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나의 발견 방법서설 나의 고전 읽기 6
김은주 지음, 이해정 그림, 르네 데카르트 원저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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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철학

스콜라 철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 이라는 뜻이다. 말 뜻대로 하자면,
18세기 칸트나 19세기 헤겔도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을 가르쳤던 셈이 되고, 오..
늘날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도 스콜라철학이 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철학을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공식적으로 가르친 건 언제일까? 딱잘라 말할 순 없지만, 대체로 9세기 기독교 세계를 통일한 카롤루스 대제 때부터라고 본다. 그는 제국의 팽창뿐만 아니라 내치에도 힘쓰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열었다. 그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또한 높은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던 카롤루스 대제는 제국에 통합된 여러 민족들 - 앞선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비해 문화적으로 미개했던 민족들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많은교회 부속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신학만을 연구하고 가르친 건 아니다. 이전까지 내려오는 풍부한 전통, 곧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을 흡수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따라서초기 스콜라 철학은 성서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나 로마 철학자의 저서를 문헌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형태를 띠었다.

 스콜라스티코스skolastikos‘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공부에 전념하는 자 라는 뜻이었지만, 이때부터는 가르치는 자‘ 라는 뜻으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가르치는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 불렀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자라고 하면 소르본, 옥스퍼드 등 중세 때 세워긴 유서 깊은 대학에서 연구하던 학자나 교수, 박사들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스콜라 철학 이라는 말은 정작 이 철학이 무엇인지에대해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셈이다. 사실 스콜라 철학은 다양한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어 정의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측면을 스콜라 철학의 핵심으로 본다. 우선 핵심 정신의 - P62

면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점, 그리고 수단의 면에서 아주 엄밀한 방법을 요구한다는 점,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것이 스콜라 철학의 성격을 알려주는 동시에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선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 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렇게 보면 말만 ‘조화‘일 뿐, 사실상 이 시기 철학은 없었던 셈 아니냐고 생각하기쉽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시각으로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능 학자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심지어 데카르트도 전문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여러 학문들이 전문적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과 철학이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물론 이 시기 대부분의 신학자가 곧 철학자이고 신학적 문제가 철학적 문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학과 철학은 엄연히 구별되었다. 사실 조화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둘이 서로 조화되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함축한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는 말은 이러한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여하간,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수 있는 범위의 것을 연구하며, 신학은 신이 내린 계시를 통해 이성의 파악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연구했던 만큼, 둘은 구별되었고 서로 갈등하면서도 서로를살찌우는 측면도 있었다.


두 번째로 방식의 측면에서 스콜라 철학은 흔히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논리,
심지어 궤변적일만큼 무익한 논리 싸움에 골몰했던 철학으로 간주된다. 오늘날스콜라적이다‘ 라고 하면 대체로 이런 뜻으로 통한다. 20세기 철학자 존 듀이는 스콜라 철학을 "아무런 목적도, 특별한 핵심도 없이, 형식적인 구별들을 양산하는 사고 양식" 으로 정의하면서, 그 특징을 과잉된 정교함과 정밀함이라고 - P63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역시 일면적일 수 있다. 사실 사변적이고 논리적으로 복잡한 걸로 치자면 헤겔 철학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헤겔 철학을이런 식으로 낙인찍진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규정에는, 스콜라철학의 내용 자체에 대한 반감이, 곧 신학에서 철학을 완전히 독립시킨 후대의 관점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군의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을 신학에 적용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원전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레스와, 천 년 이후 중세 한복판의 스콜라 철학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전승사를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나 이는 온전하게 후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우선 고대의 다른 많은 저작들처럼 기독교의 지배가 시작된 처음1세기 동안, 그의 글도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더구나 지금 전해지는 저작들도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60년,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300년이라는긴 시간이 지난 후 조각조각 떨어져 있던 글들을 로마인 안드로니코스가 자기나름대로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저작들의 운명은 그 이후에도 평탄치 않았다. 물론 스콜라 철학이 수립되던 시기부터 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는 삼단논법 같은 기술적 방법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 유럽 학자들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인 ‘오르가논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저작들이 유립 안에 없어서가 아니라,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 이 저작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라틴어는 유럽의 보편어였고 공부하는 - P65

박탈당했을까? 16세기 르네상스 이후부터 새로운 지식인 그룹이 생거나고 이들이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지적 권위를 갖기 시작할 때(이 책 1장을 참조하라,
스콜라 철학은 더 이상 과거의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것은 베이컨주의 과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의 등장과 더불어 죽어 갔고, 계몽주의 및 혁명의 시대인 18세기에 완전히 막을 내린다. 스콜라 철학이 완전히경멸과 비난의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르네상스 때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일이다. 

