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티 워크 -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이얼 프레스 지음, 오윤성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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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로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필수노동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회구성원들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노동들. 하지만 그 노동이 정말 우리 사회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그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 것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물류 창고에서 장시간 동선이나 화장실 시간을 체크당하며 일하던 노동자의 사망, 휴대폰 앱이 등장하면서 실시간으로 노동을 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불이익에 받을 환경에 처한 배달 노동자들의 반복되는 사고, 코로나가 대유행할 때도 제대로 된 방역조치 없이 기계 앞에서 반복적인 일을 해야 했던 정육공장에서 질병에 노출된 노동자들...을 비롯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수없는 형태로 필수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인데 왜 불만인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일 밖에 못 하는 것이다... 그런 반응에 정부의 규정과 규제를 탓하는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 소리를 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많다. 노동자가 강자이고 장애인이 강자라는 말이 떠올라서 씁쓸하다.

예전에 학교에 다녔을 때 선생님들이 자주 하시던 말씀.. 지금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면 미래의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공부 못하면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한다.,,그런 분위기에서 좋지 못하다고 인식되는 직업은 천대당하고 그들이 받는 열악한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성공은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달려 있다고 전제하는 능력주의 사회는 선망받는 엘리트 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기준으로 사람을 각각의 소득계층과 각각의 직업 경로로 밀어 넣는다. 센델이 지적한 대로 이 시스템은 일류대학 학위가 없고 근 몇십 년간 소득이 줄거나 정체되고만 있는 노동자계급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깎아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초고학력으로 성공한 사회의 '승자들'에게는 빛나는 도덕적 자격을 쥐여주며 "성공을 오로지 저 자신이 노력한 결과요, 제 미덕의 척도로 여기라고, 그리고 불우한 사람을 깔보라고" 부추겨왔다.

더티 워크

이 책에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 앞에 놓인 좁은 선택지가 보인다. 개인의 재능과 능력만으로는 성공한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환경이 말해준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고. 그런 말까지 들으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마이클 센델이 말하고 있는 "능력주의의 오만"의 정점에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과도한 입시경쟁은 능력주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 코스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도덕적으로 더렵다고 여겨 스스로 절대 하려고 하지 않는 이른바 '더티 워크'를 하는 사람마저 능력주의를 우러러본다. 노동의 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능력주의에 대한 선망만 가득해진다.

일반 시민들에게 비가시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하찮거나 더러운 일, 다른 일을 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 하는 일, 자신이 선택했으니 당연한 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의 작가가 말하는 '더티 워크'는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 이다.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더러운 일을 누군가가 떠맡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무의식적 위임'을 받고 있는 노동.

이 책에서 다루는 더티 워크는 아래와 같다.

- 구치소나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 미국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드론으로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일

- 공장식 대량도축을 하는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노동

- 시추선 생존 노동자들이 처한 현장과 그들을 둘러싼 모순된 시선들

- 실리콘밸리이 자랑하는 최첨담의 빛나는 발전 뒤에 숨은 어두운 이면

더티워크는 여러 속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이나 자연 세계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힌다는 것과 그 일을 하는 사람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

구치소나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숨겨진 고문이다. 교도관들은 가해자이자 그 노동을 담당하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피해자이다. 심리상담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해고를 당하기 때문에 진실을 밝힐 수도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었고 이를 밝혔을 때 자신이 교도소에서 처하게 되는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더티 워크는 정해진 숙명이 아니다. 정부의 규정과 규제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왔는데 그것은 더티워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벌어지고 있는 환경이 자신들의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시민들의 묵인에서 비롯되었다. 말이나 글로 전해듣는 것은 실제 현장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의 충격에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책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그중에서 정육공장에서 일했던 여자 노동자의 인터뷰는 시작부터 슬프고 처참했다. 멕시코의 빈곤 가정이자 알콜 중독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틈만 나면 죽이려고 했던 가정에서 자란 열두살 플로르는 친모와 연락이 되어 백인이 주인인 목장 한켠에 마련된 숙소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계부는 플로르가 공짜로 살면 안 된다며 섹스를 요구했다. 플로르가 저항하며 친모에게 사실을 말하자 친모는 오히려 플로의 뺨을 때리며 화를 낸다. 그리고 계부는 플로르를 쫓아낸다. 이후 여러 험난한 여정을 거쳐 정육공장에서 일하게 된 플로르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닭을 죽이는 기계 앞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현대적 기계화는 그 현장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을 가져왔지만 노동자의 삶은 피폐하게 만들었다. 생닭 걸이 라인에서 한 사람이 1분에 걸어야 하는 생닭은 65마리였다.

