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수 아닌 연수를 받고 있던 아침, 별 대수롭지 않은 뉴스 하나가 첫 화면에서 시선을 끌었다. 대형 여객선 하나가 침몰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사고의 경위도, 인명에 대한 이야기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윤곽이 없는, 금방이면 지나갈, 조만간 약속된 안전 불감증에 대해, 특유의 한국이라는 집단 정서에 대해 떠들어댈 하나의 가십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나는 그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을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환. 그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2. 어렴풋하지만 잊히지 않고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보도를 막 벗어난 도롯가엔 차바퀴에 짓눌려 으깨어진 개의 사체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터져 널브러진 장기도, 헐떡이며 미동하는 숨조차도 느낄 수 없이 말라 비틀어져 박제된 과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몸소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음을. 살아 있음을. 완벽한 무방비로 노출된 그것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3. 실종. 이것이 희망과 거짓을 오가는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집계에 신경질적인 저널리즘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들의 죽음은 숭고가 아니다. 그들이 있고자 했던 오늘과 여기를 생각할수록 그것은 더욱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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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지난 유우머. 무인도에 표류한 세 사람. 이들에게 통조림 하나가 파도에 밀려온다. 자신을 물리학자로 소개한 사람은 돌로 내려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자신을 화학자로 소개한 사람은 "열로 가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물었다. 그러자 이 둘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은 저명한 경제학자로 자신은 둘과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자, 우리는 우선 여기 따개가 있다고 가정하에..."

 여기서의 질의는 그것이다. 심지어 무인도에 표류한 것도, 그리고 표류한 그들(또는 우리)에게 통조림이 떠밀려 온 것도 아닌, 평상시에조차 의문으로 점철되고 투성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더욱이 현대라는 사조?는 그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하는 것. 심지어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미술가의 안목을 지시하던 맹위조차 거리감을 잃은 예술 폼로부터 우리는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해 '대체 뭐하는 짓거리지?', 떠밀려온 그 엄청난 막연함에 충분히 대답 가능한 가치와 정연한 답을 가지지 못한 수수께끼의 작품들은 차라리 경솔하게 헛소리라고. 여기서의 질문은 그곳이다.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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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왜 나를 괴롭히는가


 이 영화는 정말 무서운 영화다. 재미의 여부로 치면 똑같은 잠수함을 무대로 한 <크림슨 타이드>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만, 공포의 정도에 있어선 여타의 모든 영화 가운데에서도 U-571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 작전을 수행하다 -속된 말로- 잣된 독일 잠수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곧장 다른 장면으로 등가 교환되는데, 한편의 미국에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작전, 해당 잠수정의 암호 체계를 탈취하려는 작전이 수립된다. 이런 임무를 안고 떠나는 장면으로 클럽의 중단, 여기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족과의 유대, 앞으로 공포가 될 재료들이 짤막하게나마 잠수정을 채워간다.


 영화는 아주 빠른 전개로 작전을 성공한다. 그러나 영화 상영의 여분의 공백이 무언가 불안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그 사건은 -일어날 일이었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기에- 갑자기 모든 상황을 공황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미지'의 상황에서조차 함장은 명령한다. 물론 함장이라고 미지의 영역에서 다를 것이 없다. 그는 함장인 척할 뿐, 그 역시 미제에 불과하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그 알 수 없는 기입되지 않은 미래에 자신을 기재함으로써 불안을 괴롭힌다. 잠수정으로 다가오는 생존자들.. 함장은 사수에게 사격을 명련한다. 그는 끝없이 질문한다. '그는 왜 나를 괴롭히는가..' 이 장면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 질문의 반대이면서 응답성은 '나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를 괴롭게 하는가')


 물론 이 장면에서 함장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답은 화면을 뒤덮고 등장하는 비행기 하나가 그 실마리를 약간 제공할 뿐이다.



