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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토머스 핀천은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거장이다. 독창적인 메타포를 통해 소외 계층의 억압을 고발하는 그의 대표작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그 주제와 방법론에 있어서 소설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다. 특히 그는 그의 과학적 이력과 인문학적 박식함을 소설 속에 아낌없이 풀어 놓는다. 지성과 그만의 뚜렷한 스타일, 현대적 문제의식이 빛나는 이 작가의 소설은 그 자체로 현대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토머스 핀천의 단편 5편을 모은 책이다. 대학 시절과 신인 시절의 단편들이어서 '거장'이라 칭해지기 이전의 작품들이라 오히려 습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다. 그래서 이 책은 현대 문학의 거장의 오늘날과 그 거장을 탄생시킨 시발점이 된 초기 작품들 간의 거리 두기와 거리 좁히기를 반복하며 읽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책은 장황한 서문으로 시작한다. 서문에서 작가는 습작에 가까운 자신의 초기 작품을 다시 읽는 것에 대한 감회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 작품의 창작동기와 집필 과정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냉정한 비평과 부끄러운 심회도 감추지 않는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들 만큼이나 이 서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거장'이 회고하는 데뷔 시절의 집필 과정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이나 비평은 소설쓰기의 방법론을 실제적으로 제공해 준다. 이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줄 뿐 아니라 거장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의 빈 공간을 채워줌으로써 소설 읽기에 있어 보다 치밀한 시선을 갖게 한다.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시신인양 작업을 하는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 <이슬비>, 결혼 생활에 대한 남자의 소회를 그려낸 <로우 랜드>, 엔트로피 이론을 삶에 적용한 <엔트로피>,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전을 그린 <언더 더 로즈> 그리고 흑인과 백인의 융화를 그린 <은밀한 통합> 까지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한결같이 독창적인 소설속 환경과 독특한 메타포를 구가한다. 흡사 메트릭스의 세계와도 유사한 독자적인 환경은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작가의 꾸준한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설 작법의 미숙함에 대한 작가의 반성과는 별개로 이 작품들은 인간 삶에 대한 우회적 접근을 통한 의미 추구라는 소설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취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초를 알린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