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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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길고 아득한 독서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맛집을 기록한 책은 여럿이지만 식민지 시대 소설을 통해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은 처음 접하는 것 같다. 작가의 이름만 아는 소설들이 많았지만 책에서 등장인물들이 경성 맛집을 찾아갔을 때 내용을 소개하고 줄거리와 결말까지 알려주고 있어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염상섭의 《삼대》는 교과서에도 자주 실려서 읽어본 독자가 많을 거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 《삼대》는 1장 '조선 최초의 서양 음식점' 청목당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19030년대 초 경성을 배경으로 만석꾼 조 의관, 아들 조상훈, 손자 조덕기 등 삼대에 걸친 가족이 겪는 삶의 굴곡과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삼대》에서 청목당은 조상훈의 자식을 낳았지만 외면당해 술집에서 일하게 된 홍경애가 상훈에게 저녁을 사달라고 조르면서 데리고 간 장소이다. 그곳에서 홍경애는 청목당 3층에서 '큐라소'라는 라라하 오렌지를 원료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을 마신다.

이 책에서는 당시 발표되었던 소설에 등장하는 맛집들을 통해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은 맛집들의 과거를 조명하고 있다. 곳곳에 실제 메뉴판과 사진, 신문에 실린 광고 등의 삽화를 보는 재미도 크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더 읽을거리>라는 코너를 두어 맛집을 알리기 위한 본문 내용에 더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경성의 맛집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을 서두에 꺼내고 있다. 그는 방치된 문화 유산 뿐 아닐 전반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근대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음식을 공부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기억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하면서, 음식은 하나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이 가늠되기 이전의 기억이 남아있는 드문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식민지 시대의 경성 맛집을 다루는 것에 대해 오해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사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이지러짐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각 장의 마지막에 실린 <더 읽을거리>와 맛집 소개의 곳곳에 들어간 작가의 역사 인식을 보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책에서 다루는 맛집들이 등장하고 자리를 잡았던 때는 식민지 시대였다. 그런 까닭에 경성의 맛집을 다루는 이 책이 식민지 경험을 수긍하는 것으로 오해도리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사실을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이지러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가 아닐까? 이 책은 경성의 맛집에 드리웠던 식민지의 그늘에 주목하고 이를 밝혀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들어가며/ 경성 맛집 산책

이 책의 1부에서는 본정에 위치했던 식당 네 곳을 소개한다.

조선 최초의 서양요리점 청목당, 가족의 나들이 명소 미쓰코시백화점 식당, 경성 제일의 일본요리옥 화월,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유혹했던 이국적인 과일 디저트 카페 가네보 프루츠팔러. 본정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명동거리를 가리킨다. 식민지 시대에도 화려하게 피어났던 거리에 위치한 맛집들의 메뉴와 가격, 건물과 내부 묘사, 음식들의 맛 묘사와 소설에 등장하는 그곳의 장면들. 무엇보다 그런 맛집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상황까지. 지루할 틈 없이 맛집 산책이 이어진다. 런치가 가장 인기 있었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등장하는 소설은 김말봉의 《찔레꽃》, 장혁주의 《삼곡선》 등이다. 작가는 화려한 미쓰코시 백화점 소개 뒤에 일본인들을 위한 출장소였다는 식민지 현실을 내비치며 역사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려준다.

2부에서는 종로에 위치한 세 곳의 식당을 소개한다. 경성 유일의 정갈한 조선음식점 화신백화점, 김두한이 단골로 다녔으며 지금도 정상 영업을 하고 있는 이문식당, 평양냉면에 필적하는 경성냉면 동양루.

당시 백화점들은 모두 서양 요리만 팔았는데 유일하게 조선인이 경영한 화신백화점에서는 조선음식을 팔았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등장하는 백화점은 온종일 줄을 서서 먹은 '조선 런치'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정상 영업 중인 이문식당이 나오는데, 나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내 비위에는 입구부터 맞지 않아서 설렁탕을 포장해왔지만 한 입도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누린내가 강하게 풍겼다니 하는 기록을 보면 내 비위가 약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린내조차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설렁탕에 이어 또 다른 소울푸드인 냉면은 배달음식으로 유명했다. 경성 곳곳에 식판을 메고 배달을 달리던 자전거들이 많았다고 한다.

3부에서는 장곡천정과 황금정에 위치한 세 곳의 식당을 소개한다. 장곡천정은 지금의 웨스턴조선호텔, 롯데백화점, 더 플라자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지금의 중구 소공로 부근을 가리키는 지명인 장곡천정은 조선 태종이 둘째 딸인 경정공주의 집이 있는 곳을 한자로 표기한 소공동에서 유래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 조선의 2대 총독을 역임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라는 인명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조선호텔의 원래 이름은 '조선처도호텔'로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철도를 이용하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건림한 철도호텔이었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지은 조선호텔에 등장하는 소설은 심훈의 《불사조》이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칭송받는 계훈이 독일 유학 당시 '주리아'라는 독일 여성과 결혼을 한 다음 연주회를 하기 위해 조선에 왔는데, 문제는 계훈은 이미 조선에서 정희와 결혼해 아들까지 두고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리아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계훈은 연주회에서 전처 정희를 보고 주리아를 데리고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간다. 한 달 동안이나 투숙하고 있는데, 호텔 하루 방값이 12원이라고 적혀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만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투숙하고 양식밖에 못 먹는 주리아를 위해 하루 세 끼를 호텔에서 먹어야 했는데 그 가격도 하루에 14원이다. 그럼 하루 방값과 식사값을 합치면 150만원 정도 되는 것!

조선호텔이 철도호텔로 개장되었다는 사실은, 조선호텔 역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건설했던 목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일본이 철도를 건설했던, 특히 부산에서 출발해 경성을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노선의 철도를 사활을 걸고 개척했던 것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조선호텔의 구조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환구단'은 본래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며, 그 북쪽에 위치한 '황궁우'는 신위판을 봉안하는 부속 건물이었다. 환구단의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자 황궁우는 조선호텔을 장식하는 건물로 전락하고 만다. 식민 지배를 위한 철도호텔이 중심에 있고 황궁우가 그것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되는 것, 그것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조선호텔의 빛과 어둠/ 경성 맛집 산책

장곡천정에서 낙랑파라를 빼놓을 수 없다. 낙랑파리는 '목일회'에 속한 구본웅, 길진섭, 긴용준, '구인회'구성원인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중앙에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큰 야자나무 형상과 파초가 있고 당시 유행이던 등나무 탁자와 의자 아이템에 놓여있는 내부를 찍은 사진에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낙랑파리는 응접실이나 거실을 뜻하는 '파라'의 일본식 표기에서 왔다고 한다. 이곳에 매일 왔던 이상은 사람들과 담소를 하다가 자신이 마신 찻값 10전만 내고 일어섰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더치페이. 김소운은 이상의 당시의 관행이나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기 때문으로 보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궁핍에 시달렸던 이상이 예의를 갖추려고 했던 행위가 아닐까 싶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파라에 그린 이상의 낙서나 그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그린 삽화를 보면, 역시 이상은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비참한 식민지 시대에도 번화했던 경성의 거리와 일본이 가져온 서양식 음식들. 가벼운 드라마에서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화려한 모습에 독립운동 한 스푼을 첨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소개된 맛집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해주고 있어서 오랫동안 흔적을 찾아서 기록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지금의 맛집처럼 그때도 유명한 식당에 가기 위해서는 온종일 줄을 섰다고 한다. 그때의 맛집을 가볼 수 없으나, 이렇게 책으로 만나보는 시간여행을 해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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