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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ㅣ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괴테의 낭만적인 작품을 중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읽었다. 사담이지만 20~30대에 세계문학을 열심히 읽지 않은걸 거의 매일 후회하고 슬퍼한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가 디자인이 구리다고 혹평을 많이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갖고 싶을 정도로 끌려서 중고 서적에서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산다. 이 책도 그렇게 나에게 오게 되었다.
이 작품은 괴테가 25살에 자신의 실연의 아픔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샤를로테 부프라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괴테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사랑한 친구가 결국엔 괴로움을 못 이기고 권총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은 친구의 자살이라니...괴테가 그 사연을 작품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더 충격적인 것은 친구가 자살에 사용한 권총이 괴테 자신이 사랑했던 샤를로테의 약혼자 것이라니...현실이 더 소설같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베르터는 첫 눈에 로테에게 반한다. 그의 사랑은 우연이 아닌 운명이다. 어린 동생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로테의 소박하며 자애로운 모습, '보슬비가 대지를 적시는 장관'을 보다가 시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베르터는 서로의 영혼이 통함을 느낀다. 이 영혼의 교감이 매우 중요하다.
처음 그녀를 만나고 나서 그의 마음은 낮인지 밤인지 분간도 안되고, '내 주위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표현한다. 30분만 가면 로테가 있는 이 곳이 천국이며 '진정으로 나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베르터는 로테와의 사랑을 키워나갈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약혼한 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약혼자 알베르트는 훌륭한 인격에 능력도 있는 사람이기에 베르터의 상실감은 더 커진다. 자신이 그보다 많이 꿀린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느 날 베르터는 알베르트와 자살 문제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알베르트는 어떻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쏘아 죽일 수 있냐며 그건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쉬운 나약한 사람이 하는 짓이라며 비난한다. 베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그 절절한 심정을 공감할 때만 우리가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다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변호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어. 기쁨과 괴로움과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는 견딜 수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가면 곧바로 쓰러지고 말지. (...)그래서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p.79)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힘든 베르터는 이 세상의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이해한다. 인간은 '미로에 갇혀서 출구를 찾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누구도 그들의 결정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괴테가 이런 자살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니 당시 성직자들이 이 책을 두고 '저주할 만한 글'이라고 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괴테는 자살을 선동하거나 미화시키기 위해 쓴 글이 아니며, 이를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야지 현실로 착각하면 안된다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했다고 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알베르트가 돌아온 이후로 베르터의 괴로움은 날이 갈수록 커지며 급기야는 조울증으로 발전한다. 그토록 좋아했던 아름다운 자연, 책을 봐도 감흥이 없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로테로부터 선물을 받고는 흥분해서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해하다가 다시 끓어오르는 격정에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기까지 한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베르터는 떠나기로 결심, 어느 공사를 모시는 말단 관리로 취직하고 나름 분주하게 일하면서 회복되는 듯 보인다.
어느 날 평소 자신을 신임하던 백작의 만찬에 초대받아 간 베르터는 낮은 신분의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B양 마저도 자신을 모른체 하자 베르터는 도망치듯 그곳을 나온다. 나중에 B양을 만나 그녀에게 속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베르터 씨, 저는 어젯밤 한숨도 못 자고 오늘 아침까지 제가 선생님과 교제하는 문제로 아주머니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어요. 그리고 선생님을 깍아내리고 모욕하는 말도 그저 묵묵히 듣는 수밖에 없었어요. 제 마음의 절반만큼도 선생님을 변호해드리지 못했고, 그런 변호가 용납되지도 않았어요."(p.119)
베르터는 이 말을 듣고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상처를 받는다.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헤아리지도 않고 이런 말을 자신의 면전에 대고 하는 그녀가 야속하다.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누구보다 예민한 감정을 지닌 베르터에게 이 말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평소 출세 지향적인 관리들과 거들먹대는 귀족들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던 베르터는 신분차별로 직접적인 모욕을 당하자 사직하고 다시 떠나기로 결심한다.
