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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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먼 친척의 부고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한두 번 만났을 정도로 왕래가 없었기에 얼굴도 흐릿하게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친척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죽음은 나이에 맞춰서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내가 죽음의 원인에 대해 묻자, 부고 소식을 전해준 이는 그가 조선소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조선소에서 용접 작업을 하던 중에 갑작스레 떨어져내린 철근에 깔린 거라고. 명백하게, 산재사고였다.

출근을 했다가 퇴근하지 못한 그 분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분이 사고를 당한 순간을 떠올렸고 누구라도 일터에서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고,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울컥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돈과 시간(사실 시간은 돈과 같은 맥락이니까 결국은 돈)을 아끼기 위해 일터의 위험 요소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산재사고로 하루 평균 두 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일을 하기 위해 출근을 했다가 퇴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두 명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참사와 재난, 안전할 권리 등을 주제로 현장을 취재하는 신다은 기자는 이 책에 산재 현장을 취재하며 모은 지식을 담으면서 두 가지를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1부와 2부에서는 산재 사망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파악해 그 기저에 기업 조직의 어떤 관심과 인식이 있는지 탐구하는 것을 담았고, 3부와 4부에서는 다른 하나는 연간 800여 명에 달하는 산재 사고 사망자의 조사자료가 왜 공개되지 않으며 이를 드러내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알아보는 내용을 담았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부 : 2021년 평택항에서 숨진 20대 노동자 이선호 씨 사고를 중심으로 '안전을 방치한 기업 구조'가 노동자 죽음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2부 : 2015년에서 2022년 사이에 언론보도에 알려진 여러 제조업 산재 사망사고를 유행별로 분류

3부 : 산재의 원인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사회 구조적 배경을 기업과 정부, 노조, 언론의 4가지 영역으로 나눠서 살펴

4부 : 앞으로 산재사고에 관해 더 많은 정보가 드러나려면 무서을 해야 하는지 갈무리


제 아이가 죽은 가장 큰 이유는 그날 그 작업을 우리 아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아무 전문성 없는 사람이, 관리감독자도 없는 상황에서 시켰기 때문입니다. 부두 내에서 항상 사고의 위험은 내재돼 있었으나 (그간) 천만다행으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작업 인력의 전문성, 즉 다시 말해 해 봤던 사람들이 일을 하니까 누구보다도 작업의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어떤 작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고 당일에는) 위험한 작업장 내에서의 전문 인력의 중요성을 배제한 채 이 일, 저 일을 시켰습니다. (이재훈 씨 유족 의견서)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p44


가장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평택항에서 사망한 이선호 씨의 사고와 관련되어 안전을 방치한 기업 구조에 관한 내용이다. 사고 당일 아버지는 선호 씨와 같은 평택항에 있었다. 다른 노동자를 야적장에 가라는 말을 하러 갔던 선호 씨는 올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았고, 야적장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아버지는 '자는 듯 엎드린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명백한 산재사고였으나 기업은 노동자의 과실로 주장하고 나섰으며 죽음이 알려지기까지도 보름이 걸렸다. 선호 씨의 죽음에는 4가지 원인이 있었다. 이리저리 넘겨진 지시로 인해 빠져나간 안전, 노후화된 설비와 잘못된 작업 방식, 위험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소통 부재, 형식적 안전 관리.

책에서는 산재사고 발생의 유형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고 있다.

첫째, 회사가 세워 둔 안전수칙이 효율적 업무방식과 충돌할 때이다. 많은 산재사고가 겉으로 보기에 노동자들의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위험을 감수하고 일할 선택지는 있지만 그러지 않을 선택지는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그 예로 2022년 식품기업 SPC의 자회사 SPL에서 청년 노동자가 샌드위치 속재료를 만들다가 소스 만드는 기계에 몸이 끌려들어가 숨지는 사고를 이야기한다. 원래 규정은 덮개를 덮는 것이지만 생산 물량이 많고 일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덮개를 열어놓는 작업 방식이 관행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더욱 큰 문제는 노동을 하지 않는 쪽에서 규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말로 안전을 생산보다 우선순위에 놓고자 한다면 기업 조직 전체가 그 목표에 투자하고 도달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 안전은 노동자나 안전관리자 한두 사람의 의식 변화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전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의 목표여야 한다.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p69


