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의 3총사"로 소개되는 사이드, 스피박, 호미 바바를 경유해 (제목에서의) 탈식민주의와 포스트탈식민주의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논문이다. 그 재료가 되는 사이드, 스피박, 바바에 대한 비평 작업이 이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원자료에 대한 지각 없이 비평을 인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성급한 거 같아서 거리를 두고 탈식민주의 3총사의 내적 측면에 집중했다.


 우선 논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주체는 사이드이다. 















 논자에 따르면 사이드는 푸코의 과업을 경유한다. "권력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편재적'(푸코에게서 권력이 수직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중심 없는 밑으로부터 도처의 다양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관리 혹은 지배 시스템을 구성하고, 이 시스템을 통해 주체를 훈육하고 개조하며 통제함으로써 주체가 권력의 대상으로 해당 사회 체제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구조적인 힘"에 주목한다. 이엔 앙이 모호성의 함정」에서 인용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논의를 차용하자면, '중국'이라는 자극이 있기 전에 (이미 일상적으로 불리는) '중국인'이라는 자명성-자각이 '크게' 각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앤더슨은 시니컬하게 말한다. "일부 동남아 중국인들은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17세기부터 유럽인들이 계속해 온 일이 무엇이었는지, 즉 자신들은 결코 중국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네덜란드 식민지배들은 "스스로 '중국인'임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중국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며, 혹시 비토착언어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간에 소통되지 않는 본토의 언어를 쓰는 중국인들"에 대해 '중국인'을 위한 별도의 법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중국인을 법적 지위에서 계속 분리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별도의 의복, 두발, 여행 제한 등을 의무화해 갔다. (『흔적』 Vol. 2)



 "지배하고 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로 동양의 동양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시선에 의해 분리되고 고정되는, 그래서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일람표가 작성"되고 그러한 "합리적인 알람표에 은거하여 동양에 대한 일종의 원형감시시설 혹은 원형감옥이 마련된다." 이것은 "푸코의 말처럼 원형감옥 안에서 감시자인 식민 지배자는 유리한 조망권(특권과 힘)을 갖는다." 달리 말해서 지배하는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둘의 만남은 하나의 질서로 소화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스피박이다.
















 식민과 탈이라는 문제 모두에서 소외된 '묵살의 여정'을 추적한다. 길지만 가장 핵심적인 단락이기에 전부를 인용한다.



 인도의 순장습관인 '사티'의 희생자인 인도 과부여성은 스피박이 말하는 하위주체의 한 예이다. 사티는 토착 엘리트(왕족)에 속하는 과부가 힌두교의 관습에 따라 죽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 쌓아올린 장작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는 잔인한 의식이다. 1929년 영국은 반여성적·야만적 악습으로부터 인도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순장관습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인도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티의 잔인함을 이유로 이를 폐지하려 했던 영국과 다르게, 토착 민족주의자들은 여자들이 실제로 죽고 싶어 한다는 말로 이를 고집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사티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민족문화를 수호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다.




 세 번째로는 바바(와 파농)이다.

















 우선 출발점은 파농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으면서 프랑스가 자신의 모국임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던 파농, "그래서 2차 대전 당시 모국 프랑스 군에 입대하여 나치즘과 싸워 무공훈장까지" 받은 파농, 그런 파농이었지만 끝끝내는 프랑스의 외질, '흑인성'(Blackness)에 거주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흑인이라는 주체 의식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족 구조 내에서는 정상적인 성장을 겪은 흑인 아이가 식민지 사회에서 백인과의 접촉을 통해 식민주의적 트라우마, 즉 인간들이 처한 문화적·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심리와 무의식을 설명하기에 유럽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조를 파악하는 일 자체가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외상을 파고든다.



