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찾는 건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야.

p.47



섬세한 문체로 각광받는 오가와 요코의 신작 [침묵 박물관]이 작가정신에서 나왔다. 처음 접하는 작품이라서 작가는 잘 몰랐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유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그런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하니 좀 더 이해가 됐다. 작가정신에서는 표지도 예쁘게 그렸지만 책날개에 친절하게 작가 설명을 해 놓았다. 일본소설이지만 일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지의 산간지방 이야기 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나혼자만의 생각일까? 몽환적이고 신비롭기 이를데 없다. 게다가 침묵박물관이라니?


주인공 '나'는 박물관 설계를 의뢰받고 한 마을로 간다. 의뢰인 노파는 굉장히 날카로우면서도 깐깐하며 괴팍한 성격을 가졌다. 노파는 죽은 자의 물건을 취득해 보관하고 있다. 보관상태는 형편없었고, 그 목록과 수집과정은 더욱 기괴했다. 죽은 자나 유족이 허락한 적도 없는 은밀한 물건을 훔쳐오는 것. 그 과정에서 거짓말은 필수였다. 이건 정말 사기와 도둑질 아닌가? 나는 그녀의 뻔뻔함과 안하무인, 막무가내 식의 화법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뭐야, 이게?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그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녀 때문일까. 노파의 의붓딸인 소녀는 노파를 따르면서도 '나' 를 도와 박물관에 넣을 물건 관리는 물론, 수집, 도열을 맡는다. 외과의사가 죽으면 그의 집도실에 몰래 숨어들어 그가 부정하게 부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왔던 귀 자르는 메스를 훔쳐오고, 화가가 죽으면 그녀가 죽기 전까지 먹었다는 물감을 가지고 온다. 물론 유족들 모르게. 결국 '나'는 주머니칼까지 쓰면서 절도에 합류한다.


 '나'는 10살 차이나는 형이 있다. 원문에서도 존대어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에게 존댓말로 자꾸 편지를 쓰니 좀 어색했다. 나이차이가 많이나서 그럴 수도 있고. 암튼 그 형을 굉장히 좋아한다. 형이 결혼해서 아기를 낳자 그 아기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가기도 한다. 그런데 선물을 고르다가 갑자기 의문의 폭발이 일어났고 '나'는 고막이 파열되는데서 그쳤지만 소녀는 온몸에 유리가 박혔고, 그 마을의 유명인(?)인 침묵 전도사가 죽는다. '나'는 습관처럼 침묵 전도사의 물건을 훔쳐온다. 역시 박물관 소장용이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 엄청 기대했더랬다. 내가 박물관을 좋아하니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한 곳에 모아두고 후대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에서 살짝 내비친 것처럼 물건 입장에서 봤을 때는 시간이 되면 풍화되듯 사라져버리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소독을 하고, 건조를 시키고, 유약을 바르고, 빛을 차단해서라도 그것들을 보관하고 싶어한다. 절대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박제하고 싶어한다. 나는 그것이 생물이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은 자의 물건을 훔쳐오는 것은 반대다. 심지어 고인의 눈을 벌려서 의안(義眼)을 빼오는 것을 어째서 정당한 행위라고 보는가.


박물관에 존재하는 물건들은 보통은 역사적 사료가 될만한 것들이다. 물론 범인들의 물건도 얼마든지 역사가 될 수 있다. 개인의 모든 시간은 역사다. 하지만 훔쳐서 취득한 것은 별개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서 수집해야만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물건을 선보일 수 있다는 박물관의 의의가 설립된다. 노파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충분히 수집할 수 있었을텐데 그가 원하는 물건이 상당히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마도 절도라는 방법을 취득했을 것이다. 이것들에 대해 로망을 부여해 미화시켜놓은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일본소설의 클리셰인가.