둘째, 위험에 관한 기업 간 소통이 부족할 때이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에 끼여 숨진 사고 발생했다. 김용균 시는 컨베이어를 감싸는 문을 열고 그 안에 몸을 직접 집어넣어 소음을 확인하고, 고장난 듯한 곳은 사진까지 찍어 윗선에 보고해야 했다. 원칙적으로는 컨베이어와 노동자는 거리를 둬야 했지만 거리를 두면 작업을 할 수 없는 현장이었다. 위험 정보를 공유하는데 실패한 결과였다. 컨베이어에 몸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정보, 두 정보가 적시에 공유됐다면 작업 방식을 바꾸거나 설비를 개선하는 식으로 사고 위험 미리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셋째, 안전에 투자할 돈과 시간이 부족할 때이다. 우리 사회는 안전에 배분하는 돈의 기준이 낮은 편이다. 건설법을 예로 들면, 법적 산업안전보건관리비는 50억 이상 공사 현장의 경우 공사액의 1.97퍼센트 수준으로 아주 적다. 인건비, 보수 비용만 책정해도 안전관리비의 120퍼센트가 넘어서 안전관리 인원 채용도 못하는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덴마크의 안전 공학자 에릭 홀나겔은 기업의 계산법에 주목해서, '사고 상황 줄이기'보다 '사고 안 나는 상황 늘리기'에 중점을 두자고 제안했다. 더 확실한 문장으로 변환하자면, '안전한 일터를 만들자는 것.'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빨리 끝낼수록 이득이 되는 구조 속에서 말단의 2차, 3차 하청 노도자들은 속도전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안전한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안전에 관한 설명이 부족할 때이다. 노동자에게 작업환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험한지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흔한데, 사업주도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다가 어느 날 몸이 왜 나빠졌지 하는 상황에 이른다. 안전관리를 사업주에게만 맡겨놓고 나중에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묻는 면피성 안전관리는 사업주 교육에 실패한 정부의 책임도 크다.


이 챕터에서 사업주가 하는 오해와 진실 일부를 발췌했다.

1. 오해: '안전하지 않은 물건을 시중에서 팔 리 없다.'

실제 : 어떤 물품을 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2. 오해 : '나는 유해물질을 다루고 있지 않아.'

실제 : 대부분의 작업은 건강에 유해할 수 있는 물질을 사용합니다. 심지어 밀가루처럼 흔한 물질도 공장에선 건강에 해로운 물질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3. 오해 : '자연물질은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 자연물질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목재 분진은 천식을, 돌이나 콘크리트 먼지는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시트러스 오일도 피부 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p141

다섯째, 안전에 대한 역량과 이해가 부족할 때이다. 이 부분에서는 소규모 기업 안전관리가 부재하다는 내용과 함께 폐기물업체 파쇄기에 빨려 들어가 숨진 김재순 씨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론에서 산재사고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 정도에서 소식에 대한 생각을 멈춘다. 그저 수많은 사망사고 중 하나라는 생각이 강한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망사고는 이렇듯 수많은 구조적 원인을 품고 있다.

산재사고가 발생한 다음에 벌어졌는데 왜 은폐되고 밝혀지지 않는지에 대한 내용은 답답한 마음에 흙을 끼얹는 것 같다. 희망을 향한 숨구멍이 남아있을까 싶은 처참한 심정마저 든다. 정부에서 처벌 위주의 비판을 하고 안전 관리를 돕는 대신 원칙론만 내세우는 이유. 노조가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의 결과. 깊이 탐색하기보다 단신 보도에 바빴던 언론의 책임 등. 결국 비어 있는 서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조와 시민사회가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유족이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족의 산재 소식을 접한 유가족들이 눈물로 만든 안내집이 있다.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이 산재 사망사고 유가족을 위해 만든 안내서 <수많은 우리들이 함께 찾는 길>. 이 전자 책자는 산재로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의 경험이 담긴 종합 안내서로 인터넷에서 누구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안내서에 소개된 내용 중에서 "장례는 '빨리'가 아니라 '제대로' 치러야"한다는 말이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에 갑자기 막내 외삼촌의 왼쪽 팔이 떠올랐다.