 그는 왜 나를 괴롭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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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봉착점에 대한 동향이 예수로 향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읽음'에 대한 것은 [신을 옹호하다] 약간 정도인데, 대단히 익숙한 논의이기 때문에 흥미롭지는 않다. (예수전도 읽었으나 넘긴다.) '현대적'이라는 흔한 표현으로 입장 정리를 하자면 예수는 '누구인가?'하는 불가능성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예수는 어떻게 살았고, 그게 어떻고... 신앙이... 진리가... 포스터모던이...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무게는 깃털에도 미치지 못한다. 책은 알량하게 넘겨지고, 사물은 여전히 유일하게 부동한다. 허무에 대한 사랑을 비껴가는, 그러니까 무지에 대한 열정을 쏟을 이유는 없지만, 없는 감흥을 애써 보태어 가며 위선으로 진리를 외도하는 일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디치킨스... 이 공박의 유희는 굉장하지만 -디치킨스라니!! 아마 현장에 있었다면 구르면서까지 웃었으리라- 정작 논의가 진행될수록 사위는 어두워지고 생명은 시들해 진다.) 참을 수 없는 것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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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인. 그 언명은 마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고통의 고지로 들린다. 그러니까 이 말을 정식화하면 이렇다. 타인의 고통. 그러니까 타인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나누었던 전쟁에 관한 편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문은 이미 넘어갔다.) 그 편지는 (당시에 휘기한) 전쟁 현장을 담고 있는 사진 하나를 지시하며 남/녀라는 차원을 '우리'로 환원하는 무언가를 -그 편지, 그 사진, 그녀, 그가- 이야기한다. 전쟁. 나를 수 없는 전쟁이 건너야 했던 상상력의 심연을, 사진은 전쟁이라는 현장으로 나른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그 사진이, 그 편지가, 그녀가, 그가 '우리'라고 불렀던- 우리에게 궁색하고 진부하지만 늘 논란의 대상이자 주목받는 사물이다.



 "우리의 상황은 (울프와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카메라를 매개로 전쟁을 알게 되는 오늘날의 상황에는 (고통과 폐허를 담은) 지독히 친숙하고, 지독히 유명한 이미지를 피해갈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 1936~37년 겨울 때까지만 해도 잔혹한 사진들은 별로 없었다. 울프가 『3기니』에서 ('우리'에 대해) 언급한 사진들에 담긴 전쟁의 공포는 그때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듯싶다."(45-46)



 그것은 마치 쾌락을 암시하는 듯 행동한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65) "이런 이미지를 쳐다볼 수 (없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 (그러니까) 움찔거린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쾌락이다."(67) 우리는 사안을 보지 않는다. 관능적인 에로티시즘(eroticism)의 사건을 본다. "특히 연출됐다는 사실에 우리가 적잖이 당황하게 되는 사진들은 개인이 겪는 가장 최고의 순간, 특히 사랑과 죽음을 기록한 듯이 보이는 사진들이다."(85) 그것들은 적잖은 희열을 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그 사진이, 그 편지가, 그녀가, 그가 '우리'라고 불렀던- 우리에게는 궁색하고 진부하지만 늘 논란의 대상이자 주목받는 사물성을 생산한다. "이미지의 도저히 참기 어려운 리얼리즘을 비난하면서도, 몇 마디 말과 함께 이 사진들이 자아내는 멜로드라마에 저항하지 못한다."(99) 전쟁. 그것은 리얼리즘의 피사체가 섬광처럼 영원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대였다.



 (2) 타인. 그것은 사진이 자리할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사진은 타인의 자리인 것이다.



 주검들뿐만 아니라, 적나라한 얼굴을 공개하는 것도 늘 엄격하게 금지되어 왔다. 가드너와 오셜리번이 찍은 사진들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땅에 등을 댄 채 누워 있는 연방군과 남부동맹군 병사들의 얼굴이 너무나도 뚜렷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래로, [미국의] 주요 출판물들은 수많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전장에 쓰러져 있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사실상 (공공연하게) 두 번 다시 보여준 적이 없었다(처음에는 군부가 검열을 통해서 이런 일을 막았다). (pp.108-109)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그런 품위 차리기"들, "사상자들은 늘 숙여져 있거나 뭔가에 덮여 있지 않으면, 얼굴이 안 보이는 쪽으로 돌려져 있"는 한껏 격실을 차린 그런 사진들. 그것은 사진의 공간이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를 표징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109)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러니까 반드시 치유해야하지만)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110)



 한편으로는 "…(이)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리는 막연함을 '포착'한다. (122) "사진은 사진을 흉내내기 마련"이며, 그 "친숙함은 현재, 그리고 얼마 안 된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을 형성해 놓는다."(129,130) 피사체의 향연. 걸레 조각처럼 난자당한 채 매달려서도 여전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그 끈질기게 역동하는 생명력의 향연. 생에 대한 희열. "…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관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149-150) 타인은 고통이다. 고통은 유일하게 우리를 매개하는 관점이며, 따라서 타인은 고통이다. 일치를 볼 수 없는 고통이라는 입장을 유일하게 참조할 수 있는 '나'가 아닌 영역, 그곳이 타인이며, 타인은 고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166) 타인은 고통을 제공한다.


 그렇게 모두는 타인이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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