1906년 업턴 싱클레어의 정글 발표 이후 육류검사법이 도입되었고 비위생적인 관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육산업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농무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간 산업 현장에 감찰관 파견하여 도축된 고기 조사. 문제 있는 고기를 라인에서 제거했다.

그러다가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기존 시스템을 '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 간소화하면서 위생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이윤의 극대화만 힘썼다. 공장 가동 속도 높이고 현지 파견 인력을 줄이고. 폐기처분되어야 할 닭들이 소비자에게 팔렸다.

클린턴 행정부에 와서는 '해썹' 도입으로 실제로는 품질 인증 권한을 회사 측에 넘기고 연방 감찰관 역할을 무작위 추출 검사로 축소했을 뿐이다. 감시가 줄어들면 편법을 쓰면 된다. 정육회사들은 고기에 과초산이나 염소 뿌리기 시작했다. 불결한 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뿌린 화학 약품 스프레이. 병든 동물도 불결한 환경도 개선할 수 없지만 유일한 장점 저렴함 방법으로 생산 속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것. 과초산 노출로 인한 공장의 공기 오염과 노동자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지 않았다.

필수노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더러운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윤리의 소비적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환경을 위해 텀블러를 이용하고 일회용품을 줄이는 것만으로 안 된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에 속한다. 양심의 가책을 덜어줄 회비를 내고 고기를 줄이고. 그러면서도 정육공장의 환경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 자신이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나는 아니니 상관 없으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에 있으니 괜찮다는 위선적인 자기위안이었을 것이다.

정육공장의 필수노동자들이 더러운 존재가 된 느낌을 강요받는 동안, 금융이나 컴퓨터공학 분야의 필수적이지 않은 노동자, 이른바 "노트북을 가진 사람들"은 정육공장의 현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 안전하게 머물렀다. 프레시다이렉트, 인스타카트 같은 배달회사 덕분에 이제는 고기를 먹기 위해 굳이 정육점 주인이나 슈퍼마켓 점원과 접촉하지 않아도 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단 몇 번의 클릭이나 터치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원하는 만큼 집으로 배달시킬 수 있다. 그 고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더티 워크

우리가 날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과 컴퓨터에서도 우리는 어떤 징후도 발견하지 못한다.

글로벌 테크 공급 사슬은 깨끗하지 않다. 노트북과 휴대전화에 쓰이는 충전용 이온 배터리의 핵심 원자재인 코발트는 세계 생산량 절반 이상이 콩고민주공화국의 콜웨지 광산에서 생산된다. 하루 열두 시간에서 열네 시간씩 일하면서 극악한 환경에서 폐질환을 일으키는 유해 화학물질을 마시면서 일하는 노동자 중에는 아동도 많다. 극도로 가난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는 작업장에서 붕괴되어 죽는 일이 다반사다. 영세 광부가 긁어낸 광물은 회사 사들이고 그중 일부는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애플 기업의 제품이 들어간다.

우리 모두를 대신해 더티 워크를 수행 중인 대리인들인 더티 워커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더티 워크의 핵심 특징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초한 노동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개인의 노력의 무력하지만 집단의 힘은 그렇지 않다. 암묵적 동의는 숙명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미국 교도소를 붐비게 만든 징벌적 양형 정책이 인기를 잃어갔다. 공장식 축산에 대한 태도도 도축 노동자가 처한 비참한 환경을 문제 삼기보다 유기농 고기를 집착하는 소비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는 했어도 바뀌기 시작했다. 화석연료에 대해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의존도를 줄여나가야 것이 필요하다.

더티 워크는 법과 정책의 산물이요, 예산 편성의 산물이며, 그 밖에 우리의 가치와 우선순위에 따라 우리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여러 결정의 산물이다. 그런 결정 중 하나는, 더티 워크가 무고한 사람들과 환경만이 아니라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막대한 위해를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다.