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걸까. 막내 외삼촌은 외양선을 타다가 왼쪽 팔을 잃었다. 기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 전원을 끄고 살피러 갔는데, 점검을 한다는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른 직원이 전원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왼쪽 팔이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배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고 상처가 깊어서 팔을 살리지 못했다.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외삼촌이 너무 자연스럽게 팔을 사용하시는 걸 보고 잊고 있었나보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게 어디 있을까. 일터는 살아가기 위한 곳이지 죽기 위한 곳이 아니다. 산재 조사는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는 일이다. 속보로 전해지는 산재사고에서 지워진 사람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되살리는 것은 추모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산재사고 뿐 아니라 재해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 이야기를 덮지 못하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왜'냐는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산재를 줄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높다란 담으로 둘러쳐진 공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는 알기 어렵다. 전국의 위험한 현장을 다 멈추게 하거나 일일이 점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을 읽으며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터의 죽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독자들이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변한다. 사고 발생 후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은 몇몇 기업들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건의 사항을 받아들이고 선제적으로 설비 개선을 하며 '안전에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인식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고 기업과 정부에 강하게 요구한 결과다. 노조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로서 산업안전을 주목하고 대응책을 찾고 있다. 모두 시민들의 관심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에필로그/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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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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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가 꿈꿨던 미래는 밝고 환한 빛이 가득한 곳이었다.

사람들을 아프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번거롭게 하는 등등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세계.

미래에 도달하면 불필요한 곳은 전혀 없는 정돈된 공간에서 냄새를 풍기는 음식 대신 캡슐 한 알로 식사를 대신하고, 주름살 하나 없는 매끈하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멸균 상태에서 살아가는 세계.

나는 그런 세계가 다가올 미래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문을 열기도 전에, 그런 미래는 아이들의 꿈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며, 현실에서 직접 마주해야 하는 미래에서는 과학의 빛이 커진 만큼 그림자의 크기와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달이 반드시 문명의 발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측면에서만 이 세계를 측정하고 판단할 때 또 다른 측면의 것들은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톨스토이의 책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편리하고 더 빠르게, 더욱 멀리 나아가도록 만드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속화될수록 우리에게는 그러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 책에 수록된 <ANA>를 예로 들어보자.

인공자궁이 통용되는 미래에 아나는 가장 처음으로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그래서 아나는 개인의 이름이면서 인공자궁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인공자궁 회사 ANA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빛이 커질수록 그림자도 커지는 법. 인공자궁 클리닉을 이용하는 부모들 중에서 자기 자식을 데려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뀌어서." "아이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수령 아이들이 생겨나면서, 클리닉에서 생긴 아이들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인공자궁에서 출생한 아이는 클리닉이 제공하는 상품인가 아닌가?"

아나는 인공자궁 클리닉의 이름이자 대표 얼굴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했고, 그 가족은 결국 사고를 꾸며서 신분 세탁을 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아니가 카메라 앞에서 했던 마지막 말은 이 책을 어우르는 주제와도 연결된다.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디에 끌어들여서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한 사람이다.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공자궁의 상징, 프로파간다의 천사, 자본주의의 인형, 메디테크의 창녀라고 불렀지만,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ANA/ 웰다잉 프로젝트

유전자 조작으로 모두가 아름다워진 세상에서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원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붉은 여왕>, 원하는 대로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자본의 세계를 그린 <웰다잉 프로젝트>, 변기를 숭상하는 사이비 마을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신은 변기>, 키우던 햄스터가 자신의 손톱을 먹고 도플갱어가 된 후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우연한 객기로 인질극을 벌인 3명에 대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해석을 덧붙이며 사실을 왜곡해가는 <마지막 비행> 등 모두 여섯 편이 실린 환상만화 앤솔로지 『웰다잉 프로젝트』.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다수 수상하고, 카카오웹툰에서 다양한 세계관과 작화를 선보여온 봉봉 작가의 첫 작품집인 이 책은 만화이기 때문에 쉽게 읽힌지만 스토리에 담긴 주제의 무게 때문에 쉽게 속도를 낼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SF를 읽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미래의 어두운 면을 담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처음에는 왜 신나고 재미있는 내용보다 우울한 내용이 많을까 하고 의아해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실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중에는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더 해결이 미뤄지거나 감춰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조금 전에 했던 아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출산율이 낮은 지금에도 아동 양육과 교육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금보다 미래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어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진다. 사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래가 되면 지금 가장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환경은 20세기의 어린이였던 내가 꿈꿨던 미래처럼 밝고 환하게 변화할까. 이것에 대해서는 바로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라고.

