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는 '매스 담론'의 기만과 술책들에 대해 분석하면서 '할 수 있는'(책의 마지막장) 탈출을 모색한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언어 구조로 기만하는 미디어 담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제가 주목하는 극적인 예로, '이익'(profit)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자리'(job)만이 존재하지요. 클린턴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대가로 400억 달러의 계약서를 엑슨에게 선물보따리로 주었을 때, 미국 언론은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환호했습니다. … 과거의 포퓰리즘은 대기업과 금권정치의 반의어였지만, 새로운 포퓰리즘은 대기업인 동시에 금권정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별로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놀랍게도 그와는 정반대라고 여겨지는 인물, 바로 하이에크에게서 촘스키적인 '정제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엔 자유라는 명맥에서 이어오는 신고전 경제의 '정수'가 있다. 그는 말한다. (번역본을 취지에 맞춰 고침. 인용의 순서 역시 취지에 따름.)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생명을 주었다. 자본주의는 고용의 가능성을 창출함으로써 아버지 세대로부터 자신과 자식의 안녕을 위한 마땅한 수단과 땅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다른 누군가 그 결핍에 호응해 개입할 수 있게 하는, 즉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창조하였다. 자본주의는 수백만 사람의 탄생 가능성을 창출하며, 또한 살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정치가가 권력을 위해 사람들이 착취당한다고 느끼는 감정을 이용한다고 할지라도 [별다른 강제 없이도] 그들은 그곳이 도시로부터 외진 판자촌이라도 그곳에 살면서 -몇몇이 착취라고 험악하게 부르는- 도시의 문명을 선택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손에 의해 창조된 프롤레타리아가, 그 생명 역시 자본주의로부터 수혈받는다고 하였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옳았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새로운 고용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고용될 수 없는 잉여인구에 지나지 않는다. 자, 군의관인 당신 앞에 세 사람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당신이 여기서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는 '포기'해야 한다는 가정 앞에 놓여 있다면, '셋'보다 우선하는 '하나'를 당신은 마땅히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하나'가 유능한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에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줄 가치적 존재이며, 우리의 관심은 '현재 생명'의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미래 생명'의 가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란 (합리적) '계산'인 것이다. (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