 파농은 흑인이 영원한 타자로 고착화되는 과정을 라캉의 '거울 단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 식민지 현실에서 흑인은 백인과의 '모방'관계 속에서 흑인으로 된다는 것이다. 백인은 흑인에게 상상적인 거울이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오인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그들과 같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반대로 자신들의 동족들에게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논문에서의) 바바는 그런 파농을 인정하면서도 거부한다. 하얀 가면, 검은 피부. 여기서 "결코 선험적이거나 완성된 산물이 아니며, 항상 '총체성'의 이미지를 향한 문제적인 접근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바에게 있어  '모방'은 "식민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식민과 피식민의 차별성과 종속을 지워버리고 와해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차별당하는 자의 시선이 권력의 주체에게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지배의 전력을 역전시키는 전략의 한 형태"인 것이다.



 검둥이가 추워서 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백인은 검둥이의 분노를 상상한다. 이는 백인의 불안감, 불안에 대한 편집증의 증거인데, 바바는 백인의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을 저항의 지점으로 파악한다.



 이런 꿈을 작업해주는 것으로부터 근본 꿈을 역전이 하는 것이다. (내가 캐셔로 있을 때 찾아온 외국인[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외국인은 흔히 노동자로 분류되는 그런 이들이다]이 무언가를 내게 분주히 물었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외국인이 답답했는지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여기서 나는 그런다고 얼마나 사태가 진전되겠냐고 반문했지만- 뭔가를 쓰더니 내게 건넸다. 문자그대로의? "갈비")


가령 영어 텍스트를 인도나 우리가 발음하거나 전달할 때 그 텍스트에 대한 왜곡된 전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일종의 제국 텍스트를 교란시키는, (즉 지배담론의 한 축인 자유와 저항의 담론까지 배우게 되는) 모방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논자의 저작물은 아니지만, 비슷한 구성의 논의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논문은 《현대사상》(2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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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주권과 피주권, 즉 쥐는 고양이의 부재 여부와 상관없이도 늘 "고양이의 폭력 아래"에 노출되고 고정돼 있다는 점에서 '고양이 쥐'에게서 찾아지는 '와'의 "실체, 좀더 단순히 말하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권력 근거를 찾는 개념들을 비판면서(45-46), "모호한 영향력과 복잡한 상호작용이 넘쳐나는 시대"에 "권력을 다시 상기할 필연성을 제기", "권력의 쇠퇴로부터 초래될 문제들을 우리가 겪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표지). 이를 위해 저자는 에고(ego)와 타자(alter)의 매개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외적 자극에 자립적으로 응답하는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유기적 존재의 특징"으로, "생명 없는 사물은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18-19). 여기서 저자는 구태여 하지를 소거하고서 '응답'에 한해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지'를 하나의 자체로 부각시킨다. 생명 없는 사물은 (에고의 지시로부터) 작동한다. 그것은 '응'(ja)이 없는 오직 '답'인 것이다. (공장에서 통용되는 은어로 이야기하자면) 버튼맨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답이 관활하는 운동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기획은 이렇게 변주된다. "생각한다. 내가 거기 있다.") 따라서 저자는 타자가 의지로 에고에 응답하는 것에서 권력을 파악할 것을 말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스스로 권력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고, 권력자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처럼, 심지어 미리 알아서 따르려고 하는 것, 이것은 더욱 강력한 권력의 지표이다. (16-17)



 권력을 수행하는 차원은 곧 응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니요'라고 하는 것보다 권력자에 공감하는 '네'(ja)가 더 강한 권력에 대한 응답, … "내가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내가 할 것이다"라는 말에는 더 강한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17). 가령 "하기 싫지 않지?"라는 질문은 이렇게 서술된다. "네가 하기 싫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질문은 스스로 답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타자의 "네"는 에고의 반복이다. 이것은 운동이다. 그것은 실천이 아니다.


 따라서 논자는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자는 … 타자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1) 타자로부터 에고적 의지가 내뿜어질 수 있도록, "… 권력 존재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의지를 본다. 타자에게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권력 감정의 핵심이다."(91) 니체에게서 찾아지는 '낯선 질료에 자기 상(像)'을 찍는 것은,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로서의 권력에 다름 아니다.(23) 좀 더 세밀화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23-24) 권력(macht)은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힘 있음'(machen)의 가능이다.


