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선을 앞두고서 으레 이루어지는 여론조사는 과거 민주화 운동이 믿어왔던 '역사'라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기에 유일하게 담보할 수 있었던 역사, 바로 그 역사가 오늘날 그들을 허위의식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백날 떠든들 박정희는 변함없이 1등"이었다. 마치 볼모였던 역사가 해방한 듯, 역사는 이렇게 말해오는 것이다. "사랑은 자유다... 단, 착각은 금물."


 여론조사에서 과거의 대통령 박정희는 여전히 단골메뉴다. 여론조사는 분명 현재의 여론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미래의 여론을 구성한다. 과거의 대통령을 묻는 것은 곧 미래의 대통령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지 않을까?

 이에 대해 논문은 상상-거세된 근대 소망과 거기서 꿈 작업화된 박정희에 대한 투자(投者)적 동일시로 읽고 있다.




※논문은 《당대비평(28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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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인로 씨의 논문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와 이병태 씨의 논문 「물신의 시간, 그 의미와 중단에 관하여」를 겹쳐 읽었다. 윤인로 씨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 씨를 읽음으로써 이 '여기-세계-의미'를 '다시 여는' 의미로서의 '지금'을 이야기한다. (지젝이 흔히 쓰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을 느낌'처럼, 그의 '재각인're-make이라는 표현 역시 여기에 쓰지 않을 수 없도록 유혹을 느끼게 한다.) [책에서는 '재-론'이라고 읽는다. 198쪽]


 '지금'이란, 위기와 위험의 순간들이 뭉쳐져 일거에 시스템이 해소되고 척결되는 시간이 아니라, 살얼음판 같은 긴장 속에서 위기의 순간들을 거듭 용접시키고 각인시켜 나가는 시간이다.


 그는 김진숙 씨의 "역사는 그렇게 질척거리지만 끊임없이 각성하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간다"는 것을 "최고도로 유지되는 진정한 역사의 질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윤인로 씨와 마찬가지로 벤야민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읽고 있는 지젝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행동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멈춰라...). 그렇다면 여기서 여기-세계가 뜻하는 의미는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병태 씨는 우리가 현재하는 공간의 질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시대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일정하게 존재하지만, 그러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실천은 부재하거나 불안하다. … 모든 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생존의 요구, 나아가 욕망, 불안, 의지, 정서 등은 모두 물신을 지속시키는 바탕이며 체제 재생산의 매커니즘 그 자체 … '일상'은 가장 명시적인 물신의 소재로 보인다.

  

 즉 이것은 "부조화의 문제는 현재의 사회적 상태가 존속되는 것이 부당하며 일정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속한 일상의 관성적 힘이 더 큰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젝의 발언(약간을 덧붙여 인용했다. 해당 문단은 []로 처리) 


 오늘날의 탈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증발해버리는 것은 이데올로기들의 만화경에 의해 폐색된 현실이 아니라, 구석력 있는 규범이라는 외관, 그런 외관이 지닌 [수행하는]  '수행적' 힘, 요컨대 외관 그 자체인 것이다. '현실주의'야말로 -사태를 '현실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이데올로기이다. (377쪽)


을 조금은 뒤틀음으로써 달리 정식화할 수도 있다. "현실주의야말로 사태를 현실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최고의 이데올로기이다." 내게 있어 사이버라는 공간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제가 지은 죄를 보십시오.. 그렇기에 얼마나 당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지를 보란 말입니다... 그것은 발신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회신이다.. 이 끈질기게 나아갈 수 없도록 추문(推問)하는 점액질의 점성. "즉 '반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자'라고 비난당한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말이다. (원문은 "즉 '반민주주의자', '전체주의자'라고 비난당한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이다. 14쪽) "지젝에게서 얻은 교훈"(《조선일보》)이라는 기사 제목과 내용의 앙상블은 그래서 뭔가 (기자의 말처럼) "인간적"인 모종의 위안을 얻게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를 만난 곳은 일본 도쿄의 페닌슐라 호텔. 방 하나에 50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호텔이다. 공식 인터뷰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한담하다 웃으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혹시 '캐비어 좌파(실천 없이 말만 앞세우는 우리네 강남 좌파)'는 아닌가. 이렇게 비싼 호텔에 묵으며 양극화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이야기하다니. 그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예상 외의 '해명'을 했다. 민망한지 한참을 설명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나도 '캐비어 좌파'를 혐오한다. 혼자 여행할 때는 당연히 자그마한 방에 묵는다. 이번에는 13세 아들에게 방학 선물로 한 여행이기 때문에 좀 무리를 했다.


