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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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포스트붐postboom 문학으로 대표되는 마누엘 푸익의 대표작을 지난 달에 처음으로 읽었다.

무려 10년 전 구입한 책인데, 책장에 참 오래 있었다.

제목이 주는 강렬함과 함께 책 속에 내가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내용이 있을 거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여기서 '거미 여인'은 내 상상 속 그런 혐오스러운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한달이 지난 지금도 이 소설을 생각하면 작품 속에 나오는 볼레로 Mi Carta(내 편지)란 노래와 함께 그 어떤 애잔함이 밀려온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인물-몰리나, 발렌틴-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은 아르헨티나 비야 데보토라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로 발렌틴은 26세 게릴라 활동하다 체포된 정치범이고, 몰리나는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지다 구속된 37세 동성애자이다.

두 사람은 한 감방에 같이 수감되어 있는데, 소설은 몰리나가 자신이 봤던 영화를 발렌틴에게 이야기해주는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몰리나는 총 6편의 영화 이야기를 동성애자인 자신의 시각으로 각색해서 들려주는데, 처음에 발렌틴은 이런 몰리나를 싸구려 감상영화에 물든 의식이 결여된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열악한 감옥 생활 중 발렌틴이 아프게 되고 그런 발렌틴을  몰리나가 정성스럽게 간호해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런 과정에서 발렌틴은 영화 이야기를 통해 억압된 자신의 내면, 감정과 만나게 되고 몰리나 또한 조금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성소수자인 몰리나의 시선을 통해 변형된 이야기들이 또 발렌틴의 입장에서 재해석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결여되었던 부분이 채워지고 결국엔 두 사람이 처음과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는 엔딩은 참으로 인상깊었다.

 

이 소설의 매력은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영화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서 억압받는 두 인물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면서 각자가 지닌 모순과 잘못된 가치관으로부터 구원,해방된다는 문학이 추구하는 주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영화이야기로 소설이 진행되다보니 나 또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영화와 문학이 서로 어우러져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답게 다양한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삽입된 점 또한 이 소설의 독특함이다. 예를 들면 두 인물의 대화만으로는 부족한 부분과 동성애자인 몰리나란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가가 개입하여 각주로 보충 설명 해준 점, 냉정한 바깥의 현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딱딱한 보고서 형식의 글과  희곡의 형식으로 표현된 몰리나와 소장의 대화가 그 예이다.

 

특히 두 사람의 대화에 몰입해서 읽다보면 갑자기 엄청난 분량의 각주가 한동안 계속 나오는데 -어떤 각주는 한페이지를 넘기도 함- 이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해서 골치 아프기도 했으나, 이 각주들은 독자들에게 동성애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성의 역할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회적 규범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이는 동성애에 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역자 송병선은 작품 해설에서 말한다.

 

다소 생소한 작가이고 남미 문학이라는 점, 게다가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이 책을 10년이나 책장에서 묵게 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너와 나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수직이 아닌 수평적 공존을 추구,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을 두 인물을 통해 그린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만이 옳은게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는 세상, 억압에서 해방으로 나아가는 세상, 더 나아가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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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0-15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보고 읽을까 말까 망설여지는 책 중의 하나였는데, 써주신 리뷰 보고 나니 왠지 읽어봐야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네요 ^^

coolcat329 2020-10-15 13:28   좋아요 0 | URL
몇 장면 빼고는 소설 대부분이 두 사람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어 아주 잘 읽힙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