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
렌조 미키히코 지음, 모세종.송수진 옮김 / 어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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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일본 작가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된다. 당장 떠오르는 작가들만 해도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요코미조 세이시”, “미나토 가나에” 등 열 명 가까이에 이른다. 일본 추리 소설의 매력은 소재의 다양성을 들 수 있겠다. 밀실 트릭, 알리바이 조작 등 추리소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장치들을 이용한 “정통파” 추리 소설 에서부터 사건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사건의 배경에도 중점을 두어 현실의 사회상을 무게 있게 다루는 “사회파”, 서술상의 트릭을 이용해서 마지막 결말에 반전을 보여주는 기법을 적용한 “서술트릭”, 피가 낭자하는 잔혹한 범죄가 아닌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사건을 유쾌하게 그린 “코지 미스터리”, 초능력, 귀신, 불사(不死), 시간 여행 등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SF”물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소설을 골라 읽을 수 있는, 마치 뷔페식 성찬(盛饌)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읽은 “렌조 미끼히꼬(連城三紀彦)”의 <미녀(어문학사/2011년 1월)>는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책에 실려 있는 8편의 단편 중에는 알리바이 조작과 살인 사건 같은 추리 소설적 요소를 담고 있는 작품도 있지만 몇몇 작품은 딱히 추리소설로 보기 어려운, 오히려 치정(癡情)소설 - 남녀간의 사랑과 배신, 복수를 그린 통속소설 - 로 분류할 만한 작품들도 있어 올곧이 추리 소설이라 보기에는 좀 어려울 듯 하다. 그래서였을까? 읽고 나서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이유가. 

책에 실려 있는 8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남녀간의 “애정”이다. 소개글을 보면 작가는 추리소설로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지만 지금은 연애소설 작가로 더 유명하다는데, 자신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연애와 미스터리, 두 가지 장르를 결합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애정”이 하나같이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 연애 일색이다. 결혼기념일에 아내가 남편에게 애인을 선물(?)하고(<야광의 입술>), 어린 소녀가 아버지에게 친구 엄마를 소개시켜 줘서 부모를 이혼하게 만드는가 하면(<타인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가 임종 전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애틋하게 보살피는 남편에게 사실은 몇 년 전에 당신을 죽이려 했었다는 끔찍한 고백을 하고(<밤의 살갗>), 어느날 낯선 여인이 다가와 자신의 남편과 당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그 여인과 맞바람 - 마치 스와핑같이 느껴진다 - 을 피우게 된 남편이 그 여인과 공모하여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그 여인의 남편에게 살인누명을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밤의 오른편 >), 같은 시간에 벌어진 아내와 애인의 죽음에 감춰진 알리바이 조작 살인 사건(<밤의 제곱>) - 범인인 남편이 자백을 여러번 번복하는 바람에 사건을 담당한 형사뿐 만 아니라 읽는 독자도 같이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만 이런 트릭은 자주 보는 터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 자신의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 눈감아주는 아내(<미녀>) 등등 하나같이 욕하면서도 보게 만드는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런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눈살이 저절로 찌푸리게 만드는 “막장” 소재들임에도 읽으면서 전혀 유치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작가의 글 솜씨가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다만 이런 막장 소재는 이번 작품이 처음이 아니어서 <어머니의 편지>라는 작품에서는 친딸을 며느리로 삼는 내용 - SBS 드라마 ‘하늘이시여’가 이 작품을 표절했다고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 이라니 어쩌면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8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희극 여배우>를 꼽고 싶다. 사실 다른 7편은 그다지 충격적이나 놀랍지는 않은, 다른 추리소설 단편 모음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수준이어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희극 여배우>만큼은 실험적인 면이 뛰어난 독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편지와 전화 통화 형식 - 상대방의 대화는 들리지 않고 일종의 독백(獨白)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7명의 남녀가 복잡하게 얽힌 연애담에서 시작해서 글이 전개될 수 록 등장인물이 한명씩 줄어들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결말에 멍한 느낌이 절로 들게 하는 반전이 꽤나 충격적이다. 다만 읽고 나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한번 읽고 나서야 전체 내용을 이해하게 된 것을 보면 번역하는 데 힘들었다는 번역가의 푸념이 절로 이해가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비교하는 출판사의 홍보는 조금 과한 것 같지만 이 한 편만으로도 이 책은 꼭 읽어볼 만한 그런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다.  

책 자체는 재미있지만 비정상적인 소재 때문에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 책만으로 렌조 미끼히꼬를 평가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작가의 대표작이자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나오키상 수상작품이라는 <연문(戀文)> - 제목만 보고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의 원작인가 싶었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다 - 을 읽어본 후로 평가를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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