 자본주의 시대에 불가능한 것이 유일하게 자본주의라고 밝혀주는 이 역설성에 무언가 있진 않을까. 나는 이 정리되지 못한 물음과 여전히 열린 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갑갑함이라는 유명(이름 있음)한 자산들을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은 대타자에 신음하며 탄생하는 주체의 비밀을 알고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예수의 전언에 얽힌 비밀이 보너스로 주어진다. "도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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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머니 심부름으로 은행에 볼일을 보러 나선 길. 그 '볼일'이라고 하는 건 '어른' 세계로 편입한 내게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이쪽 세계로 발을 붙이고 느꼈던 삶의 뿌리를 진동케 하는 경험, 그것은 아버지 통장의 잔고를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었다. 풍요롭진 않지만 그래도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산다고 여겼던 우리 가계가 썩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가끔 서로 술잔을 기울일 때면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하던 것의 무게가 이전과는 남다르게 느껴졌었다. 아버지가 '취미'로 '로또'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수년째다. 주가가 올랐다며 기분 좋게 통닭 한 마리를 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내가 그날도 그런 모종의 기분으로 은행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도로를 건너기 위해 올라간 육교 위에 평소와는 다르게 낯선 무언가 서 있었다. 그의 몸뚱어리에는 띠가 둘려 있었고, 그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아래로 지나가는 차들의 머리 위에 그는 홀몸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언제든 투신을 염두에 두는 그) 위태위태한 '피켓 외침'은 아래 지나는 차들에게 전혀 무심한 일이었다. 산업 도로인 터라 정체되지 않는 이상 갈 길이 바쁜 차들은 멈출 줄 모르고 쌩쌩 지나쳤고, 도로 위를 지나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잠시 시선을 던지고 빠르게 회수할 수 있는 '세련된' 그림이었다. 그는 세련된 슈트를 입고 조용히 피켓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현대적으로 멋진 매너남이었다.. 동년배였다면 좋은 친구라 생각해도 좋을 만큼. 얼마 지나 론스타 '먹튀' 논란과 함께 멋진 신사 역시도 조용히 사라졌다. 불 켜진 창들의 수수한 방관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고, 찌꺼기처럼 남은 질문을 해볼 수도 있었다.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육교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2. 딱히 비전도 꿈도 없는 내게 대학 입시는 생소한 무엇이었지만, 거기엔 먼가 엄청난 대류라는 것이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가 미래, 꿈이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거기엔 경영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느샌가 나도 그런 물살을 따라 입시 원서를 넣게 되었고, 내겐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한참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세계금융위기'였다. 나의 관심은 당연히 거기로 가 있었다. 나는 금방 내공 100짜리 지식으로 무장할 수 있었고, 쉬는 시간이면 나도 친구들과 천문학적인 이야기와 '모럴해저드'라는 무려 고급단어를! 별 어려움 없이 떠들 수 있었다. 여기서 간과된 것이 있다면, 실제로 면접관이 그런 걸 물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앞으로 사라질 직업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누구입니까?"


