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수 아닌 연수를 받고 있던 아침, 별 대수롭지 않은 뉴스 하나가 첫 화면에서 시선을 끌었다. 대형 여객선 하나가 침몰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사고의 경위도, 인명에 대한 이야기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윤곽이 없는, 금방이면 지나갈, 조만간 약속된 안전 불감증에 대해, 특유의 한국이라는 집단 정서에 대해 떠들어댈 하나의 가십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나는 그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을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환. 그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2. 어렴풋하지만 잊히지 않고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보도를 막 벗어난 도롯가엔 차바퀴에 짓눌려 으깨어진 개의 사체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터져 널브러진 장기도, 헐떡이며 미동하는 숨조차도 느낄 수 없이 말라 비틀어져 박제된 과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몸소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음을. 살아 있음을. 완벽한 무방비로 노출된 그것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3. 실종. 이것이 희망과 거짓을 오가는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집계에 신경질적인 저널리즘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들의 죽음은 숭고가 아니다. 그들이 있고자 했던 오늘과 여기를 생각할수록 그것은 더욱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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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 할인행사
데이비드 안스퍼 감독, 숀 오스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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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영화는 전형적인 스포츠 스크린을 따른다. 안 된다는 걸 거듭 강조하는 부권의 명령과 물론 그런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그런데 그 진부함을 이 영화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퀀스로 풀어나간다. 영화에서의 주인공 루디는 어려서부터 노틀담 대학에서의 미식축구를 응시한다. 그는 그것을 운명으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고지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당연하듯 아버지나 주위의 만류가 오히려 적실성을 가진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열정과 실력의 상관성에서 우위는 언제나 실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보란듯이 결별하고 전복되리란 것을.


 여기에 영화가 자리한 재미난 장면이 있다. 루디는 특별한 계기(계시에 가까운)로 노틀담을 향한다. 거기서 만난 신부는 모자란 루디의 자격 요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대신으로 쥬니어 칼리지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면 입학할 수 있을 거란 불투명한 희망을 말한다. 우직한 루디는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하지만 루디는 계속해서 고배를 마신다. 그는 자신의 선택과 지나간 시간들을 원망한다. 돌아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포기함으로써 그려진 동일한 시간의 또 다른 나의 모습, 가정적이고 성공한.. 되풀이되는 실패와는 완연히 대조되지만, 원래의 내 것이었던 것들의 현재형을 지금 바로의 동일한 시간으로 보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흔들리는 자신을 루디는 고백한다. 여기서 신부는 말한다. 자신이 신부 생활을 통해 얻은 진리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신은 있다는 것과 하나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서 적절한 응답성을 갖춘 답변을 한다. 채울 수 없는 그 '견딜 수 없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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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지난 유우머. 무인도에 표류한 세 사람. 이들에게 통조림 하나가 파도에 밀려온다. 자신을 물리학자로 소개한 사람은 돌로 내려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자신을 화학자로 소개한 사람은 "열로 가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물었다. 그러자 이 둘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은 저명한 경제학자로 자신은 둘과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자, 우리는 우선 여기 따개가 있다고 가정하에..."

 여기서의 질의는 그것이다. 심지어 무인도에 표류한 것도, 그리고 표류한 그들(또는 우리)에게 통조림이 떠밀려 온 것도 아닌, 평상시에조차 의문으로 점철되고 투성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더욱이 현대라는 사조?는 그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하는 것. 심지어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미술가의 안목을 지시하던 맹위조차 거리감을 잃은 예술 폼로부터 우리는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해 '대체 뭐하는 짓거리지?', 떠밀려온 그 엄청난 막연함에 충분히 대답 가능한 가치와 정연한 답을 가지지 못한 수수께끼의 작품들은 차라리 경솔하게 헛소리라고. 여기서의 질문은 그곳이다.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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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SE (2disc) - [할인행사]
밀로스 포먼 감독, 루이즈 플레쳐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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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선차적인 질문은 두드러기와 같은 반응을 잡아내기도 한다. 영화는 순전히 느끼는 것으로, 이해는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감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경유할 수밖에 없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질문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왜 하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란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뻐꾸기 둥지'란 어디인가가? 하는 본원적인 질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물론 영화에서 둥지란 영화가 끝없이 공전하는 궤도, 그곳은 병동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뻐꾸기의 자리란 바로 병동인 셈인데, 탁란, 그러니까 뻐꾸기는 자신의 둥지를 짓지 않고 다른 종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낳기 때문에 둥지란 뻐꾸기 둥지이며 동시에 아닌 곳이 된다. 최근의 연구는 그 둥지 주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식 뻐꾸기로 하여금 어미 뻐꾸기를 인식하게, 그러니까 새끼 뻐꾸기를 위탁받은 식모는 어디까지나 식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인 것이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그것이다.

