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로 씨의 논문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와 이병태 씨의 논문 「물신의 시간, 그 의미와 중단에 관하여」를 겹쳐 읽었다. 윤인로 씨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 씨를 읽음으로써 이 '여기-세계-의미'를 '다시 여는' 의미로서의 '지금'을 이야기한다. (지젝이 흔히 쓰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을 느낌'처럼, 그의 '재각인're-make이라는 표현 역시 여기에 쓰지 않을 수 없도록 유혹을 느끼게 한다.) [책에서는 '재-론'이라고 읽는다. 198쪽]
'지금'이란, 위기와 위험의 순간들이 뭉쳐져 일거에 시스템이 해소되고 척결되는 시간이 아니라, 살얼음판 같은 긴장 속에서 위기의 순간들을 거듭 용접시키고 각인시켜 나가는 시간이다.
그는 김진숙 씨의 "역사는 그렇게 질척거리지만 끊임없이 각성하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간다"는 것을 "최고도로 유지되는 진정한 역사의 질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윤인로 씨와 마찬가지로 벤야민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읽고 있는 지젝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행동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멈춰라...』). 그렇다면 여기서 여기-세계가 뜻하는 의미는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병태 씨는 우리가 현재하는 공간의 질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시대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일정하게 존재하지만, 그러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실천은 부재하거나 불안하다. … 모든 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생존의 요구, 나아가 욕망, 불안, 의지, 정서 등은 모두 물신을 지속시키는 바탕이며 체제 재생산의 매커니즘 그 자체 … '일상'은 가장 명시적인 물신의 소재로 보인다.
즉 이것은 "부조화의 문제는 현재의 사회적 상태가 존속되는 것이 부당하며 일정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속한 일상의 관성적 힘이 더 큰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젝의 발언(약간을 덧붙여 인용했다. 해당 문단은 []로 처리)
오늘날의 탈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증발해버리는 것은 이데올로기들의 만화경에 의해 폐색된 현실이 아니라, 구석력 있는 규범이라는 외관, 그런 외관이 지닌 [수행하는] '수행적' 힘, 요컨대 외관 그 자체인 것이다. '현실주의'야말로 -사태를 '현실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이데올로기이다. (377쪽)
을 조금은 뒤틀음으로써 달리 정식화할 수도 있다. "현실주의야말로 사태를 현실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최고의 이데올로기이다." 내게 있어 사이버라는 공간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제가 지은 죄를 보십시오.. 그렇기에 얼마나 당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지를 보란 말입니다... 그것은 발신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회신이다.. 이 끈질기게 나아갈 수 없도록 추문(推問)하는 점액질의 점성. "즉 '반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자'라고 비난당한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말이다. (원문은 "즉 '반민주주의자', '전체주의자'라고 비난당한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이다. 14쪽) "지젝에게서 얻은 교훈"(《조선일보》)이라는 기사 제목과 내용의 앙상블은 그래서 뭔가 (기자의 말처럼) "인간적"인 모종의 위안을 얻게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를 만난 곳은 일본 도쿄의 페닌슐라 호텔. 방 하나에 50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호텔이다. 공식 인터뷰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한담하다 웃으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혹시 '캐비어 좌파(실천 없이 말만 앞세우는 우리네 강남 좌파)'는 아닌가. 이렇게 비싼 호텔에 묵으며 양극화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이야기하다니. 그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예상 외의 '해명'을 했다. 민망한지 한참을 설명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나도 '캐비어 좌파'를 혐오한다. 혼자 여행할 때는 당연히 자그마한 방에 묵는다. 이번에는 13세 아들에게 방학 선물로 한 여행이기 때문에 좀 무리를 했다.
자본주의 시대에 불가능한 것이 유일하게 자본주의라고 밝혀주는 이 역설성에 무언가 있진 않을까. 나는 이 정리되지 못한 물음과 여전히 열린 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갑갑함이라는 유명(이름 있음)한 자산들을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은 대타자에 신음하며 탄생하는 주체의 비밀을 알고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예수의 전언에 얽힌 비밀이 보너스로 주어진다. "도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