더티 워크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특권층과 비특권층이 살아가는 세계는 점점 분리되어 갈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누가 더럽다고 인식되어 누구나 피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노동을 하게 될 지는 명백히 눈에 보인다. 경제적 특권에 따라 결정되는 직업. 더티 워크는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고립된 장소로 이동하여 대다수 구성원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춰질 것이다. 교도소나 정육공장이나 드론 표적살인 같은 문제들이 주목 받을 때는 규정과 규제를 담당하는 윗사람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현장에서 일하는 더티 워커들이 비난 받는다. 그리고 우리처럼 일반 시민들은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그들을 비난하는데 합류한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더티 워크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할 때 스캔들처럼 취급하여 흥미 위주로 취재하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면서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에러렛 휴스는 '수동적 민주주의자'라는 말을 썼는데, 겉보기에는 계몽된 태도를 가졌지만 즐겁고 무심한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는 절대 아무것도 할 의도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변에서 비도덕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휴스는 지적했다. 깨어있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하기 꺼리는 수많은 수동적 민주주의자들 (나를 포함해서)이 알아야 할 사실은 더티 워크에 몰려 있는 모든 문제는 살아있는 인간들이 다시 논의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공론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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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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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쯤 친구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우리나라 문학계는 SF소설 흥행기인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배명훈 등등

그러다가 레이 브래드러리, 켄 리우 같은 작가들이 쓴 소설로 이어졌다.

친구는 물었다. SF가 흥행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마도 지금 현실에서 짚어내지 못한 모순을 SF세계로 끌어오면 좀더 극명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 어릴 적에 접했던 SF 만화에서는 알약 하나가 식사를 대신하고 로봇이 집안일을 하는 그저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이 무조건 밝은 빛만 가져다주리라는 희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치지 못할 병이 없고 갈 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발달한 문명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눈부신 빛을 던져주었지만 그만큼 깊고 어두운 그늘을 동시에 드리웠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은 가진 자에게 더 많은 부를 주었고,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눈부신 빛을 올려다보느라 그것을 만들어낸 고된 노동을 잊어버리곤 했다. 아찔한 높이로 솟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면 분명 그 건축물을 쌓아올린 노동도 존재할 것이다. 그 노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건축물 앞에서는 그 노동의 가치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늘 끝에 사람이』에서 동명의 표제작 <바늘 끝에 사람이>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지구에게 우주로 향한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숙련된 기술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회사의 이전 작업장에서 위험한 일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주인공은 회사의 도움으로 망가진 귀와 팔, 심장 등을 기계로 이식하게 된다. 이상했던 점은 한쪽만 아프거나 다쳤는데 회사에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멀쩡한 나머지 부위도 잘라내고 기계 부속품을 신체에 끼워넣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 비용을 갚아가는 방식으로 월급에서 75%는 회사에서 떼어가고 나머지만 지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인공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회사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벌어진 산재였다. 만약 퇴직을 하면 갚지 못한 수술비는 고스란히 빚이 되는 시스템이라는 걸 주인공은 나중에 알게 된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었다. 경제 위기도 닥쳐왔다. 회사에서는 우주에서 일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복귀와 동시에 해고'라는 말도 안 되는 부당해고를 지시한다.

지금보다 약간 더 미래를 그린 SF소설이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실제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 하청 업체를 거쳐서 도급으로 노동력을 구하고 직접 하청업체를 만들어서 수수료를 떼는 회사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슬프게 마음을 울렸다.

기계가 몸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짓밟고, 무시하고, 때려잡고, 굶겨 죽이고, 사람을 절망의 궁지로 몰아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어도 우리 모두는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지상에서 7만 2천 킬로미터 위, 카운터웨이트 꼭대기에 사람이 남아 있다고.

바늘 끝에 사람이

거대한 자본 권력에 이은 소설들은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빨갱이 컴플렉스가 여전히 잔재하는 사회 전반에 퍼진 광기와 폭력,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


5.18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제주해양기지 반대 운동 등을 SF와 고전설화, 미스터리, 스릴러 등의 장르로 다양하게 변주하며 보여주는 이 소설집에 담긴 작가의 목소리는 '정의'롭다.