유난히 순수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지만 현실을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은 꽤나 날카롭고 진보적이다.
'나는 우리가 평등하지 않으며 평등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이른바 천민들에게는 거리를 두어야 존경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패배가 두려워서 적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비겁한 자와 마찬가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p.17)
'그런 얼간이들은 본래 지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며 맨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좀처럼 드물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대신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또 얼마나 많은 대신들이 그 비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최고 일인자란 말인가? 내 생각에는 다른 사람들을 굽어살피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들의 힘과 정열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나 지략을 갖춘 사람이 곧 최고 일인자일 것이다.'(p.108)
이곳저곳을 방랑하던 베르터는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다시 로테 곁으로 돌아온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그는 더욱 그녀에게 집착한다.
"그녀는 알베르트와 사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살면 더 행복할 텐데! (...)로테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책의 어떤 구절을 읽으면 그녀의 가슴과 나의 가슴이 함께 뛰지만, 그런 경우에도 알베르트의 가슴은 공감하며 뛰지 않는다" (p.128)
"나는 이따금 어떻게 다른 남자가 로테를 사랑할 수 있고 감히 사랑할 자격이 있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내가 마음을 다 바쳐 오로지 그녀만을 애절하게 사랑하고 있는데, 오로지 그녀밖에 모르고, 그녀만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p.131)
그의 로테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고 베르터는 죽음을 생각한다.
죽기 전 로테를 찾아간 베르터는 그녀에게 비극적인 이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시안(Ossian)노래를 로테에게 낭송해주고 두 사람은 감정에 북받쳐 처음이자 마지막인 입맞춤을 나눈다.
그리고 돌아온 베르터는 권총-로테가 심부름 하는 소년에게 직접 건네준-으로 자살한다. 그 유명한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 조끼, 장화를 신은 채...
그가 죽기 전 남긴 편지는 자신의 죽음을 절절하게 표현, 로테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하다.
로테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 너무 도취되어 로테에게 큰 상처를 줄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이 권총은 당신의 손을 거쳐 왔습니다.(...) 로테, 당신은 결심을 실행에 옮길 도구를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손으로 죽음을 맞기를 고대했는데, 아, 이제 그렇게 되는구요." (p204)
"로테! 저는 겁내지 않고 저 차갑고 끔찍한 술잔을 들어 죽음의 도취를 마시겠습니다! 저 술잔을 저에게 건네준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제가 다름 아닌 당신을 위해 죽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니요!" (p.208)
"탄환은 장전되어 있습니다. 시계가 자정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로테! 로테, 잘 있어요! 잘 있어요!" (p209)
로테는 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까. 평생을 가슴 한구석에 슬픔을 안고 살 로테를 생각하면 베르터가 철없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반면에 이토록 순수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발 붙이지 못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죽음으로써 끝낼 수밖에 없는 이 비극은 그가 그냥 베르터가 아니라 '젊은'베르터이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베르터는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죽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책을 읽다 보면 당시 신분차별에서 오는 경멸과 모욕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제목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에서 Leiden은 고뇌란 뜻으로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 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이는 베르터의 죽음이 단 한 가지가 아닌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이뤄진걸 뜻한다.
'베르터 이펙트'라는 말이 있다. 유명인의 자살 이후 그것을 모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나는 그 현상을 이해하기 힘드나, 베르터가 알베르트에게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며 그 불쌍한 사람들을 대변했을 때, 이 소설은 그런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 사랑에 몸부림치고 세상의 약자들에게 깊은 연민을 가졌던 베르터, 반면에 속물적인 관료와 거만한 귀족들에겐 예리한 비판을 가한 베르터.
난 이런 사랑을 잘 모르지만, 그가 사랑에 빠져 세상과 자기 사이에서 고뇌한 모습은 매우 강렬했고, 여전히 세상의 많은 아파하는 영혼들의 편에 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