 독특한 설정이긴 했다. 마을 사람들의 유품을 모아 전시한다는 것. 그것이 영리의 목적도 과시의 목적도 아니지만 오랜세월이 지나 후손들이 봤을 때 좋아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도 '의안(義眼)' 은 아닌 듯)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젊은 여자가 살해당한 후 유두부분이 도려내진 채 유기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다. '나'는 유품을 수집하러 피해자의 집이나 가게에 가지만 이렇다할 유품을 수집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태도다. 그는 피해자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 바로 유두라며 그것을 갖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구역질이 나왔다. 노파가 가지고 있던 광적인 수집욕이 '나'에게도 전가되는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노파의 서슬에 놀라서 도둑질까지 했다면, 이번에는 광적인 수집욕에 선뜻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본인의 선택이다.


결말을 더 설상가상이다. 지속되는 사건에 범인을 발견하게 된 '나' !! 그러나 박물관을 세울 욕심을 지닌 모든 일들이 연쇄살인쯤은 헤프닝이라고 여기는 말도 안되는 사건들 속에 봉착한다. 결국 '나'는 박물관을 선택한다.


이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들이 독자에게 주는 바는 무엇인가. 일본소설이 아무리 독특하고 , 발상이 엽기적일 때가 많다고는 하나 생명 자체를 이토록 경시해도 되나?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산 자를 죽여도 되나? 제물도 아니고 이게 무슨 경우지? 그리고 침묵 전도사들의 역할은 또 뭐지? 거기에 털어놓으면 절대적 비밀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의식들은 어디에서 오는거지? 대단히 궁금하였다. 왜 하필 알공예품일까, '나' 의 형은 또 왜 그렇게 됐을까? 폭탄은 또 누가 설치한 걸까? 개연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작품이다. 메타포라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독자마다 이해와 공감의 진폭이 다르므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문장력은 가독성을 증가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같은 독자를 위해서 소설가의 변이나, 역자의 말 정도가 들어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다 읽고 난 뒤에 더 무서운 소설 [침묵 박물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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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어 필 무렵 - 드라마 속 언어생활
명로진 지음 / 참새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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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백필 무렵명로진참새책방


제목만 보고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다면? 

맞다! 바로 그 <동백꽃 필 무렵>

혼자 아이를 키우고 사는 동백(공효진 분)의 고충과 사랑과 모성을 그린 화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커버해 제목을 지은 명로진의 에세이 [동백어 필 무렵]을 읽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하자면 드라마 속 말하기 방식을 통해 현대인의 삶에 대해 엿보고 저자 본인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에세이다. 부제처럼 '드라마 속 언어생활' 에 대해 재밌게 엮어놨다.

저자는 기자출신 배우 명로진씨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작품들에 출연했고, 처음 알았지만 다수의 저서도 집필한 작가였다. 현재는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도 하고 있다고 하니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받아 읽었다.

차례부터 눈을 휘감는다. 전국민이 재밌게 보았던 명 드라마들이 총망라 돼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사실 책 좀 읽는다고 소홀히 했던 드라마들도 간략하면서도 특징적으로 써머리 돼 있어서 너무 좋았다.

스물 다섯개의 챕터마다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귀여운 그림과 함께 적혀있고, 그 뒤에는 드라마에 대한 간략한 내용 설명이나 특별히 저자가 친분이 있는 연예인과의 짤막한 일화도 들어가 있다. 읽어보면 재밌다. 드라마 출연진들의 훈훈한 스토리는 귀감이 되기도 하고 몰랐던 모습을 알게 돼서 입덕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드라마들을 보니까 내가 본 것들은 본 것대로 추억이 되고 못 본 드라마는 찾아서 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아 안되는데 나 책 읽어야 하는데^^

또, 챕터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문제지만 불편해서 모른체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회적 이슈나 통념들을 드라마를 통해 소개하고 저자의 생각을 담아 논리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읽다보면 수려한 문장들과 위트있는 말하기 방식들에 매료돼서 자꾸만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읽을수록 재밌다.

중간에 들어가 있는 그림들도 예뻤다. 하루에 한 꼭지씩 읽어둬도 So Good!!

