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아직도 글을 쓰고 떠벌리는 동안 우리는 야전 병원과 죽어 가는 동료들을 보았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최고라고 지껄이는 동안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역자가 되거나, 탈영병이 되거나, 겁쟁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어른들은 걸핏하면 이런 표현들을 쓰곤 했다. 우리들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향을 사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격이 시작되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제 우린 다른 사람이 되었고, 대번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른의 세계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린 어느새 끔찍할 정도로 고독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고독과 싸워 나가야 했다. - P21

사실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이제 더는 청년이 아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어졌다.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세상과 현존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고 총을 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터진 유탄은 바로 우리의 심장에 명중했다. 우리는 활동, 노력 및 진보라는 것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살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의 실체를 믿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오직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 P98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엄폐부에서도 나는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엄폐물이 없는 전쟁터에서 열 시간 동안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다. 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 P111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버림받은 상태에 있고, 나이 든 사람들처럼 노련하다. 우리는 거칠고 슬픔에 잠겨 있으며 피상적이다. 나는 우리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한다. - P134

느닷없이 어떤 끔찍한 미지의 감정이 내 마음속에 용솟음친다. 나는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으며,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내가 아무리 부탁하고 애를 써보아도 아무것도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해서 슬픈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리고 과거는 나를 외면하고 저버린다. 이와 동시에 나는 과거의 추억을 너무 되살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다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한 명의 군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P185

하나의 명령으로 이 조용한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 되었다. 하나의 명령으로 이들이 우리의 친구로 변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어딘가의 탁자에서 어떤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몇 년 동안 우리의 최고의 목적은 평상시 같으면 세상의 멸시를 받고, 최고형을 받을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이곳에 와서 어린이 같은 얼굴과 사도 같은 수염을 지닌 이 조용한 사람들을 직접 본다면 누가 이들을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적인 것 이상으로 하사관이 신병에게, 고등학교 선생이 학생에게 더욱 고약한 적이다. 그런데도 만일 이들이 풀려난다면 우리는 다시 이들을, 이들은 우리를 쏠 것이다. - P205

"전우여, 부디 나를 용서해 다오! 우리는 이러한 점을 늘 너무 늦게야 깨닫곤 하지. 왜 우리에게 일러 주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자네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개란 사실을, 자네들 어머니들도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근심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똑같이 두려워하며 똑같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 P23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7-13 2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명작을 읽으시는군요 ^^

coolcat329 2022-07-14 09:25   좋아요 1 | URL
20살도 안 된 청년들이 어른들이 벌인 전쟁에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이렇게 문장을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