스콜라 철학은 신앙의 무게 아래 이성을 억압하면서 쓸모없는 현학적 논의만 일삼는 철학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18세기 프랑스 혁명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백과전서파들, 그리고 19세기 대철학자 헤겔은 스콜라철학에 대해 철학이 아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중세를 ‘암흑기‘ 로 보는시각도 이렇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점차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나스콜라 철학과 중세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증세는 그 자체로 암흑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무지로 인해 우리에게 암흑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극복하려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앞선 시대는 늘 오류와 무지로 점철된 시대이기 마련이다. 우리 역시 본문에서는 스콜라 철학을 이런 시각으로 보아왔다.
데카르트의 눈으로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시각 역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스콜라 철학자들 역시 신앙의 그늘아래에서 세계의 거대한 문제에 대해 사유했으며, 이 중 많은 문제들이 근대를지나 오늘날까지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래도 사람이 살고있었던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데카르트 철학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스콜라철학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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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눈보라 몰아치는 1619년 겨울 어느 날, 독일 황제의 대관식을 보러 프랑크푸르트로 여행 중이던 한 프랑스 청년이 악천후에 발이묶여 독일 울름의 한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된다. 세상은 전쟁으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창문을 두드려 대는 저 바깥의 매서운 눈보라, 하지만 여기, 이 난로 앞은 얼마나 평온한가. 청년은 눈 덮인 오두막
따뜻한 난롯불 앞에 앉아 사색인지 몽상인지 모를 상념에 잠겼다.
가끔씩 졸고 백일몽을 꾸기도 하면서,
우연히 얻게 된 모처럼의 평화, 아마도 지나온 삶의 모든 장면이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어쩌다 이 소란스런 전쟁의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되었을까?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적이 있는 것도, 전파해야 할 이념이 있는 것도, 지켜야 할 조국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용병으로 나서서 돈을 벌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그에겐 촉망받는 학자의 길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두 살 먹은 이 청년에겐 스승들이 기대했던 학자의 삶도,
- P17

아버지가 마련해 둔 법률가의 이력도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그도.
학문에 길이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삶에 요긴한 지식의 보고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학문을 채울 확실한 지식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경험에서 알게 된 지식들이 그랬다. 각인각색. 이런 지식들은 사람마다. 보는 위치마다 달라, 무엇이 진짜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이는 나무도 가까이서 보면 매우 크다. 심지어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속는 경우도 있다. 경험만 믿는다면필시 우리는 옛날 사람들처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그래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경험만큼 유용한것도 없다. 도처에 널려 있는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건 뭐니뭐니 해도 우리의 감각이다. 그러나 ‘진짜‘ 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사람한테 이는 큰 낭패다. 코페르니쿠스가 아무리 지구가 태양을중심으로 돈다고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해도, 우리 눈에는 늘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의 이론적 가설을 믿을 수 있을까? 설령 갈릴레이 같은 사람이 관찰 결과까지 들이 댄다 해도, 망원경을 우리 눈에 갖다 대 줘도, 이를 확인하려면 여하간 일단은 우리 눈에 상이 맺혀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본 것이든, 네가 본 것이든, 심지어 과학자가 본 것이든,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 P18

아리스토텔레스와 학문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인의 눈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학문 진보에 가장 큰걸림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tistoteles는 그들이 반대한 모든 것의 원조였다. 그러나 수천 년에 걸친 지식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으로 집약될 만큼, 그가 거대한 철학자였다는 것도 분명하다. 사실 오늘날까지 장장 2,400년에 걸쳐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서, 나아가 서구 문명 전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의였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립의 부름으로 차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될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여기엔 아마 이런 연줄 덕도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 유명하다. 물론, 스승을 비판하면서 스승과 겨룰 만한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세운 제자로도 유명하지만 말이다. 열여섯 살(혹은 열일곱 살)에 그는 아테네로 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장장 20년 동안 수학한다. 플라톤이 죽고 난 후에는 아카데미아를 나와 리케이온‘ 이라는 학원을따로 만들어 12년간 교육에 종사하며 독자적인 학파를 만들기도 한다. 아가테미아에서 그는 특히 독서광으로 통했는데, 이 때문에 스승 플라톤은 그를 읽는가 (우리말로 하면 ‘책벌레‘ 쯤 될 것이다)라 불렀다고 한다. 