에둘러서 표현하지 않고 아프게 희생당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기 위해 딴 길로 새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와 사람들을 기억하고 써내려갔고 독자에게 보여준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살짝 벗어나서 내려다보면 오히려 현실이 잘 보일 때가 있다. 이 소설이 그 본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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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민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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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증과 광기는 우리 내면의 풍경을 드러낸다. 우리를 움찔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것, 혹은 열광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것들을 드러낸다. 공포증과 광기를 한곳에 모아놓으면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불안장애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미국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한 적이 있으며 역사 속에서 찾은 사건과 인물들로 생생한 이야기를 직조하며 쓴 책이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거나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이력이 있는 케이트 서미스케일이 쓴 이 책은 제목을 비롯해서 목차와 덧붙이는 말까지 모두 흥미롭다.

역사 속에서 찾은 사건으로 이미 수상경력이 있는 작가는 공포증과 광기가 진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책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다.

두려워하고 열망하는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에 처음 '공포증'과 '광기'라는 이름을 처음 붙여준 사람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러시. 이전까지 '공포증'은 육체의 병과 관련된 각종 증상을, '광기'는 사회적 풍조를 설명할 때만 쓰던 단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는 두 단어를 심리적 현상으로 새롭게 정의하면서 28가지 공포증과 26가지 광기를 열거했다.

이후 18세기 정신과 의사들은 좀더 복합적으로 공포증과 광기를 이해하면서 인류 진화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남긴 흔적에서 그것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새로운 공포증과 광기가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문물과 문화가 발생하면서 그에 따른 불안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공포증과 광기는 문화의 창작물이다. 각각의 공포증과 광기가 확인-혹은 창조-된 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공포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에서도 진화심리학자들은 많은 공포증이 적응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는 내용은 설득력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뱀에 물리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겼다는 것.

"특정 대상을 피하려고 하는 강박이 공포증이라면, 광기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강박"이라는 문장은 두 가지 단어를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99가지의 공포증과 광기를 소개하고 있다. 1부에서 8부까지 같은 종류에 속하는 공포증과 광기를 각 부에 묶어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1부는 개, 거미, 고양이, 뱀 등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공포증이고, 3부는 단추, 달걀, 인형 등 '물건에 대한' 공포증이다.

고독공포증, 광장공포증, 비웃음공포증, 휴대전화부재공포증을 다루고 있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타인'을 다룬 4부와 결정장애, 과대망상, 도벽, 음주광 등 광기를 다룬 7부는 변화의 속도에 따라 불안의 속도 역시 가속화되는 요즘 주목해볼 만하다. 특히 4부 '휴대전화부재공포증'은 누구나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웃음이나 고독이라는 주제는 가볍게 지나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공포증과 강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때 개에 물렸지만 개 공포증은 없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경험과 함께 3층이었던 피아노학원에서 내려다보던 골목에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유독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놀이공원에 가면 회전목마를 가장 좋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ㅎㅎ 발표공포증이나 적면공포증도 어느 정도는 있다. 막상 발표를 하면 하기 전보다 마음이 가라앉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안감을 주는 것.

어느 특정 시대에 발생하는 집단 유행적인 공포증도 흥미롭다. 비틀즈광이나 광대공포증 같은.

인형공포증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는 우리집 거실에 놓여있는 구체관절인형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1970년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형공포증에 관한 가설 하나를 수립했다. 더 진짜 같은 인형일수록 인간의 관심을 더 끌지만, 살아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진짜 같아지면 오히려 극식한 불안감을 준다는 가설이었다. 모리는 인간과 비인간 사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인간과 비슷한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돌연 역겨움으로 바뀌는 시점이 언제인지 그래프를 그려 보여주었다. 그 시점이 되면 그래프가 한순간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모리는 그래프 모양에 빗대 이 현상을 '불쾌한 골짜기'라고 불렀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7부 '멈출 수 없는 강박적 광기'에서 '방랑벽'에 대한 내용은 가부장에서 억압된 여성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돌아다니고 싶은 충동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은 집안 살림과 가정생활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때 여자들이 공장에 불려 나가 일하고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에는 방령벽 진단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샬럿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질병이 아니라 제도 속에서 억압받은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함께 읽어보며 우리 각자가 가진 공포증과 광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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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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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당분간은 좀 쉬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런 말도 해주었다. 엄마의 말에 나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너무 쉽게 부서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밤이었고, 엄마는 잠이 들었고, 나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깨어난 뒤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숨죽였으나 5평짜리 원룸에서 울음소리를 감추기는 어려워 복잡한 마음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2시를 넘겼고 엄마의 방엔 엄마와 방과 내가 있었는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도 작고 방도 작고 나의 울음소리도 작은, 모든 것이 작은, 그런 밤이었다. 아랫집 아저씨의 방화가 내가 그간 해온 오랜 고민을 해결했다는 게 어쩐지 허탈한, 그런 밤.

