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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p.333)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 ~ )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은 그동안 참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근데 친구가 이 책을 몇 년에 걸쳐 읽는 것을 보고 '꽤나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미뤄 왔었다. 그러다 어쩐 일인지 이번 여름, 이 책이 자꾸 생각나 마침내 읽었는데...세상에! 처음부터 너무 너무 재미있는 것이 아닌가!
매력적인 제목, 시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강렬한 도입부, 59장에 걸쳐 화자가 번갈아가며 바뀌는 구성, 이국적인 이슬람 전통 회화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와 알려지지 않은 세밀화가들의 삶과 예술, 과연 살인자는 누구인지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추리소설의 형식 등...그야말로 문학성과 읽는 재미를 모두 갖춘 그런 멋진 소설이었던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1591년 겨울, 이스탄불 외곽의 버려진 우물 바닥에 죽어 누워 있는 시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을 읽고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p.13)]
시체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 화원(畵院) 소속 화가인 엘레강스. 땅에 묻히지 못하고 우물에 버려진 그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지 못해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흘 전 자신이 어떻게 살해당해 우물에 던져 졌는지 이야기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2년 전, 술탄의 대사 자격으로 베네치아에 갔던 에니시테는 궁전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초상화'라고 불리는 서양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이스탄불로 돌아온 그는 술탄을 설득해 비밀리에 서양 화풍의 삽화가 들어간 책 제작을 맡게 되고, 궁정 화원에서 가장 기예가 뛰어난 장인들을 선발해 작업에 들어간다. 선발된 세밀화가들은 에니시테의 지시대로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화가들 사이에 갈등이 싹튼다. 엘레강스도 이들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오스만의 종교와 전통, 세계관을 부정하는 자들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소설의 큰 틀은 누가 엘레강스를 죽였는지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이지만, 작가는 살인사건에 집중하기 보다는 시대와 정치적 변화 속에서 전통을 고수하려는 화가와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려는 화가들 사이의 갈등을 통해 신과 인간, 서양과 동양 가치관의 충돌 등을 마치 세밀화처럼 섬세하게 보여주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소설은 장(章)마다 여러 인물과 사물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람 뿐만 아니라 시체, 개, 나무, 금화, 악마, 말, 빨강색까지 화자로 등장해 오스만 제국의 예술과 문화, 각 인물의 처한 상황 등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준다. 과거 이슬람 전통 세밀화와 세밀화가들에 대한 매혹적인 이야기도 흥미롭고 어딘가에 있을 범인에 대한 단서를 기대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유럽과 아시아, 두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튀르키예 작가답게 오르한 파묵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 두 문명의 충돌과 갈등을 오스만 제국의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을 통해 보여준다.
대상을 인간의 시선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재현한 서양의 화가들과 달리 동양 이슬람의 화가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으로 대상을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16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슐레이만 대제의 정점을 지나 쇠락해 가던 시기에 르네상스 인본주의 정신이 담긴 유럽의 화풍이 들어오면서 이슬람 전통의 세밀화는 존재의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화가들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어떤 이는 유럽의 그림을 배움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어떤 이는 이를 신성모독이자 오스만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본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처음 읽었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작가의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묘사는 아름답고 전체적으로 비장미가 감도는 아주 매혹적인 소설이다. 거기다 지적인 재미까지!
다음은 당시 오스만에서 최고의 예술로 인정받았던 헤라트 화파의 책 <휘스레브와 쉬린>의 살인 장면을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한 글이다.
그자가 한 손에 단검을 쥐고, 다른 손으로 당신의 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섬세하게 그려진 벽과 창, 창틀의 장식, 졸린 목에서 새어 나오는 고요한 비명의 빛깔을 닮은 붉은 카펫의 구김살, 살인자가 당신을 죽일 때 보이는 역겨운 맨발과 그가 잔인하게 밟고 서 있는 이불의 화려하고 멋진 노란색과 보라색 꽃문양 등은 모두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머지않아 우리가 두고 가야 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그림과 세상의 아름다움은 나의 죽음과는 무관하며, 설사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죽음은 철저히 나 혼자만의 몫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아찔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