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 경쾌하게 담론의 지위에서 머무르길, 이를테면 전투와 동시에 무기, 전략과 동시에 충격, 투쟁과 동시에 전리품 또는 상처, 실제 상황과 동시에 흔적, 변칙적인 접전과 동시에 되풀이될 수 없는 장면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푸코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독자에게 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재판을 위해 새로운 서문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푸코는 "서문을 없애자는 한 가지 대답"만을 내놓는다. 하나의 완결성이 아닌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그런 책이기를, 그는 말한다. 그러나 확실히 이후의 푸코가 보여준 일련의 저작들과 후대 연구자들이 집성한 푸코 연구로 인해 어느 정도 '푸코 계보'를 그릴 수 있게 된 현상황에서는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단락을 집중해 의식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는 거 같다. (어쩌면 그것이 구조주의를 통각하는 가장 재빠른 방법인지도.) 물론 그렇다고 그런 인식 차원을 너무 의식하고 애써 '참신함'만 내세우기 위해 일련의 성과를 지양하는 태도 역시 너무 밑천 없는 자기 과신이 부르는 자만이겠다. 나는 푸코 후기 저작을 읽기 위한 스케치로 이 책을 (한참) 미달로 읽었다.
나는 우선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광인에게 '역사'란 주체적 문제가 과연 성립 가능한가였다. 미친 사람이 역사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적 지위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조심스러운 전환은) 결국 책에서 '광기'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다. 푸코는 "개방적인 길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동시에) 갇혀 있는, … 이동 공간의 포로"로 잡힌 '광인들의 배'를 주목하면서 이렇게 정리한다.(57) '가장 자유롭고 가장 개방적인 길 한가운데에 빠져나갈 수 없는 배에 갇혀, 엄청난 불확실성에 내맡겨진다.' ①
이를테면 도시의 '성문 일대'에 '유폐될' 특권이 광인에게 부여됨으로써 구현된 상징적 상황을, 반(半)실제적이고 반(半)상상적인 지리에 따라 확장시키기만 할 뿐이다. … 광인은 외부의 내부에 놓이고, 역으로 내부의 외부에 놓인다. 예전 질서의 가시적 요새였던 것이 이제 우리 의식의 성(城)으로 변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오늘까지도 거의 변함없는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57)
기실 광인의 광기란 결국 이성에 의해 포착되는 이성의 내용이다. 그것은 "엄격한 분할이자 동시에 절대적인 통과이다." 광기는 이성의 바깥에 자리함으로써 그 가시성을 인정받는다. 여기서 바로 그 가시성의 내용을 채우는 '지리'(57)에 바로 이성이 자리한다. 푸코는 광인들을 싣고 떠다니는 배의 '부상'을 주목한다(59-60). 그리고 그것이 "불안 전체를 상징"하는 사물로, "위협과 경멸, 세계의 엄청난 비이성과 사람들의 하찮은 조롱거리 사이에서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가운데 주요한 배역을 떠맡게 된다."(60) 이전 시대에서의 광기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지시하는, 그러면서도 그 의지를 파악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왜냐하면 우린 아직도 선한 하느님이 원하시는가를 충분히" 알기엔 비속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137)
가령 모든 사람이 보기에 텅 비어 있는 수정구는 광인의 눈에 비가시적인 앎의 두께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브뤼겔은 이 수정구를 들여다보려고 앴느느 불구자를 조롱한다. 그러나 광녀 마르고가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 것은 바로 수정구, 막대 끝에 매달려 결코 깨지지 않으며 앎이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작은 공, 이를테면 우스꽝스럽지만 한없이 귀중한 초롱이다. (72)
그러나 '광기'는 곧 고전주의라는 시대에 이르게 된다. 광기는 "인간적 형태"로(78), "인간이 자기 자신을 … 상상적으로 찬양"할수록 빛나게 되는 이성의 "거울"을 상징한다.(79) 그것은 "응시하는 자가 빠지는 자만의 꿈을 은밀하게 반영"한다.(79) 그는 광기에 대한 고전주의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앞에서 이미 광기를 반(半)사물적으로 언급했듯이(57), "광기는 이성과 관련된 형태가 된다."(87) '이 가역적 관계는 모든 광기에 이성이 있음을, 모든 이성에 광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 스스로 분명하게 판단한다고, 인간 자신이 사물들의 올바른 척도라고 생각"하는 고전주의 시대에서(87), "세계의 포기, 신의 모호한 의지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 끝을 알 수 없는"(90) 그러함을 추구하는 광기는 이성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대상의 '모름'을 인식해야 한다는 모욕을, 이성은 그것을 단절해야 한다. (파인만의 해묵은 농담은 그래서 적확한 것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적당히 몰라야 세상이 굴러간다..) 그렇기에 광기가 단순히 이성과 관련된 형태(87)를 넘어, "이성의 형태들 가운데"(93) "진실"(97)로 자리한다.
왜냐하면 광기의 진실은 이성의 내부에 있다는 것이고, 광기가 이성의 한 형상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한 힘이며 이성이 자신에 대해 더 분명히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시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97)
"이제 광기의 진실이 바로 이성의 승리와 빈틈없이 일치"하게 된다. 푸코는 cogito가 숨 쉬는 세계의 '광기들'을 따라 걷는다.
푸코는 ?로 글을 열지만 쉽게 닫힐 수 없도록 책을 짜놓았다. 일종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얼추 느낌이라도 전할 수 있을 텐데, 비교적 쉽게 써먹을 수 있는 개념에 급급한 (나와 같이) 게으른 독자에게는 참기 힘든 글이 될 것이다.
① 인용구를 변태적으로 뒤섞었기 때문에 큰따옴표를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