별일은 없고요? / 이주란

조도가 낮은 전구 아래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고요한 밤의 온기와 작게 웃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고 별일 없는 안부를 묻고 작은 짐을 나눠서 들어주는 낮의 소란이 떠오르는 소설. 맑고 투명해서 서럽고 슬프다가 슬핏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런.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묘사나 가슴을 간지럽히는 장면이 없는 이 소설집에는 (좋은 의미의) 별일은 없지만 (나쁜 의미의) 별일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불행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것이지만, 도무지 적응은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짊어진 불행을 향해 격한 감정을 토해내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묵묵히 견디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 대도시의 생활을 멈춘 다음 소도시나 시골의 작은 방이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자고 쉬고 먹고 걱정을 내려놓는 일.

빨리 읽어내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펼친 책에서 나는 5평짜리 원룸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밤의 풍경을 보고 말았다.

그때부터 책을 빨리 읽어낼 수 없었고 책을 넘기는 순간들은 가벼울 수 없었다. 연작처럼 느껴지는 여덟 편의 단편을 읽을 때마다 오래전 내가 부서진 마음들이 오랫동안 억눌렀던 기억을 비집고 올라와 내 곁에 가만히 앉았다. 나는 그 기억과 함께 책을 읽었다. 부서진 마음에서 떨어진 먼지들에 목이 메였다. 나는 부서진 마음을 다시 붙이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오랫동안 슬펐다고 생각했다.

한번 부서진 마음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다. 작가는 부서진 마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고요한 눈빛으로 응원을 보낸다. 부서진 마음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따지지 않고 묻지 않고 온기를 나눠주는 사람들로 인해 이야기는 다음을 향해 갔고, 부서진 마음의 뾰족한 모서리는 아주 조금씩 둥글게 닳아져갔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에서 수연은 오랫동안 버텨왔던 도시의 삶을 멈추고 엄마 혼자 살고 있는 시골의 원룸으로 내려간다. 밀렸던 잠을 자고 더이상 잠이 오지 않는 밤. 사방이 조용하고 밤은 더 조용한데, 엄마의 코 고는 소리와 나의 울음 소리도 작은 그런 밤. 공간이 작으면 슬픔을 감출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슬픔은 공공연한 비밀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그 마음을 나도 받고 싶었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며 나눠주고 싶었다.

준경 씨가 가고 난 뒤 은영 씨와 나는 가로등 아래 나란히 앉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렸다. 바람결에 풀 향기가 실려 왔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어둘 때, 옷과 함게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을 주워 책 사이에 끼우거나 끼웠던 꽃잎을 꺼내 코팅기로 코팅하면 은영 씨로부터 쓸데없는 걸 한다는 타박을 듣기도 했다. 나는 나를 타박하는 은영 씨가 좋아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쓸데없는 일들을 했다.

여름밤

경아야, 뭘 좀 먹고 있어.

아줌마의 메시지였다.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신 다음 냄비 두 개를 열어보았다. 하나는 된장국, 하나는 호박죽이 들어 있었다. 나는 호박죽을 데워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조금 흘린 것은 호박죽이 너무 맛있어서도, 무언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한 때문이었다.

어른

수연, 보라, 경아. 이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은영이다. 좋은 별일은 없지만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그런 사람이 되는 은영. 나는 은영과 만나고 싶었고 그런 은영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조금씩 젖어드는 것이 이 소설들의 매력이기도 한데, 자신의 말을 내세우지 않고 정답이라고 외치지 않는 은영같은 인물들이 그 한축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변화를 세세하게 잘 포착하고 있다는 점과 소박한 일상의 풍경을 공감되게 잘 그려내었다는 것.