 

 타자의 "네"는 회피하고자 하는 대안을 곁눈질하지 않고서 생겨난 긍정, 에고의 결정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다. 일말의 "어쩔 수 없지, 뭐"도 포함하지 않는, 에고에 대한 타자의 전폭적인 "네"에서 에고의 권력은 정점에 달하는 것이다.(30) … 해고와 같은 부정적 제재 조치로 위협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려는 상급자의 시도는 그의 권력을 증가시키기지 못한다.(32)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무기력하고 쾌할하지 않은) '네'에서 "운명에 대한 사랑"은 저주의 확인이다. 논자는 적극적인 '응!'(ja)에서 찾아지는 넘치는 힘과 뿜어져 나오는 환희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74-75) 규율권력은 부채를 골자로 한다. 타자에게 죄를 이식하며 죄의식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반성(reflexion)이 아니라 반응(reflexe)을 통해 작동한다."(69) 그는 말한다. "권력은 부재를 통해 빛을 발한다."(83)



 이 책은 권력을 '까다롭게' 다룬다. 몇몇 독자는 벌써 이 표현으로부터 어떤 낌새를 느꼈듯, 헤겔이라는 카테고리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그렇다. 저자는 푸코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전체를 포괄하는 생산적 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권력을 억압 기능을 수행하는 부정적 심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 권력이 '배제하고' '억압하고' '억누르고' '검열하고' '추상화하며' '감추고' '은폐한다'고 권력 작용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니체적으로 말해 '표명하는'p.55)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오히려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실재를 생산해낸다."(61, 60) "이쯤 되면 헤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싱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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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에서의 맑스가 이야기하는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를 창출하는 국가 폭력 상황과 노동의 이중화라는 그 의미에서 논란이 되는 민영화를 읽으면 어떨까? 논자는 '마녀사냥'을 통해 국가 폭력 상황에 노출되고, 그러면서 마녀를 사냥하는(국무를 수행하는) '국민'이라는 주체적 경험을 논의하는 페데리치를 주목한다. 그는 페데리치가 유럽 세계에서 마녀사냥이 가지는 의미를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란 이후, 유럽 통합의 첫 사례이자 새로운 유럽 국민국가의 정치에서 최초의 통합의 장이었다"
















라고 분석하는 것에서 '자본'을 조직하는 국가의 '폭력'과 그러한 폭력이 규정하는 생활세계를 내면화하는 것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자본으로 점증하는 세계에 주목한다. "널리 알려진 시초축적의 요소는 농촌주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 이른바 '엔클로저'이다." 국가가 폭력으로 삶을 영위하던 기존의 생활세계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생활방식으로부터 분리되고 유리된 농촌주민이 노동 자원인 실업자가 되어 그들 스스로 적극적이게 임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그가 한 말이지만, 장하준 씨의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는 소제와도 같다.① 논자가 주목하는 맑스의 진단에 따르자면, (국가)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잠재력"인 것이다. 생존이 삶의 전제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절박이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과거, 그러나까 냉전으로 질서를 재빠르고 단단하게 재편해야 했던 미국으로서는 도무지 불확실성에 전적으로 내맡겨진 '화폐의 요사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달러는 그냥 종이이거나 금속일 뿐이며, 은행예금은 장부에 기록하는 숫자에 불과하다." 채무에 대한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지나간 시간을 돈에 각인하는 것, 기억을 오늘로 현재하게 하는 것, 이런 '소리'가 어떻게 시장의 확실성을 가져다준단 말인가? 심지어 그런 관계의 문제보다 더욱이 곤란하게 하는 것은 '쌓아올린' 자산이 하루아침 만에 '폭락'할 수 있다는 '허섭'함이었다. 더구나 '대공황'이라는 뼈저린 경험을 실감했던 미국이었다. 따라서 달러를 고정 가치인 금으로 묶음으로써 실물성을 보장하는 태환 정책이 실행되었다. 물론 (허턴의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라는 말처럼) 오늘이 증명하듯, 그 '실험'은 처절하게 실패(를 통해 성공)했다. 더 없는 확실성을 얻은 달러는 마구 찍히고 뿌려졌고, 그것이 스스로를 "공중에서 폭파"시켰을 때,②  미국은 '달러의 의미를 중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급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지급의 중단 또한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실험은 "처절하게 실패(를 통해 성공)했다."