 아차! 경영학이었다. 나는 급하게 척척박사님을 찾았지만, 별 재미없는 대답에 면접관들의 내게서 흥미를 잃고 다음 면접생을 찾았다. 나만이 그 장구한 역사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나는 나를 질책했다. 나는 나를 질색했다... 생각해 보면 옳았다. 금융'위기'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더 이상 돈이 돈을 낳는 신기의 파생이 중단됨을 뜻하였나? 아니다. 위기의 본질도, 구제의 본질도 모두 '보너스'였다. 공적 자금에 대한 사적 운영을 '터무니없다'며 '책임비용'을 이야기한 흑형의 말은 반만 맞았다. 이게 옳게 자리를 찾으려면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공적 자금을) 운영하는 사적 윤리에 대해 공적 책임비용이라는 책임을 묻는 것은 '터무니없다.'  아아... "그래서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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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촘스키는 '매스 담론'의 기만과 술책들에 대해 분석하면서 '할 수 있는'(책의 마지막장) 탈출을 모색한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언어 구조로 기만하는 미디어 담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제가 주목하는 극적인 예로, '이익'(profit)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자리'(job)만이 존재하지요. 클린턴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대가로 400억 달러의 계약서를 엑슨에게 선물보따리로 주었을 때, 미국 언론은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환호했습니다. … 과거의 포퓰리즘은 대기업과 금권정치의 반의어였지만, 새로운 포퓰리즘은 대기업인 동시에 금권정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별로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놀랍게도 그와는 정반대라고 여겨지는 인물, 바로 하이에크에게서 촘스키적인 '정제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엔 자유라는 명맥에서 이어오는 신고전 경제의 '정수'가 있다. 그는 말한다. (번역본을 취지에 맞춰 고침. 인용의 순서 역시 취지에 따름.)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생명을 주었다. 자본주의는 고용의 가능성을 창출함으로써 아버지 세대로부터 자신과 자식의 안녕을 위한 마땅한 수단과 땅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다른 누군가 그 결핍에 호응해 개입할 수 있게 하는, 즉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창조하였다. 자본주의는 수백만 사람의 탄생 가능성을 창출하며, 또한 살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정치가가 권력을 위해 사람들이 착취당한다고 느끼는 감정을 이용한다고 할지라도 [별다른 강제 없이도] 그들은 그곳이 도시로부터 외진 판자촌이라도 그곳에 살면서 -몇몇이 착취라고 험악하게 부르는- 도시의 문명을 선택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손에 의해 창조된 프롤레타리아가, 그 생명 역시 자본주의로부터 수혈받는다고 하였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옳았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새로운 고용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고용될 수 없는 잉여인구에 지나지 않는다. 자, 군의관인 당신 앞에 세 사람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당신이 여기서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는 '포기'해야 한다는 가정 앞에 놓여 있다면, '셋'보다 우선하는 '하나'를 당신은 마땅히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하나'가 유능한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에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줄 가치적 존재이며, 우리의 관심은 '현재 생명'의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미래 생명'의 가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란 (합리적) '계산'인 것이다.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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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권위주의 체제로 굳히게 되는 과정에 있어서 박헌영의 숙청은 그 사건 자체였다. 그리고 거기, 박헌영의 숙청에서 등장하는 다소 역사적으로는 생소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녀가 바로 '현앨리스'이다. 그녀는 박헌영이 '미제의 앞잡이'라는 죄명에 구속되게 하는 근거로써 제시된 인물로,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의 아이덴티티를 조명하고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해방 이후 북한이라는 공간과 진보의 좌표라고 하는 문제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해외를 오가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속박될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여성을 (단순히) '어머니'에 우선하는 기존의 가부장질서를 거부하고 '다른 조국'을 꿈꾸었던 현앨리스는, 광복과 해방 정국이라는 시대적 격동과 그 질곡에 고스란히 위치 지어졌다. 광복을 위해 미군에 복무했지만, 해방을 위해 미군 업무에 지장을 주었던 현앨리스의 아이러니는 그러한 것이었다.



 민간통신검열단으로 통칭되는 CCIG-K에 대해 주한미24군단 정보참모부장이었던 니스트 대령이 작성한 'CCIG-K의 목적'이라는 비망록 … 에 따르면 … 현앨리스는 1946년 2월 CCIG-K의 활동을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한 "악마"였으며, 그 방법은 북한 출신 인사들을 대거 CCIG-K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현앨리스는 신분상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광복과 해방은 동의어가 아니었고 해방 역시 '생각한 광복'의 모습은 아니었다. 남한에는 자유가 있었지만 진보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북한은 좌경만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삶은 조국에 있었으므로...


 그녀의 삶은 여기서 끝난다. 그녀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은 결국 그녀를 '미제 스파이'로 몰아 박헌영 숙청에 단초를 마련한다. 그녀는 문서상 섬광처럼 등장했다 사라졌을 뿐, 그 이후 지면 밖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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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1-2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관심 있는 분야입니다.아직 정병준 씨 위의 글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정병준 씨는 박헌영 재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던가요?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간주합니까?

독안에서별을헤다 2013-11-21 16:19   좋아요 0 | URL
정병준 씨는 여기에 대해서 "박헌영 재판기록에서 현앨리스의 이름을 발견한 이래 가졌던 상상과 의문에 대한 오랜 추적의 결과이다. (...) 과연 그녀는 미국의 공작원이고 박헌영은 미국 공작원에 포섭된 '간첩'이었는지 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글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황'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고 바라보자면, 박헌영이 추궁받게 되는 현앨리스와의 관계에서 우선 되어야하는 현앨리스 혐의 자체가 픽션적이기 때문에 거기서 성립되는 '스파이'라는 공식 자체가 허구적인 성격으로 논문은 진단하고 있습니다. 다만 질문하신 '완전한 날조'라는 의미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기에 제가 대답할 수는 없는 거 같습니다. 도움되셨기를 바라며.

노이에자이트 2013-11-2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 박헌영 이승엽 재판기록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현 엘리스가 나오는 역사소설로 강준식<적과 동지>가 있습니다.몇 년 전 <혈농어수>라는 제목으로 재간했더군요.혹시 관심 있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독안에서별을헤다 2013-11-23 09: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