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나긴 이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미국의 대표추리작가이자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대가라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몰랐다. 레이먼드 카버 때문에 이름만 들어본 듯(?)
하긴 코넌 도일도 이름만 알 뿐인 내게 이 작가가 아무리 추리 거장인들 알았을 쏘냐.
느와르적이면서도 수컷냄새가 강하게 나는 이런 류의 소설을 하드보일드라고 하나? 싶었는데 그래도 모르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검색해 보았다.
하드보일드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기법으로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혹은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자제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헤밍웨이도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니. 이럴수가!
그래서 이 소설이 나한테 그렇게 불편했구나!!
사람이 죽었고, 그 일에 한 탐정이 연루 돼 있고, 경찰들은 무례하고, 그 탐정은 더 무례하다. 깡패가 등장해 좌지우지 하고, 돈 많은 것들은 배려나 도덕심이 없다. 하인들도 방자하기 이를데 없고. 여성비하 발언도 숨기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도 버금가라면 서럽다. 하나의 문학사조이자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하니 약간은 이해가 갔다. 이해해 보도록 하자. ㅎㅎ
사설 탐정 필립말로는 술을 마시러 갔다가 우연히 테리 레녹스라는 남자랑 친해진다. 대기업의 사위인데 부인에게 이혼당했다가 다시 합쳤다. 두번밖에 안 만났는데 테리는 말로를 의지하고 말로도 엄청 잘해준다. 그러던 어느날 테리가 말로에게 아내가 죽었다며 권총 한자루를 가지고 찾아온다. 말로는 그가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대로 공항에 태워다주고 해외로 도피할 수 있게 돕는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쳤고, 그는 유력한 용의자 내지는 그의 범죄를 은닉해준 공범으로 몰린다. 그러나 묵비권을 선언하고 감옥에 갇힌다.
나는 좀 답답했다. 경찰이 먼저 무례하게 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깐족거려가지고 경찰에게 붙잡힐 이유가 있나. 감옥에 간다고 친구가 구명되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공항에 데려다줬다고만 말하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면 그만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석방된다. 이유는 강력한 용의자인 테리 레녹스가 멕시코에서 권총자살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말로는 석방됐지만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아일린 웨이드라는 여자의 의뢰를 받는다. 그녀의 남편은 유명작가인데 알콜중독자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서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말로는 우여곡절 끝에 로저웨이드를 찾아내지만 그들 부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그리고 그들과 얽히고 섥히고 진실에 점점 다가가는 내용이다.
예상하지 못한 결말은 아니었다. 추리 매니아라면 이미 답을 맞췄을 수도 있고, 순진한 독자면 결말에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사실 결말을 이야기하기까지 중간 내용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 가운데서 나는 이 소설의 매력을 발견했다, 촘촘하게 짜여진 스토리를 떠받드는 하나의 문장들은 읽을수록 맛깔났다. 무라카미하루키가 이 소설을 열두번 이상 읽었다는데 아마 이 문장력을 배우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말로의 냉소를 품은 희화된 맞장구는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다. 탐정답게 거짓말에 상당한 후각을 지녔기 때문에 상대방을 궁지로 타다닥- 몰아갈 때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냉소적이다보니 아니면 너무 남성성을 강조하다보니 장면장면이 너무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읽을 때 중요한 사건이 지나가는데도 '응? 뭐야 죽은거야?' , '뭐지, 그래서 범인이 이 사람이란건가?' 같은 혼잣말을 해얄만큼 갑작스러웠다. 친절하게 설명은 안해주겠다는 강한 의지랄까? 이래서 하드보일드라고 하나 싶기도 하고. ㅎㅎㅎ
아무튼 재밌었다. 작가의 냉소적말투에 푹 빠졌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58년인가 쓰여졌는데 이 소설가가 미래사회를 전망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지금하고 너무 닮았어. 아니면 그때 미국경제가 이미 그랬는지?
다만 멕시코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과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간과하기 힘들었고 (그건 냉소가 아니라 저질 비하 같았다) 여성을 너무 소유물로 삼았다는 것 ('숫처녀 같이 안 생긴 얼굴'이라는 표현은 거의 경악!!)도 어쩔 수 없이 싫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이렇게 걸핏하면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다. 부유층 인사들은 물론이고, 그 죽은 작가는 거의 술통을 들이붓다시피 하고, 심지어 말로 조차도 매일 술을 물처럼 마시고, 모든 인연을 술집에서 술마시면서 만나니 표지에 술병이 즐비한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알고보니 당시 미국의 사회상이 주정뱅이가 없을 수가 없었다. 전후에 벼락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이 부유함을 주체하지 못해 술과 섹스, 도박에 빠져들었다는 말을 알고나니 완전히 이해가 됐다. 역시 문란과 광기의 시작은 가난에서 오는 게아니라 부유에서 오는 것이다. 넉넉함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오는 게 악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보았다.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