 "미국의 부채는 기본적으로 전쟁부채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하고 있다. 군사비지출은 산업정책의 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예산에서도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 (그러니까) 몇 시간 안에 지구상의 어느 곳에나 정확히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이 세계의 통화시스템을 달러를 중심으로 단단히 묶어 놓는 능력


이라는 것이다. 















 다시 생활 영역에 관한 '부채체제'를 따라가 보면, 논자는 랏자라또의 논의 흐름을 통해 파악한다. 자본의 생활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채 상황을 낳는다. "부채는 피고용자와 국민 전체의 현재 시간표를 전유할 뿐만 아니라 비연대기적 시간, 곧 각자의 미래와 사회의 미래를 통째로 선취한다"는 랏자라또의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신용화폐는 (그것으로는) 금속이거나 종이이거나 숫자일 뿐"이다. 그러나 신용화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의존적이지만) 그것 자체로 이미 '가격'을 내용으로 뜻한다. 따라서 신용화폐는 자신이 의존하는 대상성에 대해 "무관심"해 진다.③ 신용화폐는 이제 스스로가 무한한 '익명성'에 도처한다. "그것은 경험의 빈곤(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난은 경험이 아니다. 가난은 인지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당신은 돈을 벌어야 하는 존재다. 화폐는 모든 것이다. 총괄하고, 그것으로 하여 '의미롭게'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상을 연소하고 파괴함으로써 대상을 새롭게 쇄신시키는 불을 각별히 주목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당시 그의) '통일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좀 더 경이로운 physis 경험이 체험된다. 



 그는 금이(이 경우 금은 돈을 의미하는데) 모든 것과 교환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러한 점에서 불을 금에 비유한다. … 전체 우주에 대해 하나의 통일적인 화폐가 존재한다면 우주는 모든 존재들을 수용하는 일종의 거대한 상품보관소, …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원에 지나지


않다는 경험이다.④ 논자(조정환 씨)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실존 자체가 곧 채무로 된 것이다." 우리는 바타이유의 정식을 다시금 (현대적인 감각으로 너끈히) 재정식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⑤


 "우리는 똥과 오줌, 기저귀 사이에서 태어난다."⑥
















 따라서 논자는 (짐멜이 표현하는) 화폐의 '비천함'과 그 허접성을, "특이성들의 보편적 공통되기로, 보편적 상호부조로" 만들 것을 말한다. (논자가 하는 논의는 아니지만, 익히 지젝을 읽어온 독자로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처럼- 그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을 느끼게 되는데) 결국(시간이 늦어 성급히 글을 맺는다) 민영화는 자본이 내재한 폭력 상황을 스스로 종식하는 것, 즉 "당이 자살"하면서 "버그"적으로 찾아오는 "다시 한 번 가장 순수한 형태의 대상 a"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후로 논의를 더 이어가고 싶지만 벅차다..






① 『그들이 말하지 않는...』

②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Ⅱ(박영균 씨의 「맑스의 국민경제학...」을 통해 재인용)

