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엔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지난 30일에 있은, 세간에서 '윤 일병'으로 일컬어지는 사건에 대한 재판은 위의 말을 몸소 느끼게 한다. 사건의 명명 역시 피해자로써 적들의 식별을 혼란스럽게 한다. 피해 사실은 유형으로 다가오지만 가해 사실은 무엇도 지목할 수 없는, 오직 무엇으로도 지목할 수 없음만을 지시하는 무형성처럼 숱한 가명과 익명, 알력의 이름으로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번 재판의 결정에 대해 역시 유감이라는 마음은 같지만 판결에 맞춰진 이슈로 인해 잊히는 군의 일상성, 알면서도 어쩌 못하는 그 되풀이들, 무기명의 가해와 그것들이 빚어내는 숱한 결정들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이번도 군은 심판의 주체였지 심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군대 가서 참으면 윤 일병 되는 거고, 못 참으면 임 병장이 되는 현실"의 선택지는 가해라는 무리 속에 자신을 기입하도록 안내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전제 자체를 조금 더 큰 차원에 그리는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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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우리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넌센스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아주 초반,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빠삐용에게 내려지는 선고다. "프랑스를 잊어라!" 그러니까 당신이 프랑스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일은 프랑스를 잊는 것이다.


 우리 안의 타자는 어떠한 모습인가? 그들은 정치적인? 사회운동적인? 호소만을 할 뿐, 그것은 철저히 구상될 수 없는 비역사성에 갇혀있다. 민주화? 그 동떨어진 모습은 분명히 '그러니까 당신이 한국을 위해 해주어야 하는 일은 한국을 잊음'의 차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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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이 영화의 흥미로운 장면. 처음 가족에게 배달된 로봇은 간략한 소개와 함께 '로봇 3원칙'에 대해 언급한다. 이에 좋다고 답하자 로봇은 '물러나야 잘 보인다'며 권고하곤 지금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화려함으로 무장한 입체 그래픽스를 선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상영되고 있는 로봇 3원칙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로봇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 그러니까 순전히 로봇 외의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그 수수께끼의 전언은 순전히 로봇의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와의 계약인가? 누구와의 위반을 암시하는가? 이런 질문이 남는다.


 영화는 한참을 흘러, 로봇은 자신을 인간으로 오인하고 그것을 주장한다. 이 흥미로운 풍경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포착된다. '그들'로 지칭되는 것들.; '우리'로서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그들은 우리인가? 그들인가? 아니, 우리가 대체 뭔가? 또한 그들은? 우리의 지시가 구분하는 그들을 낳고, 그들이 하는 구분이 우리를 구성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아닌 것인가? 우리는 그들이 아닌 것인가? 물론 영화는 그런 둘의 함정을 비껴가는 그 나름의 모범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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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짐멜의- 이 한 마디로 축약이 가능하다. "대도시에 작용하는 힘들은 전체 역사적 삶의 뿌리와 정점에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하나의 세포 같은 덧없는 존재로서 그러한 삶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 데에 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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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노. 우리는 이 상황을 (정확히 말해) 즐긴다. 편의점 노예는 문제의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싸움과 분쟁을 싫어하며, 순전히 잉여적이므로. 우리의 미덕은 웃음이다. 그 어떤 제동도 없는 끝없는 동력. 그 무한성을 따라서. 필요한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돌림병처럼 약속된 언어를 듣는다. "꼭 네가 아니어도 여긴.." 물론 필요로 하지 않음의 필요를 정점으로 돌아가는 생태계의 뻔함과 모순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도' ("꼭 네가 아니어도 여긴 누군가에 의해서 채워질 자리이기에 당신이 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한 잉여의 자리를 찾는다. 당신의 알바를 즐겨라! -현대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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