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위험한 철학?
지젝이 차지하는 위치란 어디인가? 참 애매한 질문이다. 세류적인 인기인가? 근래 국내에서 주춤한 그의 저작물들은 학제적 성숙인가? 아니면 철지난 '한물'에 대한 증언인가? 그것은 곧잘 지젝의 유효성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지젝이 다루는 범주는 실로 다양하다. 그렇지만 그가 초점이나 중심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다양한 변주들을 하지만 중심 주제를 벗어나진 않는다. 그는 강조되고 열거된 팩트가 아니라 유머(humor)를 이야기한다. 그는 단순히 보이는 충동적인 문제를 보여주기보다 그동안 볼 수 없던, 보이지 않던 것, 즉 언제나 '질문'의 포지션을 취한다. 충동과 자발(이 자발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입돼 있는 프로세스를 따르는데)의 도덕이 아니라 윤리적 거리를 그는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테제는 단연 자유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여기서도 역시 유머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농담을 예고하고 어디서부터인지가 농담인지 정확히 제시한다)
이 충고가 그저 값싼 냉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는 레닌에 대한 유명한 소비에트식 농담을 연상시킨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자, 레는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레닌의 이 말은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학교 벽마다 나붙었다. 지금부터 농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은 아내가 있는 것과 애인이 있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예상할 수 있듯 사적인 일에서는 꽤 보수적이었던 마르크스는 '아내!'라고 대답했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성격의 엥겔스는 애인을 골랐다. 레닌의 대답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난 둘 다 갖고 싶소!" 어째서? 레닌의 엄숙한 혁명가적 이미지 뒤편에 퇴폐적인 쾌락주의자의 면모가 숨어 있던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아내에게는 애인에게 간다고 하고, 애인한테는 아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당신은 뭘 하려 그러오?" "나는 조용한 곳에 가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거지!" -『폭력..』(32)
주어진 시간 속에서 충분히 적절한 모습을 갖춘 자유의 형식이 아니라 불확실한 유형으로 물어지는 질문, 바로 자유의 공간에 대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빗겨갈 수 없는 필연의 덫이 기다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재되지 않는 그 불확실한 유형성은 더없이 안락하고 편안한 여분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집착과 고착, 냉소에 대한 도착적인 냉소. 몇몇 거리에 대한 방점을 찍어 환기를 시킨 것으로 그만이다. 지젝의 표현, 테러와 응징의 갈래에서 둘 다 나쁜 절대 관점을 취하는 것, 바로 거기가 아니라 둘 모두에게서 창출할 수 있는 이익의 관점인 것이다. 윤리적 관성이 아니라 도덕적 체면, 사회적 구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