원룸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밤의 풍경을 보고 말았다.

그때부터 책을 빨리 읽어낼 수 없었고 책을 넘기는 순간들은 가벼울 수 없었다. 연작처럼 느껴지는 여덟 편의 단편을 읽을 때마다 오래전 내가 부서진 마음들이 오랫동안 억눌렀던 기억을 비집고 올라와 내 곁에 가만히 앉았다. 나는 그 기억과 함께 책을 읽었다. 부서진 마음에서 떨어진 먼지들에 목이 메였다. 나는 부서진 마음을 다시 붙이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오랫동안 슬펐다고 생각했다.

한번 부서진 마음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다. 작가는 부서진 마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고요한 눈빛으로 응원을 보낸다. 부서진 마음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따지지 않고 묻지 않고 온기를 나눠주는 사람들로 인해 이야기는 다음을 향해 갔고, 부서진 마음의 뾰족한 모서리는 아주 조금씩 둥글게 닳아져갔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에서 수연은 오랫동안 버텨왔던 도시의 삶을 멈추고 엄마 혼자 살고 있는 시골의 원룸으로 내려간다. 밀렸던 잠을 자고 더이상 잠이 오지 않는 밤. 사방이 조용하고 밤은 더 조용한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와 나의 울음 소리도 작은 그런 밤. 공간이 작으면 슬픔을 감출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슬픔은 공공연한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그 마음을 나도 받고 싶었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며 나눠주고 싶었다.

준경 씨가 가고 난 뒤 은영 씨와 나는 가로등 아래 나란히 앉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렸다. 바람결에 풀 향기가 실려 왔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어둘 때, 옷과 함게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을 주워 책 사이에 끼우거나 끼웠던 꽃잎을 꺼내 코팅기로 코팅하면 은영 씨로부터 쓸데없는 걸 한다는 타박을 듣기도 했다. 나는 나를 타박하는 은영 씨가 좋아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쓸데없는 일들을 했다.

여름밤

경아야, 뭘 좀 먹고 있어.

아줌마의 메시지였다.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신 다음 냄비 두 개를 열어보았다. 하나는 된장국, 하나는 호박죽이 들어 있었다. 나는 호박죽을 데워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조금 흘린 것은 호박죽이 너무 맛있어서도, 무언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한 때문이었다.

어른

수연, 보라, 경아. 이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은영이다. 좋은 별일은 없지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그런 사람이 되는 은영. 나는 은영과 만나고 싶었고 그런 은영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조금씩 젖어드는 것이 이 소설들의 매력이기도 한데, 자신의 말을 내세우지 않고 정답이라고 외치지 않는 은영같은 인물들이 그 한축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변화를 세세하게 잘 포착하고 있다는 점과 소박한 일상의 풍경을 공감되게 잘 그려내었다는 것.

이곳에 모여있는 모든 소설들이 부서진 마음을 내던지지 않고 모여앉아 작은 목소리로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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