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1918 - 역사상 최악의 의학적 홀로코스트, 스페인 독감의 목격자들
캐서린 아놀드 지음, 서경의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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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국 요크셔 지방의 교회 묘지가 파헤쳐졌다. [비밀의 화원] 속 아름다운 요크셔 지방을 생각했건만 이게 무슨 일이람?

알고보니 100년전에 유럽전역과 미국을 휩쓸고 간 엄청난 전염병 이른바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한 마크사이크스경의 시신을 발굴하기 위함이다. 시신은 그 당시 망자의 엄청난 신분을 자랑하듯 납으로 만든 관에 안치돼 있었다.

(나는 당시 영국 귀족의 관이 이렇게 생겼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처음 알았다)

시신을 발굴한 이유는 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납으로 만든 관이 그의 유해가 완전히 썩는 것을 지연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었으면 이 질병이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스페인 독감의 기원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고 아직 논쟁 중이다. 혹자는 프랑스 전쟁터에서 발병했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동물 독감에서 변이된 것이라고도 말한다. 또 중국에서 발생한 림프절선 페스트인데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지원하기 위해 차출된 병사 중에서 바이러스를 달고 왔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다.

이 책은 이 독감에 걸렸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이나 또 죽은 자의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구한 것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실상 좀 쉬운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고는 외출하기 힘든 팬데믹 시대에 출간된만큼 읽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선택했다.

2020년 9월 29일 낮 두시까지 집계된 바로는 (네이버 기준) 3천 3백만명이상이 코로나에 확진되었으며, 백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은 1억명이다.100년전 추산인원이니 집계되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팬데믹 시대이긴 하지만 상당히 약해보인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는 점과 의학과 보건이 지금보다 많이 낙후된 점으로 미뤄봤을 때 똑같이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 역시도 팬데믹 시대의 희생자이며 아직 존속하는 바이러스가 하루빨리 퇴치돼야만 코로나 팬데믹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흥미롭다. 스페인 독감이 코로나와 아주 똑같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둘 다 호흡기 질환인데다가 이동경로와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것은 비슷하다. 스페인 독감의 증상은 발열과 호흡곤란, 청색증 등이고, 코로나는 발열, 인후통, 폐 손상 등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책에는 꽤 많은 사진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심지어 고양이까지 마스크를 씌우고 찍은 가족사진도 보았다.

그런데 책에 의하면 그 당시 마스크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의 방역수칙은 마스크와 손씻기,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않기인데 당시는 수도시설도 좋지 않았을 거고, 전쟁 중이니 병원이나 군함 같은 곳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기' 자체가 불가능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전쟁 중에 군사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교통편이 무시로 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까지 퍼지지 않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다가 지금처럼 진단키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마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몰랐을 게 분명하다. 또, 언론이 미치는 영향력도 약했을 것 같다. 지금이야 도서 산간 지역까지 다 소식을 들을 수 있지만 당시는 불가능했을테니까. 바이러스 자체를 대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100년전 팬데믹을 반면교사 삼으라고 한다. 물론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다만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전염의 시대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질병을 조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은 변함 없다.

이 책은 사진과 여러가지 사례들을 적절하게 이용해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고, 사실을 전달해줌으로 독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조달한다.

나 역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에서 발견한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분노의 포도]를 쓴 존스타인벡도 어릴 때 스페인 독감에 걸렸었다고 한다. 그러나 운 좋게 회복했고, [분노의 포도]를 집필 할 때 질병과 싸워 이긴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마하트마 간디도 스페인독감으로 죽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살바도르 달리는 독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이 밖에 유명 정치인이나 학자들도 대거 감염돼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지난한 투병 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다 조사하고 기록에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마스크 없이 밖에 나가지 못한지 벌써 9개월째를 맞고 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유행병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받게 하고 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반목하고 혐오하기도 하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불신을 키우며, 국가는 그것을 잠식시키고자 분별없이 세금을 사용하고 있다. 일회용 마스크의 보급과 사용으로 환경오염은 심각 이상의 단계에 돌입했다. 바이러스로 죽든지, 환경오염으로 지구에 종말이 올런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그냥 있다간 정말 큰일나겠다.

