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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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하는 기록노동자 희정이 서로 다른 연령과 분야의 베테랑 13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기록한 책이다. 그동안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르포집을 내고, 일하다 죽고 병드는 사회를 기록하고, 청수성심병원 이정미 노동열서 평전과 성소수자 노동을 다루었으며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전자산업 내 2세 질환 직업병 문제 등 노동으로 인해 사회적 질병을 얻게 된 이야기를 썼던 작가가 이번에는 베테랑을 만났다. 저자는 '베테랑의 몸'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그들을 찾아가서 "자신을 베테랑이라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졌다. 질문을 받은 이들의 대답은 각자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몸은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이다. 이른 아침 작업장, 주방, 목욕탕, 출산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성실은 성실하게 몸에 새겨진다.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실이 자신과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살린다고 믿지만, 몸에 성실히 새겨진 노동의 기록은 대가를 요구한다.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어깨, 목, 허리, 골반으로. 그는 통증으로 인해 관절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통증이 자세를 만들고, 자세는 체형을 만든다. 반복된 행동은 버릇과 습관으로 남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뱃심 든든한 몸통, 짙게 그을린 피부, 딴딴한 장딴지, 표정이 다채로운 얼굴, 짧게 다듬어진 손톱, 갈라진 발바닥, 우렁찬 목청, 청력 낮은 귀는 자신의 것이 된다. 젊은 시절, 아직 노동을 거치지 않았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몸을 안고 살아간다.

프롤로그/ 베테랑의 몸

각 분야의 베테랑을 인터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노동인지 생각해본 다음 저자는 그들에게서 어떤 '가짐'들을 보았다고 한다. "자신만의 원칙이 무엇이건, 모두 견디고 버티고 인내하며 꼴을 갖춘 몸가짐과 마음가짐" 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베테랑의 손과 발을 보다가 그의 손에 쥐어진 것, 그의 발이 딛고 있는 자리가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관계 맺어야 하는 대상과 어떻게 눈을 맞추는지도 보았다고.

그렇게 노동현장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버티고 살아온 그들의 시간을, 저자는 알고 싶어서 인터뷰를 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 오랜 시간 집중해온 분야가 다른 만큼 노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몸과 기억의 기록이 다른 까닭이다. 1부 ‘균형 잡는 몸’에서는 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등 혼자 하는 일에 집중을 하면서도 힘을 주고 풀어내며 일하는 베테랑의 몸에 집중하고 있고, 2부 ‘관계 맺는 몸’에서는 조산사, 안마사, 마필관리사, 세신사처럼 몸담고 있는 노동현장에서 마주하는 대상을 살피는 감각을 살핀다. 그리고 3부 ‘말하는 몸’에서는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전시기획자, 배우, 식자공처럼 표현하는 몸으로 수어·감정·연기·활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듯한 저자의 질문에 베테랑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노동처럼 붙이거나 빼는 것 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지금보다 힘들게 일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과 그 시간을 버티고 난 지금에 대해서 별 거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털어놓고 있지만 노동으로 익숙해진 몸은 말이 들려주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고 지나온 그들도 시대가 변한 지금 옛날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대는 변했고 노동환경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 중 자연주의출산센터의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산사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산모는 환자가 아니라 출산의 주체라는 말. 병원에서 출산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산모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금식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데, 그건 선진국에서는 고위험군 산모에게만 쓰는 방식이라고 했다. 책에 나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성의 몸을 존중하고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조산사 김수진 씨는 경험과 숙련이 쌓이는 만큼 과도한 노동을 하기에 체력이 아슬아슬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균형은 베테랑 뿐 아니라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한 생이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어떠한 시간과 감정, 그리고 노동이 들어가는지 조산사를 통해 엿보았다. 환대와 환희. 이 단어들을 앞세우기 위해 견뎌야 하는 통증과 외로움. 이를 견디게 하는 의존과 믿음. 내가 아무리 출산과 돌봄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이 탄생의 순간에 투여된 것보다 몇 배가 넘는 인내와 노동이 돌보고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안다.

참 쉽게 사라진다. 무수한 생이 단숨에 사라지는 일은 가슴을 부여잡고도 삶을 휘청이게 한다. 그리고 야금야금, 일 하다가 너무 많은 이들이 병들고 목숨을 잃는다. '한 해에 2000명이 일하다 죽는'이라는 문구는, 관용어도 아닌데, 10년이 넘도록 변하질 않는다. 단 한 사람만 죽일 수 없으니, 단 2000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겠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생명과 존중에 대하여' 인터뷰 후기/ 베테랑의 몸

마필관리사에 대한 인터뷰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들어있다. 말을 돌보며 관리하는 마필관리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이 왜 인간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말을 왜 달려야 하는지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왜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를 열게 되었냐는 질문에 마필관리사는 말이 달리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고 내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다.

뒤이어 저자는 천선란의 《천개의 파랑》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마지막 질문을 한다.

"그럼 말은 왜 달려야 하나요?" 마필관리사의 대답은 어떠했을까. 책에 나오지 않지만 몹시 궁금해졌다.

영어를 배울 때 귀가 먼저 뚫려야 하는 것처럼 수어는 눈이 먼저 트여야 한다고 말하는 수어통역사 장진석 씨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학교 1학년 때 '수화 동아리'에 들어간 장진석은 수어가 재미있어서 배웠지만 농인조차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실제 농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잘못 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것은 수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쓰는 청인들의 언어에 단어만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수어의 '콩글리시'였다는. 본격적으로 수어를 배운 후부터 농인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언어를 알게 되었고 수어의 매력이 더 커졌다는 정진석 씨는 농인들은 소리를 모두 눈으로 판별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뿐 아니라 모든 신체, 특히 얼굴 표정이 중요한 언어가 되는 거라고. 또한 수어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맥락을 함께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내가 종종 입밖에 내는 바람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만의 언어를 찾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사람들이 독창적이고 미학적인 글을 쓰거나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코다(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로서의 경험을 담은 저서를 쓴 이길보라 감독은 "언어를 찾는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 몸에 겹겹이 쌓여 있던 행동 양식과 가치 판단을 하나하나 풀어 나를 가두던 틀을 바라보는" 일. 자신만의 언어를 찾자는 말은 사회가 빚은 그릇을 벗어나보자는 의미였다.

'그 편리와 효율은 누가 정하는 걸까' 인터뷰 후기/ 베테랑의 몸

"사람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말에 어쩐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사회적 비극이나 아픈 사건들 이후 다수가 우르르 몰려가서 어디선가 들은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착각하면서 일말의 가책도 없는 표정으로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그것이 오직 진리인 것처럼 외치는 광경에 저자의 이 문장을 풀어놓고 싶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신만의 언어로서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도록. 자유를 외치면서 정작 자유의 의미를 잃어버린 언어에 길들여진 혐오의 덩어리에.

우리는 각자의 노동을 하며 각자의 몸으로 굳어졌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노동의 분야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 뿐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저자의 인터뷰로 인해 내가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했던 분야의 노동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실제 인터뷰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지는 책이라고 가독성이 좋았다. 그리고 저자의 생각이 좀더 깊이 담긴 인터뷰 후기는 생각할 여지를 두고 있어서 더 좋았다.

노동은 노동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 노동이 연결되어 있는 지점과 만났을 때 그 지점이 보일 때는 의미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 같다. 오랜 노동으로 빚어낸 시간과 만날 수 있었던 책!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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