이 책은 만화의 재미에 현실의 문제가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담으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담고 있다. 내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를 무척 많이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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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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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현실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목화는 목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꿈에서는 설명 없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

단 한 사람/ 최진영

금화를 잃고도 목화는 나이를 먹고 자랐다. 그러다가 열 여섯 살 되던 해에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이 아니었다. 꿈이라고도도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목화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목화는 부디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해달라며 괴로워하며 기도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향해 빠르게 떨어졌다. 그때 의심하지 말고 구하면, 목화가 받으면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화는 달려가서 두 팔을 내밀었고 떨어지는 한 사람을 구해냈다.

한 사람.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속도와 두 팔로는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도 자각몽도 아닌 꿈속같은 장소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목화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딸에게만 내려오는 유전이었다. 목화의 어머니 장미수도 목화 나이 즈음에 그러한 숙명을 받았다. 미수의 어머니 임천자도 그러한 숙명을 받았다.

죽음을 향해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임천자는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장미수는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장미수는 자신의 아이들은 그런 운명을 타고 나지 않기를 바랐다. 장미수는 꿈속같은 장소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끔찍한 두통이 생겼다. 단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장미수의 고통을 알아차린 신복일은 장미수의 건강을 걱정했고 마음을 주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해서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일화, 월화, 금화, 목화와 목수

한겨레출판에서 가제본으로 받은 최진영의 <단 한 사람>을 읽었다.

얇은 흰 책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잃었는지도 모른 채 잃은 것을 찾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오랫동안 이야기의 맥락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최초의 씨앗에서 자란 나무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을 지나면서 숲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었고, 하나의 나무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다. 그리고 다른 나무는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숲과 나무가 뒤이어 나오는 일화, 월화, 금화, 목화, 목수 이 다섯 명의 아이들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 어떻게 연결이 될 것인지 궁금했다. 숲에서 사라진 금화는 살아있을까, 숲에 흡수된 것일까.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어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증명해가는 최진영 작가의 이야기는 늘 마지막이 궁금하다. 이미 《구의 증명》에서 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독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증명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는 어떤 증명을 거쳐서 어떤 세계에 이를까.. 그리고 만약에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벌이라고 부를 것인가. 가제본만으로도 큰 세계가 펼쳐지는 기분이 드는 최진영의 <단 한 사람>의 마지막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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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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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길고 아득한 독서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맛집을 기록한 책은 여럿이지만 식민지 시대 소설을 통해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은 처음 접하는 것 같다. 작가의 이름만 아는 소설들이 많았지만 책에서 등장인물들이 경성 맛집을 찾아갔을 때 내용을 소개하고 줄거리와 결말까지 알려주고 있어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염상섭의 《삼대》는 교과서에도 자주 실려서 읽어본 독자가 많을 거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 《삼대》는 1장 '조선 최초의 서양 음식점' 청목당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19030년대 초 경성을 배경으로 만석꾼 조 의관, 아들 조상훈, 손자 조덕기 등 삼대에 걸친 가족이 겪는 삶의 굴곡과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삼대》에서 청목당은 조상훈의 자식을 낳았지만 외면당해 술집에서 일하게 된 홍경애가 상훈에게 저녁을 사달라고 조르면서 데리고 간 장소이다. 그곳에서 홍경애는 청목당 3층에서 '큐라소'라는 라라하 오렌지를 원료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을 마신다.

이 책에서는 당시 발표되었던 소설에 등장하는 맛집들을 통해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은 맛집들의 과거를 조명하고 있다. 곳곳에 실제 메뉴판과 사진, 신문에 실린 광고 등의 삽화를 보는 재미도 크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더 읽을거리>라는 코너를 두어 맛집을 알리기 위한 본문 내용에 더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경성의 맛집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을 서두에 꺼내고 있다. 그는 방치된 문화 유산 뿐 아닐 전반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근대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음식을 공부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기억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하면서, 음식은 하나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이 가늠되기 이전의 기억이 남아있는 드문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식민지 시대의 경성 맛집을 다루는 것에 대해 오해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사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이지러짐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각 장의 마지막에 실린 <더 읽을거리>와 맛집 소개의 곳곳에 들어간 작가의 역사 인식을 보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책에서 다루는 맛집들이 등장하고 자리를 잡았던 때는 식민지 시대였다. 그런 까닭에 경성의 맛집을 다루는 이 책이 식민지 경험을 수긍하는 것으로 오해도리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사실을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이지러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가 아닐까? 이 책은 경성의 맛집에 드리웠던 식민지의 그늘에 주목하고 이를 밝혀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들어가며/ 경성 맛집 산책

이 책의 1부에서는 본정에 위치했던 식당 네 곳을 소개한다.