일각에서는 코로나같은 바이러스가 환경 파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한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100년전에 인류에게 침투해 추산 1억명이라는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스페인 독감은 절대로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전염병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팬데믹은 언제든지 도래할 수 있고, 바이러스는 자비없이 창궐할 수 있다. 그 기간을 지연시키거나 빈도수를 낮추는 방법 이외는 인간 멸종을 피할 길이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불편하더라도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 반드시 실천해야 하고, 아직 백신도 치료제도 개발되지 못한 지금, 조금 나아졌다고 경계를 늦추지말고 방역수칙 잘지켜서 이 시기를 지혜롭게 넘기기를 바랄뿐이다.

스페인 독감은 어마무시한 사상자를 남기고 물러갔다. 그러나 한세기도 지나지 못해서 또 조류독감이 창궐하였다. 책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길고 긴 여정의 독서였다. 긴만큼 마음이 무거워 더 힘들었다. 그렇지만 알게 된 게 많아서 참 좋았던 책이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이 스페인독감을 일으키고, 환경파괴라는 무지의 발로가 코로나를 일으켰다는 생각에 책임을 통감하며 이번 일도 반면교사로 삼아 또 슬기롭게 팬데믹을 헤쳐나가는 인류가 되길 바라며 책에 대한 소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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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 모임에 간다 - 북클럽 운영자의 기쁨과 슬픔
김민영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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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되어서도 책 모임을 할 수 있다면,
지금 책 친구들과 그때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새로운 책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작가는 15년동안 진행했다지만 내 북클럽 운영자의 역사는 7-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나는 정말 우연히 리더가 되었다. 다들 처음 모인 자리에서 운영진을 뽑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총무가 됐다. 진행은 회장님이 했는데 일이 바빠 공석이 잦자 내가 진행을 맡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그 독서모임은 함께 하지 않지만 다른 독서모임은 또 맡아서 하고 있다. 에피소드로 칠라하면 이 책 못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전문 운영자는 아니기 때문에 뭐랄까 이 책에 나오는 방식과는 좀 달랐다.


우선 작가는 엄청나게 많은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업이라고 했으니 페이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있는 지역 독서모임으로 따지면 '멘토' 같은 개념이다. (나는 주로 시립 도서관 소속인데 도서관에서는 신생 독서모임을 위해 멘토를 파견해주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독서모임을 운영할 때 자기 이야기는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진행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나는 멘토도 하나의 회원처럼 자기의 느낌을 곁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안되겠지만 너무 진행만 하는 운영자는 마음을 완전히 터놓기가 힘들 것 같다. 그 모임을 참석해 본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고.


또, 저자가 진행하는 모임은 영원하지가 않다. ㅎㅎ 자세히 설명은 안돼 있지만 아마도 기간을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 중에 예술에 관련된 서적을 읽는 딱 여섯 번의 모임을 한 적이 있다. 끝날 때는 얼마나 아쉽던지. 좋았던만큼 너무 아쉬웠다. 그런데 내가 진행하는 모임은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끝을 기약하지 않는다. 물론 운영하지는 않지만 함께 하는 모임 중에는 한시적인 것도 있다. 어느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이 사람을 이어준다는 말에는 강력하게 동의한다.


또 이 책을 보면서 약속취소는 절대로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코로나 때문에 모임이 취소되기도 하고, 간혹가다가 사람들이 더 많이 오게 하기 위해 중간에 약속된 날짜를 바꾸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저자의 경험처럼 모든 사람이 바꾸는 것에 찬성한 게 아니라면 (실제로 그랬다고 해도 신중히) 절대로 바꿔서는 안되는 게 날짜인 것 같다. 운영자의 욕심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태도가 중요하다 (p.47)는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이 책이 독서모임에 관한 이야기들이니만큼 공감되는게 너무 많았다. 배운 것도 많다. 1-5점까지 평점을 매겨보는 것이라든가, 명문장 따라쓰기나, 서평 첨삭 모임 등 글과 관련된 모임을 진행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진행이 아니더라도 저런 모임이 우리 지방에 있다면 꼭 참여해보고 싶다.

