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니 심부름으로 은행에 볼일을 보러 나선 길. 그 '볼일'이라고 하는 건 '어른' 세계로 편입한 내게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이쪽 세계로 발을 붙이고 느꼈던 삶의 뿌리를 진동케 하는 경험, 그것은 아버지 통장의 잔고를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었다. 풍요롭진 않지만 그래도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산다고 여겼던 우리 가계가 썩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가끔 서로 술잔을 기울일 때면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하던 것의 무게가 이전과는 남다르게 느껴졌었다. 아버지가 '취미'로 '로또'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수년째다. 주가가 올랐다며 기분 좋게 통닭 한 마리를 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내가 그날도 그런 모종의 기분으로 은행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도로를 건너기 위해 올라간 육교 위에 평소와는 다르게 낯선 무언가 서 있었다. 그의 몸뚱어리에는 띠가 둘려 있었고, 그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아래로 지나가는 차들의 머리 위에 그는 홀몸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언제든 투신을 염두에 두는 그) 위태위태한 '피켓 외침'은 아래 지나는 차들에게 전혀 무심한 일이었다. 산업 도로인 터라 정체되지 않는 이상 갈 길이 바쁜 차들은 멈출 줄 모르고 쌩쌩 지나쳤고, 도로 위를 지나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잠시 시선을 던지고 빠르게 회수할 수 있는 '세련된' 그림이었다. 그는 세련된 슈트를 입고 조용히 피켓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현대적으로 멋진 매너남이었다.. 동년배였다면 좋은 친구라 생각해도 좋을 만큼. 얼마 지나 론스타 '먹튀' 논란과 함께 멋진 신사 역시도 조용히 사라졌다. 불 켜진 창들의 수수한 방관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고, 찌꺼기처럼 남은 질문을 해볼 수도 있었다.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육교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2. 딱히 비전도 꿈도 없는 내게 대학 입시는 생소한 무엇이었지만, 거기엔 먼가 엄청난 대류라는 것이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가 미래, 꿈이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거기엔 경영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느샌가 나도 그런 물살을 따라 입시 원서를 넣게 되었고, 내겐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한참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세계금융위기'였다. 나의 관심은 당연히 거기로 가 있었다. 나는 금방 내공 100짜리 지식으로 무장할 수 있었고, 쉬는 시간이면 나도 친구들과 천문학적인 이야기와 '모럴해저드'라는 무려 고급단어를! 별 어려움 없이 떠들 수 있었다. 여기서 간과된 것이 있다면, 실제로 면접관이 그런 걸 물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앞으로 사라질 직업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누구입니까?"
아차! 경영학이었다. 나는 급하게 척척박사님을 찾았지만, 별 재미없는 대답에 면접관들의 내게서 흥미를 잃고 다음 면접생을 찾았다. 나만이 그 장구한 역사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나는 나를 질책했다. 나는 나를 질색했다... 생각해 보면 옳았다. 금융'위기'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더 이상 돈이 돈을 낳는 신기의 파생이 중단됨을 뜻하였나? 아니다. 위기의 본질도, 구제의 본질도 모두 '보너스'였다. 공적 자금에 대한 사적 운영을 '터무니없다'며 '책임비용'을 이야기한 흑형의 말은 반만 맞았다. 이게 옳게 자리를 찾으려면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공적 자금을) 운영하는 사적 윤리에 대해 공적 책임비용이라는 책임을 묻는 것은 '터무니없다.' 아아... "그래서 지구는 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