조선 최초의 서양요리점 청목당, 가족의 나들이 명소 미쓰코시백화점 식당, 경성 제일의 일본요리옥 화월,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유혹했던 이국적인 과일 디저트 카페 가네보 프루츠팔러. 본정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명동거리를 가리킨다. 식민지 시대에도 화려하게 피어났던 거리에 위치한 맛집들의 메뉴와 가격, 건물과 내부 묘사, 음식들의 맛 묘사와 소설에 등장하는 그곳의 장면들. 무엇보다 그런 맛집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상황까지. 지루할 틈 없이 맛집 산책이 이어진다. 런치가 가장 인기 있었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등장하는 소설은 김말봉의 《찔레꽃》, 장혁주의 《삼곡선》 등이다. 작가는 화려한 미쓰코시 백화점 소개 뒤에 일본인들을 위한 출장소였다는 식민지 현실을 내비치며 역사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려준다.

2부에서는 종로에 위치한 세 곳의 식당을 소개한다. 경성 유일의 정갈한 조선음식점 화신백화점, 김두한이 단골로 다녔으며 지금도 정상 영업을 하고 있는 이문식당, 평양냉면에 필적하는 경성냉면 동양루.

당시 백화점들은 모두 서양 요리만 팔았는데 유일하게 조선인이 경영한 화신백화점에서는 조선음식을 팔았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등장하는 백화점은 온종일 줄을 서서 먹은 '조선 런치'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정상 영업 중인 이문식당이 나오는데, 나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내 비위에는 입구부터 맞지 않아서 설렁탕을 포장해왔지만 한 입도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누린내가 강하게 풍겼다니 하는 기록을 보면 내 비위가 약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린내조차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설렁탕에 이어 또 다른 소울푸드인 냉면은 배달음식으로 유명했다. 경성 곳곳에 식판을 메고 배달을 달리던 자전거들이 많았다고 한다.

3부에서는 장곡천정과 황금정에 위치한 세 곳의 식당을 소개한다. 장곡천정은 지금의 웨스턴조선호텔, 롯데백화점, 더 플라자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지금의 중구 소공로 부근을 가리키는 지명인 장곡천정은 조선 태종이 둘째 딸인 경정공주의 집이 있는 곳을 한자로 표기한 소공동에서 유래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 조선의 2대 총독을 역임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라는 인명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조선호텔의 원래 이름은 '조선처도호텔'로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철도를 이용하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건림한 철도호텔이었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지은 조선호텔에 등장하는 소설은 심훈의 《불사조》이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칭송받는 계훈이 독일 유학 당시 '주리아'라는 독일 여성과 결혼을 한 다음 연주회를 하기 위해 조선에 왔는데, 문제는 계훈은 이미 조선에서 정희와 결혼해 아들까지 두고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리아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계훈은 연주회에서 전처 정희를 보고 주리아를 데리고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간다. 한 달 동안이나 투숙하고 있는데, 호텔 하루 방값이 12원이라고 적혀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만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투숙하고 양식밖에 못 먹는 주리아를 위해 하루 세 끼를 호텔에서 먹어야 했는데 그 가격도 하루에 14원이다. 그럼 하루 방값과 식사값을 합치면 150만원 정도 되는 것!

조선호텔이 철도호텔로 개장되었다는 사실은, 조선호텔 역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건설했던 목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일본이 철도를 건설했던, 특히 부산에서 출발해 경성을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노선의 철도를 사활을 걸고 개척했던 것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조선호텔의 구조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환구단'은 본래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며, 그 북쪽에 위치한 '황궁우'는 신위판을 봉안하는 부속 건물이었다. 환구단의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자 황궁우는 조선호텔을 장식하는 건물로 전락하고 만다. 식민 지배를 위한 철도호텔이 중심에 있고 황궁우가 그것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되는 것, 그것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조선호텔의 빛과 어둠/ 경성 맛집 산책