이곳에 모여있는 모든 소설들이 부서진 마음을 내던지지 않고 모여앉아 작은 목소리로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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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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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의 패권 싸움이 멈추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상황을 볼 때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는 난처한 입장에 처할 때가 많다. 이럴 때일수록 외교의 중요성이 대두되곤 하는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오늘은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중국의 부패와 경제성장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중국에 대한 호감. 비호감 정서나 인권과 관련된 여러 지수와 무관하게 중국은 급속도로 경제적 성장을 이뤄낸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강력한 독재체제와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정치경제와 글로벌 영향력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한 명인 위엔위엔 앙은 '부패와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중국의 도금 시대를 비교 역사학 관점에서 설명하며 미국과의 비교를 통해 모든 부패가 발전에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모든 부패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여러 형태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부패의 4가지 유형으로 세분화하여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바늘도둑-소도둑으로 나누면서 사례를 들어주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제목과 차례에서 주는 무거움은 조금은 덜어내면서 읽을 수 있다.

전체적인 부패의 수준만큼 부패의 구조가 중요하다: 부패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부패는 러시아의 부패보다 덜 파괴적이다. 두 나라 모두 정실주의가 판을 치지만 중국에서는 성장을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부패 수준은 낮다. (급행료, 바늘도둑, 소도둑)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위의 내용에 대해 조금 들여다보면, 전통적으로 부패란 공무원이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로 정의하지만 이런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저자는 부패를 다음과 같이 세분화했다. 정부의 혜택과 서비스를 받기 위한 대가성 뇌물과 어떤 교환도 없는 횡령 및 갈취(도둑질), 고위 공무원이 벌이는 거대한 부패와 하위 공무원이 벌이는 사소한 부패. 이를 기준으로 부패를 분류하면 4가지 유형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저자는 각각 ‘바늘도둑, 소도둑, 급행료, 인허가료’라고 부른다.

모든 유형의 부패는 부정적이지만 경제에 동일하게 악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약물에 비유한다. 공공 재산과 사유 재산을 소진하는 특징을 가진 바늘도둑과 소도둑은 건강을 갉아먹고 성장을 방해하는 유해 약물. 급행료는 일종의 진통제라고 할 수 있다. 적은 뇌물을 이용하면 행정상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의 비즈니스에는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부패 역시 시민과 업계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성장에 해를 끼친다. 인허가료는 자본주의의 성장 촉진제, 스테로이드다. 바늘도둑, 소도둑, 급행료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지만 인허가료는 활발한 사업과 투자를 불러오기 때문에 경제 성장에도 일조한다. 하지만 스테로이드가 우리 몸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인허가료는 불만과 불평등을 고조시키는 폐해가 있다.

모든 나라가 각 유형이 비중 차이가 있을 뿐 이 4가지 유형의 부패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그 나라에서 어느 부패 유형이 지배적인지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한 나라의 부패 구조를 이해하고 성장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중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패 유형은 인허가료이다. 한국, 미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도 중국처럼 인허가료 부패가 지배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소득 국가라는 점이다. 반면 방글라데시와 가나에서는 급행료, 나이지리아에서는 소도둑, 태국에서는 바늘도둑이 지배적이다. 중국이 광범위한 부패 속에서도 빠르고 거대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부패 구조의 차이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중국식 이익 공유 모델로 이에 힘을 더하고 있다고. 이처럼 중국은 인허가료와 이익 공유제라는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 촉진제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사회에 팽배해진 불만과 불평등은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다. 마치 미국이 도금 시대를 넘어 진보 시대로 나아간 것처럼 말이다.

평소 잘 접하지 않았던 생소한 개념을 다룬 책이라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저자의 반복되는 설명과 재미있는 세분화에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어낼 수 있어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돌아서면 다시 잊어버릴 것 같지만, 저자의 결론처럼 '부패를 새롭게 보아야 중국과 세계가 보인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다.

이 책은 2가지 핵심 증거를 제시했다. 첫째 부패는 항상 나쁘지만 모든 유형의 부패가 경제에 똑같이 나쁜 것은 아니며 같은 종류의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부패를 박멸함으로써 발흥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부패의 박멸이 아니라 부패의 정성적 진화(폭력과 도둑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으로)를 통해 발전했다. 부패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부패 영향과 측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영향을 구분해야 한다. 내가 첫걸음을 뗐고, 다른 동료들이 이 길에 동참하길 바란다.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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