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지난 달 처음으로 읽었다. 1917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그는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비롯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이 작품은 아주 예전에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당시 내가 꽤나 이 작품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청춘의 독서를 생각하면 바로 이 카타리나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1974년 2월 24일, 한 일간지 기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범은 바로 27세의 평범한 여성 카타리나 블룸. 그녀는 스스로 경찰을 찾아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다. 생활력 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받던 그녀가 왜 이런 살인을 저질렀는지, 이 작품은 살인이 일어나기 5일 전으로 돌아가 그녀의 행적을 재구성하여 그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건의 결말을 미리 알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과 시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공권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한 인간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성실한 여인 카타리나 불룸은 댄스파티에서 범죄 용의자와 춤을 추고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 아침에 '살인범의 약혼녀', '창녀', '살인범의 정부', '음탕한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의 공조자'가 된다. 

통속적이고 선정적인 일간지 <차이퉁> 기자 퇴트게스는 어떠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룸을 용의자와 공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처음부터 그녀를 용의자의 정부로 단정, 추측성 기사를 써 여론몰이를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의 사생활을 부정적으로 폭로,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이혼녀라는 점, 그녀의 부모와 오빠의 바르지 못한 행동 등도 기사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런 보도에 그녀를 좋아했던 이웃들도 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블룸은 직장은 커녕 모든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수사 과정에서 남용되는 경찰의 공권력도 매우 폭력적이다. 수사과장 바이츠메네는 불룸에게 "그 자가 너랑 붙어먹었지?" (p.21) 라고 묻는다. 성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예민하고 결벽증이 있는 그녀를 자극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자백을 받아내려는 언어 폭력이다.

경찰은 블룸을 범죄자로 단정하고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그녀의 인권은 무시한채 수많은 유도심문과 폭력적인 심문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말한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허구(fiction)에 있을텐데 이 작품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생산된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맨 앞에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라 말함으로써 현실과 어떠한 유사점이 있다하더라도 그건 우연임을 강조한다.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이지만 '꾸며낸 것'이라는 그의 말은 작품해설에서 나와 있듯이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것에 대비한 발언이겠지만 그만큼 이 작품이 현실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독일 작가의 이미지'가 아닌 '독일의 죄의식'을 작품화한 작가라고 해설에서 말한다. 그가 살던 당시 독일의 사회 현실 문제에 늘 양심있는 작가의 목소리를 냈던 그의 이 작품 역시 사회가 한 인간에게 가하는, 언론과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폭력을 다루고 있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가상의 인물과 언론사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글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효력이 있다. 늘 언론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들, 언론 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또한 익산 약촌 오거리 사건과 같이 공권력을 앞세운 경찰의 강압수사에 굴복, 허위 자백을 하게 해 무고한 한 인간을 옥고를 치르게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이 안 나지만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겠는가! 그런 고통을 당한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동안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에 반응한 나의 저급한 취향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보고서를 읽는 듯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는 크게 못 느꼈지만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사회의 부당한 폭력을 비판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로서 의무를 다한 하인리히 뵐은 훌륭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8-25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주문해서 오늘 받습니다. ㅋ
내용을 대충 알기에 더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0-08-25 13:39   좋아요 0 | URL
네~이 책은 내용을 알기에 더 기대되더라구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요!☺

2020-08-25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0-08-25 18:57   좋아요 1 | URL
저도 미룬 책이 참 많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즐거운 독서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