 병동으로 이감된 맥머피와 그 시작부터 사사건건 신경전이 벌어지는 랫체드와의 관계는 상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녀는 잠재울 수 없을 만큼의 폭력을 충동질하게끔 부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로하여금 (몇몇 누군가 이 표현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정복욕을 일깨운다. 음악을 줄이러 들어선 맥머피에게 그녀는 계속해서 (차분하게) 환자와 간호사는 별개, 그러니까 다른 존재이며, '넘어선 안 되는' 투명한 유리창과 같은 것임을 끝임없이 강조한다. 그녀는 창에 손자국조차 남기지 말 것을 지시한다. 물론 그럴수록 충만해지는 질감은 그녀의 자리다. 우리는 숱한 맥머피의 '정욕'에 대한 제스쳐 덕분에 우리의 그런 환상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일깨워준다. 랫체드는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섹쉬(sex-y)하다. 그녀는 우리를 부른다. fuck.. me... 그렇지만 영화는 (결정적으로!) 그것을 안배하지 않는다. 

 이제 영화가 빠르게 전개되고 거의 마지막에 도달한다. 그녀 앞에 빌리가 선다. 그녀는 빌리의 행동에 대해 어머니 친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어머니로 자처한다. 빌리에게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부끄럽지도 않니?" 우리는 여기서 한참 전에 대답되지 않은 빌리의 대답(좋아하는 여자가 있었고... 청혼을 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대체 그 다음은!)이 가졌던 -영영 대답되지 않을- 불안을 포착하게 된다. 물론 그 상한은 어머니 자신이다. 그것이 대답되는 순간, 빌리는 자멸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정확히 모든 것을 포괄하는 힘이 엉뚱한 곳으로부터 분출한다. 바로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인 맥머피다. 병동을 "둥지이며 동시에 아닌 곳"으로 물들이는 파괴적인 힘, 그러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V) 속에서도 응답되지 않는 절대적인 지점,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 영화는 징그러운 장면을 삽입한다. 랫체드의 목이 졸리던 그 텅 빈 공간이 어두워지고 드러난 지점, 그곳에 한 개비의 담배가, 한 개비의 담배가, 한 개비의 담배가 그리고 나누어지는 카드들...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맥머피가 지닌 힘을 설정하는 장면이다. 여유가 흐르며 충분히 담배가 공급되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병동으로 들어선 그에게 렛체드는 불러세운다(V). 시펠트는 대답한다. "yes, ma'am" 그녀는 온화한 미소로 그것에 응답하며 그다 다시 이곳에 자리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떠든다. 맥머피가 어쩌고.. 그의 실패에 대해... '그'란 엉터리라고. 사랑은 엉터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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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왜 나를 괴롭히는가


 이 영화는 정말 무서운 영화다. 재미의 여부로 치면 똑같은 잠수함을 무대로 한 <크림슨 타이드>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만, 공포의 정도에 있어선 여타의 모든 영화 가운데에서도 U-571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 작전을 수행하다 -속된 말로- 잣된 독일 잠수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곧장 다른 장면으로 등가 교환되는데, 한편의 미국에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작전, 해당 잠수정의 암호 체계를 탈취하려는 작전이 수립된다. 이런 임무를 안고 떠나는 장면으로 클럽의 중단, 여기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족과의 유대, 앞으로 공포가 될 재료들이 짤막하게나마 잠수정을 채워간다.


 영화는 아주 빠른 전개로 작전을 성공한다. 그러나 영화 상영의 여분의 공백이 무언가 불안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그 사건은 -일어날 일이었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기에- 갑자기 모든 상황을 공황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미지'의 상황에서조차 함장은 명령한다. 물론 함장이라고 미지의 영역에서 다를 것이 없다. 그는 함장인 척할 뿐, 그 역시 미제에 불과하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그 알 수 없는 기입되지 않은 미래에 자신을 기재함으로써 불안을 괴롭힌다. 잠수정으로 다가오는 생존자들.. 함장은 사수에게 사격을 명련한다. 그는 끝없이 질문한다. '그는 왜 나를 괴롭히는가..' 이 장면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 질문의 반대이면서 응답성은 '나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를 괴롭게 하는가')


 물론 이 장면에서 함장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답은 화면을 뒤덮고 등장하는 비행기 하나가 그 실마리를 약간 제공할 뿐이다.



 그는 왜 나를 괴롭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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