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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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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가 순문학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것은 최근의 일도 아니고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작가들은 끊임 없이 상상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내보인다. 현실 세계의 사실적인 반영만을 가지고 인간 세계와 그 내면에 대해 그려 보이기에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방향성이 없는 자유롭고 능청스러운 상상력을 실험하는 경향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지는 것은 이런 이야기판의 포화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저항일 것이다. 더 이상 이단이니 실험적이니 하는 단어를 곁들이지 않고도 독특한 소설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만큼 소설의 정통성의 경계는 이미 많이 희미해져 있다. 때문에 벨기에의 젊은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독특한 소설집 <육식이야기>에서 펼쳐 보인 상상력의 세계에 입문하는데에는 거창한 심호흡이나 준비운동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 <육식이야기>가 장르문학적 판타지와 구별된다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순문학이란 단어를 쓴다.) 

<육식이야기>에 실린 14편의 기묘한 이야기들은 사고의 거침없는 확산으로 정리된다. 오렌지 껍질로 둘러싸인 육체를 가진 여인,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육체를 넘나드는 주교, 남이 자기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등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작품마다 등장한다. 이런 독특한 인물들은 또한 기름이 유출된 바다에서 희열을 느낀다든가, 거대한 식충 식물에 무한한 열정을 쏟아붓는다든가 하는 식의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상의 영역이 매우 독창적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즉, 현실의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채로 인간의 내면을 심오하게 파고들며 자유로운 상상을 펼친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성상의 방법 가운데 하나로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꾸준히 활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상상의 핵심이 되는 내화에 끊임없이 신빙성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현실 세계와 소통하는 자유로운 출구를 열어 둠으로써 상상력의 무한한 확장은 차단된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소설들은 이와 같이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의 주제를 파고들어 간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인력을 유지하는 힘은 작가의 지성에 있다. 작품 속 기괴한 상상의 세계는 철학, 과학, 예술과 같은 인류의 심오한 정신적 산물들을 통해 실현된다. 이런 까닭으로 이 책이 발칙하고 음흉한 외피를 쓰고 있음에도 진지하게 읽히는 것이다.  

이 소설집은 도덕과 상충되는 형태로서의 예술에 대한 절대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광기에 가까운 예술에의 집착을 보여주는 많은 인물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기름유출이라는 비극적인 사고를 눈 앞에 두고 "섬세한 취향을 지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도 황홀한 그 완벽한 끈적이는 검정 덩어리"라고 감탄할 수 있는 예술 지향주의적 태도가 바로 이 소설집 전체의 기반을 이룬다.    

책에는 기름 사고의 미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한 '기름 유출 사고 전문가 협회'의 존재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의 화룡점정을 위해 최후의 피와 뇌수를 유작 위에 뿌리는 화가, 거장의 창작 노트를 훔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펼치는 작가지망청년, 정체 불명의 생명체의 알을 예술 작품을 위한 캔버스로 활용하는 화가 등 기상천외한 예술가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작가는 이 예술가들을 묘사하면서 일체의 윤리적 성찰을 배제한다. 이런 예술 지향적인 작중 인물들의 특징은 고스란히 베르나르 키리니의 창작 태도와 이어진다. 오직 아름다움만이 최고이며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여기는 작가의 태도가 발칙한 상상력과 어우러져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야성적으로 팔딱거리게 한다.  

작가의 절대적인 예술 지향은 작품 속의 공허한 울림으로만 그치지 않고, 소설의 미학적 구조를 확고히 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드러난다. 열 네 편의 소설 작품 중에는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 '살인청부업자의 추억',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 등과 같이 서사적 골격을 포기한 채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단순 열거로 이루어진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탄탄한 구성이 밀도 있는 주제와 어우러져 완전한 미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열네 편의 소설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구축한다. 동일한 인물과 주제가 여러 작품 속에 반복되고 변주되는 가운데 그 세계는 뚜렷한 색깔로 각인된다. 30대 초반인 젊은 작가가 에드거 앨런 포나 보르헤스같은 거장에 감히 비견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 대한 완벽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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