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읽고 반납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했는데, (돈에 대한 약간의 논의만 읽었는데도) 그렇게 읽기에는 고진 탓에 구매해서 읽기로 결정했다. 원래 초미의 관심은 『돈의 철학』이었지만, 어쩐지 선뜻 시작하기에는 무리인 거 같은 가공할 분량에 우선 차선하는 마음으로 빌린 것이『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였다.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최근 짐멜의 주저인 『돈의 철학』이 발간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홍준기 씨의 지젝 논의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지젝의 중심 기획을 위해 경유하는 많은 사유점들 가운데 하나의 컨텐츠인 '이웃'이라는 개념이 그것인데, 홍준기 씨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는 논문에서 라깡의 '안티고네' 읽기를 통한 지젝의 이웃 차원을 '사드적 채움'으로 지적한다. 그것은 라깡적 안티고네 독해인 "대상을 사물을 (…) 사물의 위엄으로" 끌어 올리는 차원에 반대하는 지점의 것에서, 즉 



  (스스로 라깡주의자로 자처하고 정치신학적 논의에 개입하는) 지젝이 말하는 정신분석적 윤리는 맑스-레닌주의적 혁명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 지젝은 안티고네를 윤리적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안티고네가 자신의 충동과 열정, 즉 실재에 충실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윤리적 행위란 상징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 주체에게 존재하는 빈곳을 '향유로 채운다'는 것, 즉 향유의 획득, 혹은 충동만족이라는 것만을 일반적으로 강조하고, 사물로서의 빈곳이라는 라깡적 의미의 승화 개념을 진지하게 고민하려하지 않는다



 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지젝이 베케트를 차용해서 하는 "안 죽는(undead) 부분 대상의 형태로 고집스레 지속되는 충동의 노래"에서도 읽을 수 있는 맥락이겠다. 

















 여기서 홍준기 씨는 단순히 지젝 비판 논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평적 컨텍스트로 읽는다. 그 일환이 바로 짐멜-라깡이라는 차원이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한 표층으로 지젝의『멈춰라, 생각하라』의 한 단락을 우선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은 '내용 없이 실패한'이라고 언급되는 현대 기획들이다. 이것이 그가 고착한[어떤 의미에서 적응한] 진보와 결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레닌은 이미 국가의 대표성 문제에 시달렸다. 이제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 기반'은 무엇일까? 노동계급이 극소수 집단으로 전락한 마당에 노동계급의 국가를 자처한다면, 대체 누구를 대표한다는 말일까? 국가가 대표할 만한 잠재적 대상 가운데 레닌이 하나 빠트린 것은, 모든 경제 정치적 권력을 지닌 수백만 명의 막강한 기관, 바로 국가(기구) 그 자체였다. 라캉이 "내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다. 폴, 에르네스트, 그리고 나"라고 인용했던 농담처럼.

















 물론 이 글은 이처럼 결말지어지지 않는다. 후주하는 설명이 (,) 덧붙여 있다. 그러나 지젝이 이르는 지점은 (홍준기 씨의 논의를 따르자면) '놀랍게도'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다." (강조는 인용자가 하지 않았음.) 바로 여기서 홍준기 씨가 지젝과 갈라지는 (같은) 지점으로, 그 역시 '셋'과 이웃 사랑에 대한 라캉의 독해를 사유점으로 지젝의 라캉 독해를 해독한다. 「믿음, 감사, (이웃)사랑」



 라깡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것은 여러분이 셋 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요? 그런가요 그렇지 않은가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한다고 말하는 성경처럼 이웃사랑(둘 간의 사랑)은 제3자에 대한 사랑(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한다는 것 … 이웃사랑이 상상적 사랑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 속에서 타자에게 주는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 빈곳으로서의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대상을 사물의 빈곳으로 승격시키는 것이야 말로 사랑의 전제 조건이며, 이러한 윤리적 태도가 다름 아닌 라깡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인 것이다.



 이만으로도 이해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이 국면에 이르러서도 '문제'는 잘 포착되지 않고 허공에 부유하는 느낌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지젝의 바디우 주목과 거기서 얻어지는 짐멜의 논의이다.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의 시작을 바디우의 이러한 진단으로부터 한다. "알랭 바디우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실재(the Real)에 대한 열정'에 있다고 보았다." 이제 여기서 짐멜을 이어가 본다.


