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의 3총사"로 소개되는 사이드, 스피박, 호미 바바를 경유해 (제목에서의) 탈식민주의와 포스트탈식민주의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논문이다. 그 재료가 되는 사이드, 스피박, 바바에 대한 비평 작업이 이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원자료에 대한 지각 없이 비평을 인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성급한 거 같아서 거리를 두고 탈식민주의 3총사의 내적 측면에 집중했다.
우선 논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주체는 사이드이다.
논자에 따르면 사이드는 푸코의 과업을 경유한다. "권력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편재적'(푸코에게서 권력이 수직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중심 없는 밑으로부터 도처의 다양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관리 혹은 지배 시스템을 구성하고, 이 시스템을 통해 주체를 훈육하고 개조하며 통제함으로써 주체가 권력의 대상으로 해당 사회 체제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구조적인 힘"에 주목한다. 이엔 앙이 「모호성의 함정」에서 인용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논의를 차용하자면, '중국'이라는 자극이 있기 전에 (이미 일상적으로 불리는) '중국인'이라는 자명성-자각이 '크게' 각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앤더슨은 시니컬하게 말한다. "일부 동남아 중국인들은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17세기부터 유럽인들이 계속해 온 일이 무엇이었는지, 즉 자신들은 결코 중국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네덜란드 식민지배들은 "스스로 '중국인'임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중국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며, 혹시 비토착언어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간에 소통되지 않는 본토의 언어를 쓰는 중국인들"에 대해 '중국인'을 위한 별도의 법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중국인을 법적 지위에서 계속 분리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별도의 의복, 두발, 여행 제한 등을 의무화해 갔다. (『흔적』 Vol. 2)
"지배하고 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로 동양의 동양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시선에 의해 분리되고 고정되는, 그래서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일람표가 작성"되고 그러한 "합리적인 알람표에 은거하여 동양에 대한 일종의 원형감시시설 혹은 원형감옥이 마련된다." 이것은 "푸코의 말처럼 원형감옥 안에서 감시자인 식민 지배자는 유리한 조망권(특권과 힘)을 갖는다." 달리 말해서 지배하는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둘의 만남은 하나의 질서로 소화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스피박이다.
식민과 탈이라는 문제 모두에서 소외된 '묵살의 여정'을 추적한다. 길지만 가장 핵심적인 단락이기에 전부를 인용한다.
인도의 순장습관인 '사티'의 희생자인 인도 과부여성은 스피박이 말하는 하위주체의 한 예이다. 사티는 토착 엘리트(왕족)에 속하는 과부가 힌두교의 관습에 따라 죽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 쌓아올린 장작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는 잔인한 의식이다. 1929년 영국은 반여성적·야만적 악습으로부터 인도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순장관습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인도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티의 잔인함을 이유로 이를 폐지하려 했던 영국과 다르게, 토착 민족주의자들은 여자들이 실제로 죽고 싶어 한다는 말로 이를 고집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사티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민족문화를 수호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다.
세 번째로는 바바(와 파농)이다.
우선 출발점은 파농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으면서 프랑스가 자신의 모국임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던 파농, "그래서 2차 대전 당시 모국 프랑스 군에 입대하여 나치즘과 싸워 무공훈장까지" 받은 파농, 그런 파농이었지만 끝끝내는 프랑스의 외질, '흑인성'(Blackness)에 거주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흑인이라는 주체 의식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족 구조 내에서는 정상적인 성장을 겪은 흑인 아이가 식민지 사회에서 백인과의 접촉을 통해 식민주의적 트라우마, 즉 인간들이 처한 문화적·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심리와 무의식을 설명하기에 유럽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조를 파악하는 일 자체가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외상을 파고든다.
파농은 흑인이 영원한 타자로 고착화되는 과정을 라캉의 '거울 단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 식민지 현실에서 흑인은 백인과의 '모방'관계 속에서 흑인으로 된다는 것이다. 백인은 흑인에게 상상적인 거울이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오인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그들과 같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반대로 자신들의 동족들에게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논문에서의) 바바는 그런 파농을 인정하면서도 거부한다. 하얀 가면, 검은 피부. 여기서 "결코 선험적이거나 완성된 산물이 아니며, 항상 '총체성'의 이미지를 향한 문제적인 접근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바에게 있어 '모방'은 "식민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식민과 피식민의 차별성과 종속을 지워버리고 와해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차별당하는 자의 시선이 권력의 주체에게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지배의 전력을 역전시키는 전략의 한 형태"인 것이다.
검둥이가 추워서 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백인은 검둥이의 분노를 상상한다. 이는 백인의 불안감, 불안에 대한 편집증의 증거인데, 바바는 백인의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을 저항의 지점으로 파악한다.
이런 꿈을 작업해주는 것으로부터 근본 꿈을 역전이 하는 것이다. (내가 캐셔로 있을 때 찾아온 외국인[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외국인은 흔히 노동자로 분류되는 그런 이들이다]이 무언가를 내게 분주히 물었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외국인이 답답했는지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여기서 나는 그런다고 얼마나 사태가 진전되겠냐고 반문했지만- 뭔가를 쓰더니 내게 건넸다. 문자그대로의? "갈비")
가령 영어 텍스트를 인도나 우리가 발음하거나 전달할 때 그 텍스트에 대한 왜곡된 전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일종의 제국 텍스트를 교란시키는, (즉 지배담론의 한 축인 자유와 저항의 담론까지 배우게 되는) 모방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논자의 저작물은 아니지만, 비슷한 구성의 논의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논문은 《현대사상》(2호)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