세상을 살다보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관계 속에 빚어지는 온갖 문제 상황들에게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혼자 진지하자니 인생이 너무 고달프고 기피만 하기엔 또 내가 너무 못났다. 그럴 때 드라마나 영화처럼 허구의 것들로 문제를 바라보면 좀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돼서 행동으로 옮기는 좋은 습관이 생길 수도 있고. 사실 드라마는 보는데 책은 안 읽는 사람도 많고, 책은 읽는데 드라마는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이 책이 충분히 줄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직접 겪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남의 경험을 보고 배우고 산다. 미디어와 인쇄물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동백어 필 무렵] 같은 에세이가 감당할 것이다. 다만 언어생활에 관한 책이므로 저자도 단어 선택에 유의를 해줬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지잡대' 같은 언어는 조금 불편했다. 그럼에도 아이디어가 빛났다. 이런 류의 책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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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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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유전강화길아르테


서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은 함께 경험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p.17


이 책은 구성이 특이하고 좀 어렵다.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게 무슨 소리지 싶을 수 있다. 이해한바로는 해인마을이라는 깡시골에 사는 두 소녀가 대학에 안정적으로 붙기위해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어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민영과 진영은 모두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어한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서는 단 한명만 내보내준다. ) 그래서 서로 글을 지어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누구 글이 좋은지 판가름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리고 끼어드는 스토리들은 다양히다. 교통사고가 난 여자이야기, 옹주로 태어난 여자의 일생이야기,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 가난하고 무능한 남편과 결혼해 힘들게 살아온 여자이야기 등.


누구의 이야기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민영의 이야기고, 진영의 이야긴지 알지 못하겠다. 복잡하고 지난한 꿈을 여러편 연달아 꾼 기분이다. 잦은 변주 속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숨이 너무 짧아서 속상했다. 더 깊이 빠지고 싶은데 맛만 봤다고 할까? 그러나 썰매를 탄 것처럼 쭉쭉 미끄러져갔다. 더 읽고 싶었다. 손안에 잡은 책장이 수시로 넘어가는 건 비단 책이 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도서 설명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감정의 기록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겪은 수치심, 모멸, 행복, 고통, 괴로움, 궁금함, 열병, 배신, 치욕 등의 감정들이 고밀도로 들어차 있는데 기록하지 못해서 변비처럼 꽉 들어차 상처로 발현돼 있다. 강화길의 소설은 다르다. 여자들의 삶이 문자로 기록돼 '너도 그러니? , 나도 그렇다.' 하고 있다. 무거운 이야기지만 덜외로운, 그러니까 결코 혼자가 아닌 이야기들이 묵직하게 담겨있다. 누가 '작은 책' 이라고 했을까.


누군가는 불쌍하다는 말을 쉽게 했고,

또 누군가는 삶이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가능한 아프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 좋았다.

우리는 시련이 삶을 더 단단하게 해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p.88


소설은 숙명처럼 삶을 비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여성의 유대와 연대를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교감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의지와 운명을 말하고자 했을까. 모두 다 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양한 인생을 만나며 내 삶을 정돈하고 정립해 보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며, 소설로 만났기에 물리적 흉터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화길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서 불쑥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은 내겐 이 소설이 첫소설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호스]도 사두고 못 읽었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이 책이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벼운 책 무겁게 잘 읽었다.




아르테 출판사에서는 한국 소설선을 '작은책' 시리즈로 함께 하고 있다. 이미 7권의 작은 책이 출간됐고, 강화길의 책은 여덟번째다.

작은책 시리즈는 인간성을 탐구하고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라고 본다. 그래서 더 많은 소설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 작은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소설들은 책을 사랑하는 셀럽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다. 특별히 [다정한 유전]은 색깔있는 배우 이유영이 낭독을 해 화제를 낳고 있다. 감상을 원하는 독자는 <팟빵>, <밀리의 서재>,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소리책으로 함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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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내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야생에 대하여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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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김산하 갈라파고스


평소에 생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을 좋아한다. 몇 번의 생태수업을 듣고나서였을까? 처음 이 책을 생태학자가 썼다는 설명을 보는 순간, '이 책은 내가 읽어야 함.' 하고 선뜻 선택했다.

저자 김산하는 서울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를 졸업해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바긴팔원숭이를 연구한 영장류학자다. 늘 말하지만 과학자가 글 잘 쓰는 것은 반칙인데 예술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췄다는 책날개의 설명대로였다.

