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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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작가인 실비 제르맹의 책을 아무 고민 없이 바로 구입했다. 좋은 리뷰를 읽은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 밝고 강렬한 표지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새해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강둑길을 걷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문장부터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내고 그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

"웃지 마요.!", "웃지 마세요......"

너무 생뚱맞은 이 대사는 마지막에 가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다시 앞으로 돌아와 읽게 만드는 첫 번째 포인트이다.

 

제목이 숨겨진 삶이니 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까 한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나 비밀이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드러나지 않은 그야말로 '숨겨진 삶'을 신비로운 문체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 다 나름의 '숨겨진 삶'이 있지만 베랭스 家에 '용의주도한 결심보다 우연의 판결'의 결과로 나타난 피에르의 '숨겨진 삶'이 가장 인상적이다.

소설의 뒤에 가서야 드러나는 피에르의 '숨겨진' 이야기는 왜 그동안 피에르가 자신에 대해 그토록 함구했으며 살아남는 일 자체가 그에겐 노동이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이런 피에르가 자신의 '숨겨진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과거의 허물을 벗고 다시 새 인생을 시작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평생 옭아맨 '난해한 유희'를 뒤집어 엎음으로써 더이상 죽은 자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산 자가 죽은 자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짐과 고통을 내려놓게' 되는 경지에 오르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p.267

그는 원점에서 재출발한다. 그러나 이 원점은 밑 빠진 독이 아니며, 허무도 비참한 상태도 아니다. 시간의 물 속에 잠겨 있는, 이제라도 피어나 너부죽 벌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아름다운 원이요, 가뿐히 들어올릴 수 있는 불타는 공이다. 피에르는 구원받았다.

 

 

죽은 자들과도 화해한 그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피에르는 자신의 '해방을 자축'하기 위하여 한 때 자신이 정착해서 함께 지내던 베랭스 家가 있는 우르푀빌로 향하고 그곳에서 지평선까지 내려간 거대한 해와 만난다. 자신의 방에 걸려있던 로스코의 그림과 같은 하늘을 노란 오렌지색 물결로 물들인 해를 바라보며 존재의 욕망을 느낀다.

 

 

p.283

피에르는 이 작열하는 눈부신 하늘 앞에 서 있다. 그 광채와 숨결과 공간을 들이마신다. 그는 그것들 안에 존재한다. 안에 존재 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라고 로스코는 말했다. 그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결정되는 무엇이다. 사랑과 자명성에 힘입어 다져지는 의지,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무르익어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결의다.

 

 

피에르의 이야기만 했지만 그와 얽힌 베랭스 家 인물들의 삶도 매우 인상적이란 점 말하고 싶다.

사소한 한 사건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삶의 잔인함 속에서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상처들, 그것들과의 대면, 화해가 '숨겨진 삶'과 같은 비밀스러운 문장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적어도 두 번은 읽어봐야 그 맛을 좀 더 깊게 알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조만간 다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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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19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마그누스>가 제일
멋진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coolcat329 2020-01-20 07:58   좋아요 0 | URL
2005년 고등학생이 수여하는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이네요. 꼭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