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우리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넌센스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아주 초반,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빠삐용에게 내려지는 선고다. "프랑스를 잊어라!" 그러니까 당신이 프랑스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일은 프랑스를 잊는 것이다.


 우리 안의 타자는 어떠한 모습인가? 그들은 정치적인? 사회운동적인? 호소만을 할 뿐, 그것은 철저히 구상될 수 없는 비역사성에 갇혀있다. 민주화? 그 동떨어진 모습은 분명히 '그러니까 당신이 한국을 위해 해주어야 하는 일은 한국을 잊음'의 차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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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위험한 철학?



 지젝이 차지하는 위치란 어디인가? 참 애매한 질문이다. 세류적인 인기인가? 근래 국내에서 주춤한 그의 저작물들은 학제적 성숙인가? 아니면 철지난 '한물'에 대한 증언인가? 그것은 곧잘 지젝의 유효성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지젝이 다루는 범주는 실로 다양하다. 그렇지만 그가 초점이나 중심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다양한 변주들을 하지만 중심 주제를 벗어나진 않는다. 그는 강조되고 열거된 팩트가 아니라 유머(humor)를 이야기한다. 그는 단순히 보이는 충동적인 문제를 보여주기보다 그동안 볼 수 없던, 보이지 않던 것, 즉 언제나 '질문'의 포지션을 취한다. 충동과 자발(이 자발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입돼 있는 프로세스를 따르는데)의 도덕이 아니라 윤리적 거리를 그는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테제는 단연 자유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여기서도 역시 유머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농담을 예고하고 어디서부터인지가 농담인지 정확히 제시한다)



 이 충고가 그저 값싼 냉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는 레닌에 대한 유명한 소비에트식 농담을 연상시킨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자, 레는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레닌의 이 말은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학교 벽마다 나붙었다. 지금부터 농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은 아내가 있는 것과 애인이 있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예상할 수 있듯 사적인 일에서는 꽤 보수적이었던 마르크스는 '아내!'라고 대답했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성격의 엥겔스는 애인을 골랐다. 레닌의 대답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난 둘 다 갖고 싶소!" 어째서? 레닌의 엄숙한 혁명가적 이미지 뒤편에 퇴폐적인 쾌락주의자의 면모가 숨어 있던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아내에게는 애인에게 간다고 하고, 애인한테는 아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당신은 뭘 하려 그러오?" "나는 조용한 곳에 가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거지!" -『폭력..』(32)



 주어진 시간 속에서 충분히 적절한 모습을 갖춘 자유의 형식이 아니라 불확실한 유형으로 물어지는 질문, 바로 자유의 공간에 대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빗겨갈 수 없는 필연의 덫이 기다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재되지 않는 그 불확실한 유형성은 더없이 안락하고 편안한 여분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집착과 고착, 냉소에 대한 도착적인 냉소. 몇몇 거리에 대한 방점을 찍어 환기를 시킨 것으로 그만이다. 지젝의 표현, 테러와 응징의 갈래에서 둘 다 나쁜 절대 관점을 취하는 것, 바로 거기가 아니라 둘 모두에게서 창출할 수 있는 이익의 관점인 것이다. 윤리적 관성이 아니라 도덕적 체면, 사회적 구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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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은 사이드



 미국의 이라크와의 전쟁?은 과연 승리였다. -무엇이? 미국을 향한 적개의 감정은 배신이라는 윤리적 테제, 그러니까 "미국인 아닌 미국"(배반자라 일컬어지는) 보복의 대상으로 배치되었다. 즉 미국인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들은 '미국'이 소화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인들은 "미국인"이 아니다. 그들에게 응징이라는 미명하에 가해지는 가공할 수준의 폭력은, '미국인'의 수고를 피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동등해질 수 없는 차이, 바로 '미국'인과 '미국인'의 격차가 좁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양단으로부터 섞일 수 없는 배출구 같은 뭉개진 삶들. 그들은 선택받은 적도, 버림받은 적도 없기에 그 중층에서 갈로에 서게 된다. 미국이라는 존재 하지 않는 유령(이라크에서 일어나는 테러로 인한 민간 피해를 일일이 집계하는 것조차 넌더리가 나며[왜냐하면 그건 당연한 일상이다], 그것을 '역사적'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그건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건 그곳에서의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건 토막 뉴스다.])은 '미국'인이라는 배신의 적별(敵別)을 떠돌게 하고, 그것은 어김없이 근본의 더 없는 사실성을 부여해 주었다. 적을 밝혀주는 가장 '원시적인 열정', 바로 그 영혼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빈 라덴의 '드높았던 열정'을 높이 샀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필요 없으리라.) "정의가 실현됐다."



 물론 이 문제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집요한 "무고"에 대한 언급과 그를 둘러싼 생산의 양식들 속에서 언제나 실은 득을 압도하고 득은 언제나 실에 연관돼 있으며 그것은 다시 무고를 양산한다. 망자는 내맡겨져 있기에 '무고한 희생'을 언급하는 빈 라덴이나 무고함을 선점하려는 당파적인 이해에 귀속된다. 9.11이 있고 3년 뒤에야 했던 빈 라덴의 시인은 무엇인가? 그 뒤에서도 보인 행태들은 애매한 둘 사이의 시위를 보여준다. 아니라고도 했다가 시인하고, 또 달리 아니라고도 했다가 다시 시인하고.. 그렇게 희생을 대리했다. 9.11은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전적으로 아닌 (순수한? 근본적인?.. 이를 근본적으로 순수한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에 대한 미국인을 향한 공격이었고, 그 근본적인 종족성은 더 없는 완벽한 유형성을 가져다 주었다. (희생자는 미국인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되었으며, 그것은 우리와 그들의 이해를 뜻한다.) 포로에 대한 인도적인 반응은 그래도 미국의 정신과 부합했다. (약 270명의 여학생 납치도 불사하는 나이지리아 반군을 보라.) 포로가 겪었을 '수치심'을 언급하며 인권을 말하고, 이 전쟁의 의미를 일깨우는 정합성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9.11의 무고한 희생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언제나 물결치며 거세게 요동치는...




 그렇다. 진실의 무게는 불변한다. 그리고 진실은 기만당한다. 

 그렇다. 진실은 기만당한다. 그러나 진실의 무게는 불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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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미래의 ㅇㅇㅇ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거의 ㅇㅇ학자가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ㅇㅇㅇ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163) 우리는, 우리조차 믿지 않는 것을 그저 지시할 뿐이고, 나는, 나 역시 믿지 않는 것을 넌지시 할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의 과학성이라 할 수 있으며, 차라리 철학의 비철학성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만일 열핵반응가정을 제어할 수 있다면 1분당 150갤론씩의 물로부터 미국 전역에서 생산하는 양의 전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거의 물리학자가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너지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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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자! 인간은 스스로에게 최상으로 여겨지는 것에 맞추어 자신을 형성한다."(22)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것. 이 수수께끼 같은 전언이 바로 역사성이며, 즉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즉 인간 스스로 최상에 여기지는 형성, 바로 "인간은 인간성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23) 그러나 숙명적으로 "(...) 인간은 서글픈 운명을 지녔다. 우리는 노력해야 하지만, 노력의 결실을 보지 못한 채, 혹은 역사의 전 과정에서 인간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 채 죽어야만 한다." (17) 바로 역사의 질문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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