이 책은 생태학자가 사회학자처럼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연과 비교해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서다. 저자는 인간사회가 당면한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동물과 식물에서 찾는다.

저자는 코로나19가 우리가 생태를 함부로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단히 공감하는 바이다. 이런 물리적인 것 말고도 동물들의 삶과 사람의 삶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공존의 의미를 피력하고 있다. 읽어보니 술술 넘어가고 재미있다.

우리가 흔히 잠을 잔다는 행위를 나태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잠이야말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대단히 평화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동물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삶의 무대는 현재이니 지금에 집중하자고도 말한다.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일이다. 모든 존재의 기본은 '다름' (p.73) 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게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외롭지않자고 다 똑같은 틀에 넣는다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흑백논리는 더 문제가 있다. 저자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한다.

우리는 이제 호흡이 안전하지 못하다. 코로나 이전에도 황사, 미세먼지 할 것없이 인간의 호흡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식물은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만 번성할 수 있다. 식물에게 호흡은 생장과 발전의 원동력이다.

동물은 삶의 우회로를 걷지도 않고 먹고 사는 일을 위해 그 무엇도 미루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공간은 자유가 허락되는 곳이다. (p. 195) 쉼이 필요할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등등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환경을 예로 들기도 하고, 비교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한다. 바라보는 눈이 부단히 논리적이고, 휴머니즘적이다. 관찰력이 좋은데다가 사회구조 자체에 관심이 많고 해답을 자연으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 반응한다는 점을 필두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보다는 실천에 주력하자고도 말한다.

지나친 스마트폰의 폐혜, 환경오염, 이분된 극단, 무분별한 유행 등을 지양하고, 특히 어린이들의 사라지는 놀이문화를 안타까워한다. 엄마로서 상당히 동의하며 반가운 시각이기도 했다. 손가락 하트도 싫어하는데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웃겼다. 아마 무분별한 사랑의 남발보다는 진정한 배려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는 것 같다.

저자의 자세는 전인류적으로 좋은 자세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그렇다고 미래를 염세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은 읽고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과학이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존재들의 고유함도 열심히 이야기 해준다. 솔직히 처음에는 완전한 생태학인줄 알았다가 좀 더 사회학적인 것을 보고 실망했더랬다. 하지만 다 읽고나니 이런 이야기들도 좋더라 생각하며 괜찮은 문장들에 줄을 박박 그었다.

만나서 참 다행이다. 소확행 같은 책!


원래 자연에 '길' 이란 없다.

코끼리가 지나 간 곳이 잠시 길처럼 되는 것이지

이미 난 길을 코끼리가 걷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길 위에서는 많은 문제가 양산된다.

자연에는 통과만을 위한 공간은 없기에

자연에 사는 이들은 인간이 만든 길 위에서

당황하는 것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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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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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나왔다길래 너무 놀라서 겟 했다! 오마이갓! 그런데 소설이 아니었다니!!!!! 옴마, 소설가 양반 이게 무슨 일인가요??

우선 이 책은 표지가 넘넘 근사하다.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겉표지를 벗기면 속표지가 나오는데 그때야 비로소 주인공 사무엘 포치의 그림이 등장한다. 마치 그림이 액자 속에 넣어져 있는 기분이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 그림이 끝이 아니었다. 이 그림은 원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전에 다산북스 블로그에서 표지 투표가 있었는데 다른 표지가 골라졌으면 어쩔뻔했을까. 표지의 정성에 감복한 나로서는 이 표지 이외의 표지는 과감히 거부한다!!! (내가 뭐라고 ㅎㅎ)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Red Coat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정영목 옮김 /다산북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어느 날 그림 하나를 보게 된다. 그것은 벨에포크 시대, 그러니까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서유럽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p.13) 때 활동하던 의사 사무엘 포치의 초상화였다. 존 싱어 사전트라는 화가가 그린 이 그림은 줄리언 반스를 사무엘 포치 찾기 프로젝트에 임하게 만들었다. 실내 가운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잠옷이 아닌 이 빨간 로브를 입은 사내의 어떤 점이 그렇게 궁금했을까. (잘생기긴 했다)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이 작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는 많다. 내가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 그랬다. 줄리언 반스처럼 소설가가 그림이 트리거가 돼서 이야기가 아닌 예술 에세이를 펴내는 것은 드물지만 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도 꼼꼼하게? 좀 놀라웠다.