③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④ 클라우스 헬트, 「자연의 발견」

⑤ 유기환, 『조르주 바타이유』

⑥《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Y》(SBS)의 '나체 남성의 대변기(記)'는 그런 의미에서 다단하다. 물론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둘러싼 소견들을 통해서 (물론 이것이 일정 곡해라고는 하지만) 프로이트의 'sex or nothing'을 다시금 느끼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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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이 … 경쾌하게 담론의 지위에서 머무르길, 이를테면 전투와 동시에 무기, 전략과 동시에 충격, 투쟁과 동시에 전리품 또는 상처, 실제 상황과 동시에 흔적, 변칙적인 접전과 동시에 되풀이될 수 없는 장면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푸코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독자에게 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재판을 위해 새로운 서문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푸코는 "서문을 없애자는 한 가지 대답"만을 내놓는다. 하나의 완결성이 아닌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그런 책이기를, 그는 말한다. 그러나 확실히 이후의 푸코가 보여준 일련의 저작들과 후대 연구자들이 집성한 푸코 연구로 인해 어느 정도 '푸코 계보'를 그릴 수 있게 된 현상황에서는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단락을 집중해 의식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는 거 같다. (어쩌면 그것이 구조주의를 통각하는 가장 재빠른 방법인지도.) 물론 그렇다고 그런 인식 차원을 너무 의식하고 애써 '참신함'만 내세우기 위해 일련의 성과를 지양하는 태도 역시 너무 밑천 없는 자기 과신이 부르는 자만이겠다. 나는 푸코 후기 저작을 읽기 위한 스케치로 이 책을 (한참) 미달로 읽었다.


 나는 우선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광인에게 '역사'란 주체적 문제가 과연 성립 가능한가였다. 미친 사람이 역사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적 지위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조심스러운 전환은) 결국 책에서 '광기'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다. 푸코는 "개방적인 길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동시에) 갇혀 있는, … 이동 공간의 포로"로 잡힌 '광인들의 배'를 주목하면서 이렇게 정리한다.(57) '가장 자유롭고 가장 개방적인 길 한가운데에 빠져나갈 수 없는 배에 갇혀, 엄청난 불확실성에 내맡겨진다.' ①



 이를테면 도시의 '성문 일대'에 '유폐될' 특권이 광인에게 부여됨으로써 구현된 상징적 상황을, 반(半)실제적이고 반(半)상상적인 지리에 따라 확장시키기만 할 뿐이다. … 광인은 외부의 내부에 놓이고, 역으로 내부의 외부에 놓인다. 예전 질서의 가시적 요새였던 것이 이제 우리 의식의 성(城)으로 변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오늘까지도 거의 변함없는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57)


 

 기실 광인의 광기란 결국 이성에 의해 포착되는 이성의 내용이다. 그것은 "엄격한 분할이자 동시에 절대적인 통과이다." 광기는 이성의 바깥에 자리함으로써 그 가시성을 인정받는다. 여기서 바로 그 가시성의 내용을 채우는 '지리'(57)에 바로 이성이 자리한다. 푸코는 광인들을 싣고 떠다니는 배의 '부상'을 주목한다(59-60). 그리고 그것이 "불안 전체를 상징"하는 사물로, "위협과 경멸, 세계의 엄청난 비이성과 사람들의 하찮은 조롱거리 사이에서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가운데 주요한 배역을 떠맡게 된다."(60) 이전 시대에서의 광기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지시하는, 그러면서도 그 의지를 파악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왜냐하면 우린 아직도 선한 하느님이 원하시는가를 충분히" 알기엔 비속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137)



 가령 모든 사람이 보기에 텅 비어 있는 수정구는 광인의 눈에 비가시적인 앎의 두께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브뤼겔은 이 수정구를 들여다보려고 앴느느 불구자를 조롱한다. 그러나 광녀 마르고가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 것은 바로 수정구, 막대 끝에 매달려 결코 깨지지 않으며 앎이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작은 공, 이를테면 우스꽝스럽지만 한없이 귀중한 초롱이다. (72)