이 책을 읽다보니 저자가 북클럽에서 다뤘다는 책이 몽땅 다 읽고 싶어졌다. 오우. 너무 많았다. ㅎㅎ 15년이니 오죽하겠는가. 그 중에서도 저자가 가장 많이 다루었던 책은 서머싯몸의 [달과 6펜스]다. 나도 이 책으로만 세 번의 모임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책이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알지만 완전 인생책이라고 하니 멋졌다. 그리고 내가 항상 인생책 중에 하나로 뽑는 성석제의 [투명인간] 역시 자주 다룬다고 하니 뭔가 반가웠다. 좋은 책 많이 소개받았다. 더러는 품절도서라 사지 못했다. 그래도 몇 권은 사두었다. 언젠가 우리 북클럽 회원들과 나눠보고 싶어서다. 그리고나서 이 책을 다시 살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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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 모임에 간다 - 북클럽 운영자의 기쁨과 슬픔
김민영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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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운영자로서 완전 핵공감이었고 배울점도 많았습니다 진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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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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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 권재술 / 특별한서재


김연수 작가의 글쓰기 스킬에 관한 책을 읽는데 글잘쓰는 작가로 김상욱 박사를 뽑아서 놀랐다.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을 거기서 추천받아서 구매해 두었다. 아직은 읽지 못했지만. (뭐 언젠가 읽을것이다.)

사실 알쓸신잡 보면서 김상욱 박사의 말하기에 매료가 되었기 때문에 간간이 만나는 그의 추천도서는 모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이 내게로 왔고 읽게 됐는데 이럴수가!

이 책은 마흔 아홉개의 과학적 정보와 오십 개 가량의 시가 들어가 있다. 솔직히 시는 여간 잘써서야 잘썼다고 생각이들지 화자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으면 몰라도 함의를 찾아내서까지 감동하기란 대체로 어렵다. 그러므로 잘 모르는 사람이 '시를 쓴다' 라고 말하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 책이 원래 시집이라는 걸 알았다한들 역시 엄청 기대하지는 않았을거다. 어? 그런데 이상하네. 여기 수록된 시들은 꽤 읽어볼만 하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춤추는 원자, 이산가족 상봉이 마치 지구인과 외계인의 만남인 것처럼 표현한 기발함 (뭐 이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가 어딘지는 몰라도 그 곳에서 옴짝달싹 못한다는 돌멩이들은 그냥 희한하게 마음이 갔다.

아내가 문득 낯설다는 화자. 그것은 아내와 화자가 낯선 차원에 살기 때문인데. 우리의 눈은 소위 1차원에 머무르는 반면, 3차원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키야, 마음에 드는데 이 시집, 아니 에세이집, 아니 과학서?!!

상대성 이론을 모르면 오해를 하라는 말은 재밌다.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는 세상도 있지만 너무 커서 볼 수 없는 세상도 있다. 그것이 바로 우주다. 우리는 모두 우주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더 신비롭고, 거룩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범인들이 모두 안다고 잘난척 하며 산다. 이 책을 읽다보니 삶에 대해서 엄청 생각해보게 된다.

10명이 읽으면 10명에게 모두 다르게 읽힐만한 책이다. 물리학의 여러가지 신비를 통해 우리도 시인이 될 수 있다.

혹자는 나처럼 이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에세이 부분이야 뭐 지식적인 측면이 크니까 정재승의 [열두발자국]을 읽듯이 (사실 그 책 보다는 이 책이 좀 더 쉽다)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시 부분은 너무 억지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참신한 책이었다. 그렇지만 때론 부딪치는 내용도 있었다.

엔트로피가 무질서를 말하는 용어인데 비유적 표현으로 분배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부의 창출이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고 말했다. 분배가 평등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것이 경제적으로 무질서 하다고 말하면 불편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또 있었다. 분자들이 여관방에 들어가듯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는 표현에서 인간들은 고급 여관인 비싼 호텔에 들어갈 때 돈과 신분이 높아야 한다고 말했다. 음.... 내가 까탈스러운걸까? ;;

하지만 시집을 읽고 모든 시가 마음에 들지는 않듯이 이 시집에도 마음에 들어오는 분야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시를 내가 한 번 적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이 오니까.

암튼 여러가지로 흥미로웠던 책 [우주를 만지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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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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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추리작가이자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대가라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몰랐다. 레이먼드 카버 때문에 이름만 들어본 듯(?)
하긴 코넌 도일도 이름만 알 뿐인 내게 이 작가가 아무리 추리 거장인들 알았을 쏘냐.
느와르적이면서도 수컷냄새가 강하게 나는 이런 류의 소설을 하드보일드라고 하나? 싶었는데 그래도 모르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검색해 보았다.

하드보일드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기법으로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혹은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자제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헤밍웨이도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니. 이럴수가!