줄리언 반스는 닥터 포치의 놀라운 일생과 그의 인간성을 말하기 위해 클로드 방데르 푸텐이 쓴 '포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벨에포크 시대 활동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포치의 일생을 더듬어 나간다. 대단히 흥미로운 얼개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어려웠다. 아는 작가들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좀 더 집중이 됐지만 잘 모르는 작가가 나올 때는 좀 어지럽기도 했다. (나의 이해의 문제인지 번역의 어려움인지는 조금 모르겠다)

닥터 포치는 지방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1864년 의학을 공부하러 파리에 왔다. 그는 실력 있는 의사로 성장했다. 의사이면서 작가의 길에 입문했고, 의업과 저술을 겸업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작가들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단연 으뜸은 (흥미의 면에서) 오스카 와일드였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가 게이라는 사실을 사실상 처음 알았다. (유명한 사실인데 내가 관심이 없었는지) 재판까지 갔었다고 하니 시대상에 비춰봐서는 불운했을 것 같다. 또, 귀족 몽테스키우가 나오는데 그는 포치와 여행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베르나르라는 여배우는 당시 스타였는데 포치랑 사귀었다. 그 여자 사진도 있는데 너무 예뻤다. (물론 나중에 결혼은 테레즈라는 젊고 예쁘고 부유한 여자랑 한다^^;;그리고 여성 편력은 또 어마어마했다. 딸이 빈정거릴 정도;;)

설마 이런 것 때문에 줄리언 반스가 그를 이토록 탐구했을 리는 없고 대체 무엇 때문일까?

당시 유럽 사회는 '아름다운 시절' (벨에포크)이라고 불렸지만 사실은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부패한 시기였다. 상류사회의 생활은 오페라 하우스와 레스토랑으로 이루어진 세계(p.44) 일지 몰라도 무정부주의가 횡행하는 등 안정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냥 미(美)만 탐구하는 유미주의일까, 아니면 사회를 비추고 억압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앙가주망일까.

소설을 좋아하는 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읽고 싶은 소설이 늘어났는데 사무엘 포치의 딸 카트린 포치가 쓴 [아그네스] 와 아직도 읽어보지 못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설명에 의하면 다소 충격적인 [거꾸로]라는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 안에 엄청나게 많이 언급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어보진 않았지만 횟수가 상당하다)

또 '모델소설'이라는 장르는 아니지만 분류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패러디라고 해야 할까, 오마주라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참고용? 아무튼 그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가 많은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는 시각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제일 읽고 싶은 소설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지식백과에는 위스망스의 소설은 [역로] 라고 번역돼 있다. 아무곳에서도 팔지는 않고 채만식의 동명의 소설이 존재한다)

또, 얼마 전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디스 워튼의 소설 두 개와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를 사두었는데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미리 읽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다. (몽키스테우가 푸르스트의 소설을 반밖에 못읽고 죽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하나;;)

에밀 졸라의 소설도 몇 번 언급되는데 왜 맨 뒤에 주요 등장인물에는 등장하지 않는지 (아마 직접 등장하지 않아서?) 궁금했다.

포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인데다가 평민이면서도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과학탐구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여성편력을 지녔으며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줄리언 반스는 그의 자율성을 매력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여성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튼 줄리언 반스는 이야기 꾼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이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소설같이 느껴지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었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다.

어쩌면 스스로는 안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예술 에세이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 기회에 읽게 된 게 너무 다행이고 기쁜 일이었다. 소설가가 말하는 예술에 관하여, 시대상에 대하여, 그가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소설보다 좀 더 섬세하게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중 관련된 한 사람의 이야기로 소설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줄리언 반스가 책에서 알아내지 못했으나 궁금했던 것에 대해 죽 나열해 두었는데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그러면서 저자가 말하길, 이 모든 질문은 소설에서 답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두었다. 몇 년 안에 벨에포크 시대의 소설이 하나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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