장곡천정에서 낙랑파라를 빼놓을 수 없다. 낙랑파리는 '목일회'에 속한 구본웅, 길진섭, 긴용준, '구인회'구성원인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중앙에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큰 야자나무 형상과 파초가 있고 당시 유행이던 등나무 탁자와 의자 아이템에 놓여있는 내부를 찍은 사진에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낙랑파리는 응접실이나 거실을 뜻하는 '파라'의 일본식 표기에서 왔다고 한다. 이곳에 매일 왔던 이상은 사람들과 담소를 하다가 자신이 마신 찻값 10전만 내고 일어섰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더치페이. 김소운은 이상의 당시의 관행이나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기 때문으로 보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궁핍에 시달렸던 이상이 예의를 갖추려고 했던 행위가 아닐까 싶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파라에 그린 이상의 낙서나 그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그린 삽화를 보면, 역시 이상은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비참한 식민지 시대에도 번화했던 경성의 거리와 일본이 가져온 서양식 음식들. 가벼운 드라마에서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화려한 모습에 독립운동 한 스푼을 첨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소개된 맛집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해주고 있어서 오랫동안 흔적을 찾아서 기록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지금의 맛집처럼 그때도 유명한 식당에 가기 위해서는 온종일 줄을 섰다고 한다. 그때의 맛집을 가볼 수 없으나, 이렇게 책으로 만나보는 시간여행을 해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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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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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하는 기록노동자 희정이 서로 다른 연령과 분야의 베테랑 13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기록한 책이다. 그동안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르포집을 내고, 일하다 죽고 병드는 사회를 기록하고, 청수성심병원 이정미 노동열서 평전과 성소수자 노동을 다루었으며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전자산업 내 2세 질환 직업병 문제 등 노동으로 인해 사회적 질병을 얻게 된 이야기를 썼던 작가가 이번에는 베테랑을 만났다. 저자는 '베테랑의 몸'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그들을 찾아가서 "자신을 베테랑이라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졌다. 질문을 받은 이들의 대답은 각자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이다. 이른 아침 작업장, 주방, 목욕탕, 출산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성실은 성실하게 몸에 새겨진다.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실이 자신과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살린다고 믿지만, 몸에 성실히 새겨진 노동의 기록은 대가를 요구한다.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어깨, 목, 허리, 골반으로. 그는 통증으로 인해 관절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통증이 자세를 만들고, 자세는 체형을 만든다. 반복된 행동은 버릇과 습관으로 남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뱃심 든든한 몸통, 짙게 그을린 피부, 딴딴한 장딴지, 표정이 다채로운 얼굴, 짧게 다듬어진 손톱, 갈라진 발바닥, 우렁찬 목청, 청력 낮은 귀는 자신의 것이 된다. 젊은 시절, 아직 노동을 거치지 않았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몸을 안고 살아간다.

프롤로그/ 베테랑의 몸

각 분야의 베테랑을 인터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노동인지 생각해본 다음 저자는 그들에게서 어떤 '가짐'들을 보았다고 한다. "자신만의 원칙이 무엇이건, 모두 견디고 버티고 인내하며 꼴을 갖춘 몸가짐과 마음가짐" 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베테랑의 손과 발을 보다가 그의 손에 쥐어진 것, 그의 발이 딛고 있는 자리가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관계 맺어야 하는 대상과 어떻게 눈을 맞추는지도 보았다고.

그렇게 노동현장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버티고 살아온 그들의 시간을, 저자는 알고 싶어서 인터뷰를 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 오랜 시간 집중해온 분야가 다른 만큼 노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몸과 기억의 기록이 다른 까닭이다. 1부 ‘균형 잡는 몸’에서는 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등 혼자 하는 일에 집중을 하면서도 힘을 주고 풀어내며 일하는 베테랑의 몸에 집중하고 있고, 2부 ‘관계 맺는 몸’에서는 조산사, 안마사, 마필관리사, 세신사처럼 몸담고 있는 노동현장에서 마주하는 대상을 살피는 감각을 살핀다. 그리고 3부 ‘말하는 몸’에서는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전시기획자, 배우, 식자공처럼 표현하는 몸으로 수어·감정·연기·활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듯한 저자의 질문에 베테랑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노동처럼 붙이거나 빼는 것 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지금보다 힘들게 일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과 그 시간을 버티고 난 지금에 대해서 별 거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털어놓고 있지만 노동으로 익숙해진 몸은 말이 들려주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고 지나온 그들도 시대가 변한 지금 옛날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대는 변했고 노동환경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 중 자연주의출산센터의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산사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산모는 환자가 아니라 출산의 주체라는 말. 병원에서 출산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산모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금식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데, 그건 선진국에서는 고위험군 산모에게만 쓰는 방식이라고 했다. 책에 나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성의 몸을 존중하고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조산사 김수진 씨는 경험과 숙련이 쌓이는 만큼 과도한 노동을 하기에 체력이 아슬아슬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균형은 베테랑 뿐 아니라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한 생이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어떠한 시간과 감정, 그리고 노동이 들어가는지 조산사를 통해 엿보았다. 환대와 환희. 이 단어들을 앞세우기 위해 견뎌야 하는 통증과 외로움. 이를 견디게 하는 의존과 믿음. 내가 아무리 출산과 돌봄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이 탄생의 순간에 투여된 것보다 몇 배가 넘는 인내와 노동이 돌보고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안다.