그래서 이 소설이 나한테 그렇게 불편했구나!!
사람이 죽었고, 그 일에 한 탐정이 연루 돼 있고, 경찰들은 무례하고, 그 탐정은 더 무례하다. 깡패가 등장해 좌지우지 하고, 돈 많은 것들은 배려나 도덕심이 없다. 하인들도 방자하기 이를데 없고. 여성비하 발언도 숨기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도 버금가라면 서럽다. 하나의 문학사조이자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하니 약간은 이해가 갔다. 이해해 보도록 하자. ㅎㅎ

사설 탐정 필립말로는 술을 마시러 갔다가 우연히 테리 레녹스라는 남자랑 친해진다. 대기업의 사위인데 부인에게 이혼당했다가 다시 합쳤다. 두번밖에 안 만났는데 테리는 말로를 의지하고 말로도 엄청 잘해준다. 그러던 어느날 테리가 말로에게 아내가 죽었다며 권총 한자루를 가지고 찾아온다. 말로는 그가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대로 공항에 태워다주고 해외로 도피할 수 있게 돕는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쳤고, 그는 유력한 용의자 내지는 그의 범죄를 은닉해준 공범으로 몰린다. 그러나 묵비권을 선언하고 감옥에 갇힌다.

나는 좀 답답했다. 경찰이 먼저 무례하게 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깐족거려가지고 경찰에게 붙잡힐 이유가 있나. 감옥에 간다고 친구가 구명되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공항에 데려다줬다고만 말하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면 그만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석방된다. 이유는 강력한 용의자인 테리 레녹스가 멕시코에서 권총자살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말로는 석방됐지만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아일린 웨이드라는 여자의 의뢰를 받는다. 그녀의 남편은 유명작가인데 알콜중독자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서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말로는 우여곡절 끝에 로저웨이드를 찾아내지만 그들 부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그리고 그들과 얽히고 섥히고 진실에 점점 다가가는 내용이다.

예상하지 못한 결말은 아니었다. 추리 매니아라면 이미 답을 맞췄을 수도 있고, 순진한 독자면 결말에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사실 결말을 이야기하기까지 중간 내용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 가운데서 나는 이 소설의 매력을 발견했다, 촘촘하게 짜여진 스토리를 떠받드는 하나의 문장들은 읽을수록 맛깔났다. 무라카미하루키가 이 소설을 열두번 이상 읽었다는데 아마 이 문장력을 배우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말로의 냉소를 품은 희화된 맞장구는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다. 탐정답게 거짓말에 상당한 후각을 지녔기 때문에 상대방을 궁지로 타다닥- 몰아갈 때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냉소적이다보니 아니면 너무 남성성을 강조하다보니 장면장면이 너무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읽을 때 중요한 사건이 지나가는데도 '응? 뭐야 죽은거야?' , '뭐지, 그래서 범인이 이 사람이란건가?' 같은 혼잣말을 해얄만큼 갑작스러웠다. 친절하게 설명은 안해주겠다는 강한 의지랄까? 이래서 하드보일드라고 하나 싶기도 하고. ㅎㅎㅎ

아무튼 재밌었다. 작가의 냉소적말투에 푹 빠졌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58년인가 쓰여졌는데 이 소설가가 미래사회를 전망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지금하고 너무 닮았어. 아니면 그때 미국경제가 이미 그랬는지?

다만 멕시코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과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간과하기 힘들었고 (그건 냉소가 아니라 저질 비하 같았다) 여성을 너무 소유물로 삼았다는 것 ('숫처녀 같이 안 생긴 얼굴'이라는 표현은 거의 경악!!)도 어쩔 수 없이 싫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이렇게 걸핏하면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다. 부유층 인사들은 물론이고, 그 죽은 작가는 거의 술통을 들이붓다시피 하고, 심지어 말로 조차도 매일 술을 물처럼 마시고, 모든 인연을 술집에서 술마시면서 만나니 표지에 술병이 즐비한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알고보니 당시 미국의 사회상이 주정뱅이가 없을 수가 없었다. 전후에 벼락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이 부유함을 주체하지 못해 술과 섹스, 도박에 빠져들었다는 말을 알고나니 완전히 이해가 됐다. 역시 문란과 광기의 시작은 가난에서 오는 게아니라 부유에서 오는 것이다. 넉넉함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오는 게 악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보았다.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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