전문화 시대인 오늘날의 눈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다양한 분야에 방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논리학과 형이상학, 나아가 자연학, 생물학, 정치학, 윤리학등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학문들의 시초에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난 후,
- P57

아테네에 반알렉산드로스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면서 불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튄다. 만주정을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제군주가 곱게보였을 리 없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스승이었고 이전에 다른 참주의 자문을 맡기도 했으니, 이러한 그의 정치적 경력은 불경죄의빌미가 된다. 인간을 신격화하여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테네에 남아 그대로 사형을 감수한 소크라테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떠난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 예순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삶의 이력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는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사형을 당했든 도망을 갔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일과는 무관하다. 소크라테스가 문자 이전 시대의 철학자로서 삶 자체로 지혜를깨우쳐 준 성인으로 기억된다면, 그의 제자 플라톤이 구술 시대와 문자 시대의 중간에서 온갖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 철학자로 기억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자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료들을 모으고 조직하고 체계화한 일종의 이론가로 기억된다.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자쯤 될까? 그런데문자 시대의 이 해박한 이론가가 온갖 분야를 건드리면서 방대한 양의 글을 쓴이상, 그 사상의 진면목을 알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근대인들의학문적 이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대목만 짚어 보기로 하자.
이론가가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잡다하게 흩어져 있거나 뒤섞여 있는 것을 펼쳐 놓고 나누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들을 탐구했을 뿐 아니라, 학문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었다. 그는 학문을크게 이론학(테오리아 theoria: 신학, 수학, 자연학)과 실천학(프락시스praxis: 윤리학, 정치학), 그리고 제작학(포이에시스 poiesis: 예술 작품을 비롯해 생산과 관련된 - P58

것으로 나누었다. 이 그리스 말들은 우리에게도 꽤 익숙하다. 영어의 theory‘,
 practice‘, poetry‘ 는 각각 이 말들에서 왔다. 시를 비롯한 예술 작품이 포함된 것은 좀 낯설지만, 제작학‘ 은 실용 학문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결국 오늘날의 학문 분류도 큰 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있는 셈이다.


그런데 분류의 기준을 살펴보기 전에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이 분류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논리학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학문분류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논리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걸까? 그렇다. 논리학은 하나의 학문‘ 이라기보다는 모든 학문의 ‘도구‘, 즉 ‘오르가논 Organomi이다. 그러나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근대인 베이컨이 『새로운 오르가논Nouvum Organumi, 즉 ‘새로운 도구‘ 라는 제목의 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도전장을 던진 이유도 이 ‘도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몰라도 ‘인간은 이성적 동물‘ 이라는 말만은 누구든 알 것이다. 그런데, 이성reason‘ 이라는 말의 어원인 ‘로고스 logos 는 그리스어로말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본래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말 에서 어떻게 ‘이성‘ 으로 건너뛸 수 있을까? 말에 사고의 질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고의 질서란 추론의 질서이며, 추론의 질서가 곧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말 에 주목했다. 그리고 말을 말이 되게 해 주는 것을 체계화했다. 곧 말을 일관되고 효과적이게만들어 주는 필수 규칙들을 만들고,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구조화하는 범주들을나누었다. 그리고 이 규칙과 범주들을 가지고 자연을 탐구했다. 따라서 논리의토대를 닦았다는 점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주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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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문 분류의 기준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 영역을 크게 읽의 목적에 따라 구분했다. 우선 이론학의 목적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신도, 도형도 자연물의 원리도, 그걸로 뭘 어떻게 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반대로, 실천학과 제작학의 목적은있는 것을 변형하기‘ 이다. 어떻게 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다시어떻게 나누어질까? 역시 변형의 목적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실천학은 행위자자신의 변형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제작학은 행위자 바깥에 있는 다른 것을 변형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윤리학은 나를 좀 더 유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수사학은 멋진 웅변으로 남을 감화하기 위한 것이다.
더 주목할 것은 이론학 내에 포함된 학문들을 분류하는 기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대상의 특수성에 따라 나누었다. 가령, 선이나 면 같은 추상물을다루는 수학은 자연물의 원리를 다루는 자연학과는 다르다. 나아가, 양을 다루는 수학 안에서도 불연속량인 수를 다루는 산술학과, 연속랑인 선 · 면 · 부피등을 다루는 기하학은 다르다. 자연학도유와 종에 따라 나뉜다. 각각의 유와 종이 다른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만큼, 이 각각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도 다르다.
가령 동물의 삶의 목적과 식물의 삶의 목적이 다른 만큼 동물학과 식물학도 다르다.
.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분류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대상의특수성을 강조하는 한, 각각의 학문은 다른 원리, 다른 방법, 다른 목적에 따라탐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니아가 학문들은 결코 서로 소통하거나 합쳐질 수없다. 그러니 결국 통일된 체계를 수립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처럼 각학문이 각기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학문의 도구인 ‘오르가논‘은 - P60