참 쉽게 사라진다. 무수한 생이 단숨에 사라지는 일은 가슴을 부여잡고도 삶을 휘청이게 한다. 그리고 야금야금, 일 하다가 너무 많은 이들이 병들고 목숨을 잃는다. '한 해에 2000명이 일하다 죽는'이라는 문구는, 관용어도 아닌데, 10년이 넘도록 변하질 않는다. 단 한 사람만 죽일 수 없으니, 단 2000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겠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생명과 존중에 대하여' 인터뷰 후기/ 베테랑의 몸

마필관리사에 대한 인터뷰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들어있다. 말을 돌보며 관리하는 마필관리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이 왜 인간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말을 왜 달려야 하는지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왜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를 열게 되었냐는 질문에 마필관리사는 말이 달리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고 내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다.

뒤이어 저자는 천선란의 《천개의 파랑》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마지막 질문을 한다.

"그럼 말은 왜 달려야 하나요?" 마필관리사의 대답은 어떠했을까. 책에 나오지 않지만 몹시 궁금해졌다.

영어를 배울 때 귀가 먼저 뚫려야 하는 것처럼 수어는 눈이 먼저 트여야 한다고 말하는 수어통역사 장진석 씨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학교 1학년 때 '수화 동아리'에 들어간 장진석은 수어가 재미있어서 배웠지만 농인조차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실제 농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잘못 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것은 수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쓰는 청인들의 언어에 단어만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수어의 '콩글리시'였다는. 본격적으로 수어를 배운 후부터 농인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언어를 알게 되었고 수어의 매력이 더 커졌다는 정진석 씨는 농인들은 소리를 모두 눈으로 판별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뿐 아니라 모든 신체, 특히 얼굴 표정이 중요한 언어가 되는 거라고. 또한 수어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맥락을 함께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내가 종종 입밖에 내는 바람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만의 언어를 찾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사람들이 독창적이고 미학적인 글을 쓰거나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코다(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로서의 경험을 담은 저서를 쓴 이길보라 감독은 "언어를 찾는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 몸에 겹겹이 쌓여 있던 행동 양식과 가치 판단을 하나하나 풀어 나를 가두던 틀을 바라보는" 일. 자신만의 언어를 찾자는 말은 사회가 빚은 그릇을 벗어나보자는 의미였다.

'그 편리와 효율은 누가 정하는 걸까' 인터뷰 후기/ 베테랑의 몸

"사람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말에 어쩐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사회적 비극이나 아픈 사건들 이후 다수가 우르르 몰려가서 어디선가 들은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착각하면서 일말의 가책도 없는 표정으로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그것이 오직 진리인 것처럼 외치는 광경에 저자의 이 문장을 풀어놓고 싶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만의 언어로서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도록. 자유를 외치면서 정작 자유의 의미를 잃어버린 언어에 길들여진 혐오의 덩어리에.

우리는 각자의 노동을 하며 각자의 몸으로 굳어졌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노동의 분야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 뿐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저자의 인터뷰로 인해 내가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했던 분야의 노동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실제 인터뷰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지는 책이라고 가독성이 좋았다. 그리고 저자의 생각이 좀더 깊이 담긴 인터뷰 후기는 생각할 여지를 두고 있어서 더 좋았다.

노동은 노동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 노동이 연결되어 있는 지점과 만났을 때 그 지점이 보일 때는 의미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 같다. 오랜 노동으로 빚어낸 시간과 만날 수 있었던 책!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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