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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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쯤 친구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우리나라 문학계는 SF소설 흥행기인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배명훈 등등

그러다가 레이 브래드러리, 켄 리우 같은 작가들이 쓴 소설로 이어졌다.

친구는 물었다. SF가 흥행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마도 지금 현실에서 짚어내지 못한 모순을 SF세계로 끌어오면 좀더 극명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 어릴 적에 접했던 SF 만화에서는 알약 하나가 식사를 대신하고 로봇이 집안일을 하는 그저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이 무조건 밝은 빛만 가져다주리라는 희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치지 못할 병이 없고 갈 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발달한 문명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눈부신 빛을 던져주었지만 그만큼 깊고 어두운 그늘을 동시에 드리웠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은 가진 자에게 더 많은 부를 주었고,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눈부신 빛을 올려다보느라 그것을 만들어낸 고된 노동을 잊어버리곤 했다. 아찔한 높이로 솟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면 분명 그 건축물을 쌓아올린 노동도 존재할 것이다. 그 노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건축물 앞에서는 그 노동의 가치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늘 끝에 사람이』에서 동명의 표제작 <바늘 끝에 사람이>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지구에게 우주로 향한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숙련된 기술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회사의 이전 작업장에서 위험한 일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주인공은 회사의 도움으로 망가진 귀와 팔, 심장 등을 기계로 이식하게 된다. 이상했던 점은 한쪽만 아프거나 다쳤는데 회사에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멀쩡한 나머지 부위도 잘라내고 기계 부속품을 신체에 끼워넣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 비용을 갚아가는 방식으로 월급에서 75%는 회사에서 떼어가고 나머지만 지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인공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회사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벌어진 산재였다. 만약 퇴직을 하면 갚지 못한 수술비는 고스란히 빚이 되는 시스템이라는 걸 주인공은 나중에 알게 된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었다. 경제 위기도 닥쳐왔다. 회사에서는 우주에서 일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복귀와 동시에 해고'라는 말도 안 되는 부당해고를 지시한다.

지금보다 약간 더 미래를 그린 SF소설이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실제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 하청 업체를 거쳐서 도급으로 노동력을 구하고 직접 하청업체를 만들어서 수수료를 떼는 회사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슬프게 마음을 울렸다.

기계가 몸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짓밟고, 무시하고, 때려잡고, 굶겨 죽이고, 사람을 절망의 궁지로 몰아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어도 우리 모두는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지상에서 7만 2천 킬로미터 위, 카운터웨이트 꼭대기에 사람이 남아 있다고.

바늘 끝에 사람이

거대한 자본 권력에 이은 소설들은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빨갱이 컴플렉스가 여전히 잔재하는 사회 전반에 퍼진 광기와 폭력,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


5.18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제주해양기지 반대 운동 등을 SF와 고전설화, 미스터리, 스릴러 등의 장르로 다양하게 변주하며 보여주는 이 소설집에 담긴 작가의 목소리는 '정의'롭다.

에둘러서 표현하지 않고 아프게 희생당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기 위해 딴 길로 새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와 사람들을 기억하고 써내려갔고 독자에게 보여준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살짝 벗어나서 내려다보면 오히려 현실이 잘 보일 때가 있다. 이 소설이 그 본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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