 필로소피아라는 활동에 있어 선결적이면서도 굉장히 활동을 억압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경제 생활 세계에서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속박하는 세계이다. 때문에 플라톤 이전부터 있어 온 철학의 '고전 떡밥'이면서도 반가운 주제는 아니었고, 짐멜이 지적하는 '낭만주의'와 플라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생활 방식'(tropos)은 돈과의 관계 방식과 거기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짐멜은 독특하게 (사유하는) 인간에게 원죄적 삶을 제공하는 '돈'이라는 공간성을 전복한다. 짐멜은 말한다.



 설령 우리가 화폐에 의한 거래가 초래하는 분리와 소외에 대해서 한탄한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돈을 지불하고 그에 대한 필연적인 대가로서 일정하고 구체적인 가치를 받음으로써 돈은 동일한 경제권의 구성원들을 매우 강력하게 연결시킨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돈은 직접적으로 소비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소비하고자 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연결시켜준다." 이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매우 광범위하고 공통적인 수준의 이해관계를 창출"했고, "자연 경제 시대, … 낭만주의자들이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던 봉세 봉건 시대 또는 자의적인 결사체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로도 많은 인간들 사이의 연결 관게를 창출한 것", '돈'이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동하고,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노동만이 비로소 개인의 일면적인 생산을 보충하는 광범위한 경제적 단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돈은 특정인에 구속되지 않음을 그 정점으로 한다. 따라서 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 아니라 그들과 맺는 관계가,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고려하지 않고 맺는 그 관계가, 그리고 그들의 익명성과 그들의 개체성에 대한 무관심이, 바로 이 모든 것이 살마들을 상호 소외시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결국 인간의 고유한 자아는 외적인 관계들로부터 물러나서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차원으로 회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짐멜은 현대 문화가 흐르는 두 방향, "수평화, 평등화 그리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까지도 동일한 조건하에 결합시킴으로써 더욱더 광범위한 사회영역을 창출하는 방향이라면, 두 번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을 성취하고 독립성 및 인격 형성의 자율성을 보존하는 방향"이 '화폐 경제'에 의해 유지·가능하다고 말한다. (~18쪽) 유행한 두 CF의 절묘한 앙상블처럼 말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 짜장면 시키신 분!?"


 그러나 짐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돈은 비천하다'고 정식화 한다(22). 돈이란 결국 "단지 최종적인 가치들로 가는 다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그 다리 위에서 살 수 없다고 짐멜은 말한다(24). 짐멜의 강조점은 이것이다. 목적을 가능케 하는 수단 그 자체가 목적 대상으로 절대 환원된다는 것, "단순한 수단과 전제 조건이 심리학적으로는 최종 목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돈이 가능함으로써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기능이 가능함을 절대화 하는 "돈이 우리 시대의 신"이라는 "방정식"이다. (28) 여기서 겪는 결핍은 분명하다. 지젝의 주문은 이제 마치 질문처럼 들리게 된다. "알랭 바디우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실재(the Real)에 대한 열정'에 있다고 보았다."



 나는 여기서 짐멜이 끝으로 "자신이 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신비의 창을 닮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홍준기 씨가 주목하는 '믿음, 감사, (이웃) 사랑'을, 지젝의 존재하고 개입하는 (형제) 국가, 이 둘 모두를 결국에는 매듭지을 수 없다는 내 역량을 분명히 긋고 글을 (열어둔 채로) 맺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겔의 인정투쟁에서 '쇼를 하라'는 현대 사회의 광고에 이르기까지, 시선의 문제를 한 번 짚어 본 것은 국가 권력에 대한 개인의 권리 주장이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냉혹한 시선이 되어버린 황폐한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는 것이 작가의 집필 이유이다. 타인을 '지옥'이라 부른 사르트르의 존재론과 헤겔의 '인정 투쟁'을 거쳐 푸코의 권력 논의를 사유층으로 하여 시선의 관계를 다양하게 살피고 있다. 인상 깊은 내용.