 그러나 '광기'는 곧 고전주의라는 시대에 이르게 된다. 광기는 "인간적 형태"로(78), "인간이 자기 자신을 … 상상적으로 찬양"할수록 빛나게 되는 이성의 "거울"을 상징한다.(79) 그것은 "응시하는 자가 빠지는 자만의 꿈을 은밀하게 반영"한다.(79) 그는 광기에 대한 고전주의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앞에서 이미 광기를 반(半)사물적으로 언급했듯이(57), "광기는 이성과 관련된 형태가 된다."(87) '이 가역적 관계는 모든 광기에 이성이 있음을, 모든 이성에 광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 스스로 분명하게 판단한다고, 인간 자신이 사물들의 올바른 척도라고 생각"하는 고전주의 시대에서(87), "세계의 포기, 신의 모호한 의지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 끝을 알 수 없는"(90) 그러함을 추구하는 광기는 이성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대상의 '모름'을 인식해야 한다는 모욕을, 이성은 그것을 단절해야 한다. (파인만의 해묵은 농담은 그래서 적확한 것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적당히 몰라야 세상이 굴러간다..) 그렇기에 광기가 단순히 이성과 관련된 형태(87)를 넘어, "이성의 형태들 가운데"(93) "진실"(97)로 자리한다.



 왜냐하면 광기의 진실은 이성의 내부에 있다는 것이고, 광기가 이성의 한 형상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한 힘이며 이성이 자신에 대해 더 분명히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시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97)



 "이제 광기의 진실이 바로 이성의 승리와 빈틈없이 일치"하게 된다. 푸코는 cogito가 숨 쉬는 세계의 '광기들'을 따라 걷는다.


 푸코는 ?로 글을 열지만 쉽게 닫힐 수 없도록 책을 짜놓았다. 일종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얼추 느낌이라도 전할 수 있을 텐데, 비교적 쉽게 써먹을 수 있는 개념에 급급한 (나와 같이) 게으른 독자에게는 참기 힘든 글이 될 것이다.






① 인용구를 변태적으로 뒤섞었기 때문에 큰따옴표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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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이라는 삶의 터전을 가진 이들에게 국가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전쟁이라는 의미를 오늘날 파악하기 위해 시도되는 지표라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통계 번역의 문제는, 거기에서 정작 의미를 던져줄 이야기라는 사서적이고 서술적인 측면이 결핍되면서 (아렌트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국가 주도의 '게임' 전략 문제에서 더 벗어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얻어지는 결론은 결과적으로 행동을 재고하는 질문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에서 부수되는 피해의 양적이고 실적인 문제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 더 다듬어 이야기하자면, 전쟁을 실행하는 감각적 문제는 증발하고 그 공백은 '계산'이라는 인식 차원으로 메워지는 것이다. "문제해결사들은 사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산을 했다." ① 전쟁은 항상 실익이다. 오직 가능한 손해는 죽음인데, 다행히도 이때의 죽음은 손해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당 논문은 그 뜻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전쟁에 대한 입장은 기존의 견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서술 측면이 남다르다. 논자는 "밀고 당기는 전세 속에서 지역의 점령 주체가 여러 차례" 바뀐, "주민들은 이것을 '톱질했다'라고 표현"하는 지역을 조사하면서, 특이하게도 논문이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인공을 주변에서 구성한다. "주인공 김창순(가명)만 구술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연구는 김창순의 생애를 매개로 이 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구술자 22명의 한국전쟁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 한약방 주인 김창순은 1901년에 태어나서 1969년에 사망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식민지·해방·한국전쟁을 경험했으며 그 과정에서 5개의 국적을 가졌다. 대한제국, 일본제국, 인민공화국, 유엔 군정, 대한민국이 그가 살았을 때 차례로 속했던 '국가'들이었다. 



 역시 본 글에서 그 기구한 사연 모두를 소개할 수는 없다. 다만 글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전쟁이라는 인재(人災)가 '운명'으로 회고되고 신의 섭리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자들의 모습에서 전쟁에 대한 국가의 보다 선명한 그림을 보게 된다.






엄기호-신자유주의의 법치주의와 정치/삶의 형태의 재구성


① 해당 책에서는 생각이 아니라 '판단'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원어가 없는 탓에 원본에 접근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렌트의 개념을 '사고'로 읽었다.



※논문은 《역사비평》(93호)에 해당합니다.

※논자가 지은 책으로
















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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