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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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가 꿈꿨던 미래는 밝고 환한 빛이 가득한 곳이었다.

사람들을 아프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번거롭게 하는 등등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세계.

미래에 도달하면 불필요한 곳은 전혀 없는 정돈된 공간에서 냄새를 풍기는 음식 대신 캡슐 한 알로 식사를 대신하고, 주름살 하나 없는 매끈하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멸균 상태에서 살아가는 세계.

나는 그런 세계가 다가올 미래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문을 열기도 전에, 그런 미래는 아이들의 꿈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며, 현실에서 직접 마주해야 하는 미래에서는 과학의 빛이 커진 만큼 그림자의 크기와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달이 반드시 문명의 발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측면에서만 이 세계를 측정하고 판단할 때 또 다른 측면의 것들은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톨스토이의 책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편리하고 더 빠르게, 더욱 멀리 나아가도록 만드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속화될수록 우리에게는 그러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 책에 수록된 <ANA>를 예로 들어보자.

인공자궁이 통용되는 미래에 아나는 가장 처음으로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그래서 아나는 개인의 이름이면서 인공자궁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인공자궁 회사 ANA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빛이 커질수록 그림자도 커지는 법. 인공자궁 클리닉을 이용하는 부모들 중에서 자기 자식을 데려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뀌어서." "아이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수령 아이들이 생겨나면서, 클리닉에서 생긴 아이들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인공자궁에서 출생한 아이는 클리닉이 제공하는 상품인가 아닌가?"

아나는 인공자궁 클리닉의 이름이자 대표 얼굴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했고, 그 가족은 결국 사고를 꾸며서 신분 세탁을 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아니가 카메라 앞에서 했던 마지막 말은 이 책을 어우르는 주제와도 연결된다.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디에 끌어들여서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한 사람이다.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공자궁의 상징, 프로파간다의 천사, 자본주의의 인형, 메디테크의 창녀라고 불렀지만,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ANA/ 웰다잉 프로젝트

유전자 조작으로 모두가 아름다워진 세상에서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원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붉은 여왕>, 원하는 대로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자본의 세계를 그린 <웰다잉 프로젝트>, 변기를 숭상하는 사이비 마을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신은 변기>, 키우던 햄스터가 자신의 손톱을 먹고 도플갱어가 된 후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우연한 객기로 인질극을 벌인 3명에 대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해석을 덧붙이며 사실을 왜곡해가는 <마지막 비행> 등 모두 여섯 편이 실린 환상만화 앤솔로지 『웰다잉 프로젝트』.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다수 수상하고, 카카오웹툰에서 다양한 세계관과 작화를 선보여온 봉봉 작가의 첫 작품집인 이 책은 만화이기 때문에 쉽게 읽힌지만 스토리에 담긴 주제의 무게 때문에 쉽게 속도를 낼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SF를 읽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미래의 어두운 면을 담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처음에는 왜 신나고 재미있는 내용보다 우울한 내용이 많을까 하고 의아해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실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중에는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더 해결이 미뤄지거나 감춰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조금 전에 했던 아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출산율이 낮은 지금에도 아동 양육과 교육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금보다 미래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어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진다. 사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래가 되면 지금 가장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환경은 20세기의 어린이였던 내가 꿈꿨던 미래처럼 밝고 환하게 변화할까. 이것에 대해서는 바로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라고.

이 책은 만화의 재미에 현실의 문제가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담으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담고 있다. 내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를 무척 많이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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