 감독관과 함께 정원을 걷고 있던 이 환자는 갑자기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광포한 발작에 사로잡혀 커다란 돌을 집어 든다. 감독관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그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돌을 던질 테세이다. 그때 감독관이 걸음을 멈추고 환자를 쏘아보며 몇 걸음 앞으로 내디딘 후,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돌을 내려 놓으라고 명령한다. … 환자는 힘없이 손을 아래로 내리고 마침내 돌을 땅 바닥에 떨어뜨린다. (…) 여기서 우리는 물리적 억압과는 다른, 뭔가 새로운 지배 방식이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 어떤 물리력도 아니고 시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찰'국가의 인권침해와 생활세계의 식민화」. 민간 사찰로 한참 정치·사회계가 민감할 때에 나온 국가권력과 감시에 대한 한성훈 교수의 논문이다. 기든스의 근대 '감시'를 특징짓는 두 해석을 경유해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접근한다. 비밀로 감시와 수집된 정보를 (푸코의 논의처럼) 체계화해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공공 영역에 출연하는 개인을 우선 국민이라는 "행정적 통제" 아래로 자리 지움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출현하는) 행위를 직접 감독하는 것을 뜻한다." 논자는 이것을 '국민에 대한 테러'이자 "시민사회와 권력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주권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의도적 행위"로 진단하며 다음과 같은 헌법 조항을 '뜻있음'으로 고찰한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했다. 공무원의 지위를 포괄적으로 정의한 이 조항은 공무원과 국민의 관계를 추상적이지만 매우 의미 있게 설명하고 있다.



 모더니티의 주체성, 자유라는 정체성 속에서 근거하는 인권과 주권이라는 개념에서 지양되는, 그러나 현실에서 실행되는 감시와 감독이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근거한 현대라는 차원의 흥미로운 모습을 읽게 해준다. (폭로된 도청에 대해 미국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상황이 그러하다.)




※논문은 『역사비평』(100호)에 해당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에크는 말년의 저작 『치명적 자만』에서 기존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호 체계'라는 언어관으로 보다 유연하면서 세련된 세계관으로 고전 경제를 새롭게 해명했다. 유동성을 갖춘 가격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경제 세계를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라는 것으로, 이 자연스러운 관계 형성에 대한 이성이라는 작위적 개입은 결국 이성의 실패를 넘어서 (허시먼의 보수 명제처럼) 자연스럽게 맺은 시장 세계까지 황폐화하는 '치명적 자만'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뭔가 진득하게 매달리던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일개적 세계들은 우주라는 차원에서 지구적으로 통합되고, 시공간 그 자체적 (우주 서사) 공간에서 세계가 위상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사사로운 통박은 시간 낭비이고,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현명한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세계의 자명한 진리이다. 자명한 진리는 거짓 세계에서나 반구(反求)하듯, 진실 세계에서는 별이 빛나듯 진리 자체로 빛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진실로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지나온 '더럽혀진 언어' 시대를 이렇게 정리한다. 이 시대의 진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오직 개인의 소유와 가족을 지지한 종교만이 살아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라질 전 대통령인 룰라의 '에너지'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글이다. 논문의 마지막에 소개되는 룰라의 연설, "부자는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서민은 국가와 사회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저는 부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는 그런 브라질 말입니다"가 논문 전체를 핵심적으로 집약해 전달해 준다. 논의 맥락에 따르자면, 그것은 가난으로 무너지는 브라질이라는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을 룰라는 정치 신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신념을 실천하는 룰라의 에너지로 논자는 '룰라의 실천 그 자체'에 주목한다. 



 브라질사회가 다인종 혼혈사회라는 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시우비우 호메루는 "브라질 국민은 피에서 혼혈이 아니라 해도 생각하는 면에서 혼혈이다"라고 했다. 사실 브라질은 인종 백화점이라 불릴 만큼 많은 인종과 민족이 모여 형성된 혼혈 국가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구성원 각자의 생각과 문화도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그들과의 대화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 룰라의 타협 정신도 전반적인 브라질 국민의 사고 패턴과 같다. 단지 그에게는 남에게서 찾기 힘든 뛰어난 소통력과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은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간결한 표현에 근거한다.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표현을 쓰기에 이따금 비속해 보이지만 설득력이 강하며, 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친근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카리스마를 감싸고 있다. (…) 룰라의 형 쉬쿠는 브라질공산당의 골수 당원이었지만, 룰라는 형이 공산주의를 얘기할 때마다 공산주의 이념 서적을 보느니 차라리 신문이나 축구 중계를 보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의 사유점은 실천 상황에 있었고, 그것은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뜻있게 다가온다. 물론 이런 점에서 '개혁하는 동시에 달라지지 않는', 가령 비자금과 관련한 룰라의 애매한 입장정리와 부정부패라는 행정상 관행에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정치적으로 유능력'했다는 문제 역시 언급되고 있다.


















 논자는 『대통령의 길, 룰라』를 '번역'했다. 다소 애매한 위치이긴 하지만 그를 '소개'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역자라는 자리한 의미가 무언지는 충분히 전달된다. 




※논문은 『역사비평』(101호)에 해당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