극히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인이 맞섰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학문 체계이다. 근대인들의 학문 이상은 바로 ‘보편학 Mathesis Universalis 이었다. 즉 모든 학문을 대상에 따라 나누는 대신 동질화하여 보편적인 체계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통합의 열쇠가 바로 ‘방법‘ 이었다. 단, 이는 더 이상 형식적인 논리 규칙이 아니라 모든 학문을 탐구하는 실질적인 방법이어야 했다. 이 방법 을 가지고 모든학문을 하나의 나무 모양으로 통합하려 한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는 바로이러한 보편학의 이상을 대표한다 (3장과 연결해 보라)..
참고로 위의 분류에 따라, 오늘날 전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소개해 두자. 우선, 말과 생각의 도구인 ‘오르가논 에 해당하는 논리학적 저작이 있다. 범주론』, 『해석론』, 『분석론, 전서와 후서, 변증론, 『소피스트적 논박 등이 그것이다. 이론학적 저작으로는 『자연학』, 『형이상학』, 『영혼론, 등이 전해지며, 실천학적 저작으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등이 있다. 그리고제작학적 저작으로는 수사학과 문학적 저작인 『시학이 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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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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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삶의 의미와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 P176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두번째와 세번째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번째 방법은 어떤 것 -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 P184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 P215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샬롯 뷜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공부하는 것뿐이다.
- P229

세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있다.  - P231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막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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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26장에서 시적 효과 면에서 비극이

서사시보다 더 우수한 예술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비극은 조사. 성격. 사상. 플롯 등 서사시가 가진 모든 것

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음악과 장경을 가지는데, 그 중

음악은 드라마의 쾌감을 생생하게 산출하며, 비극적 모방은 서

사시보다 더 짧은 시간에 시적 효과를 산출하는데 압축된 효과

는 분산된 효과보다 더 쾌감을 주며, 한 편의 서사시에서 여러

편의 비극이 만들어진 것으로 미루어 비극이 서사시보다 통일

성이 강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신들과 자연보다는 인간 자신을

탐구 대상으로 삼던 시대정신에 따라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끊

임없이 재해석하고 정교화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했

. 그리스 비극은 이러한 진지하고 치열한 종교적 성찰의 열매

였으며,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박한 문제 제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인간 정신이 쌓은 위대한 업적이

라 할 만하다.


앗티케의 고전 문화는 페르시아 전쟁과 더불어 꽃피

기 시작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더불어 꽃이 지기 시작한다.

페르시아전쟁(기원전490~480)은 솔론의 개혁,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적극적인 상공 및 문예진흥

책 클레이테네스의 미주화 등을 통해 아테나이

가 축적해온 내적인 힘에 분출구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불모

지나 다름없던 아테나이는 지적, 예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

고 또 그들 나름의 민주주의를 완성하여 이른바 그리스 중의

그리스 또는 그리스의 학교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라 불리며 기교면에서도 대가의 반열

에 오른 소포클레스는 기원전497/6년 아테나이 근교 콜로노스

에서 부유한 무기 제조업자 소필로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이스퀼로스가 전사로 참전한 사실을

자신의 묘비명에 새기게 할 만큼 자랑스럽게 여겼던 마라톤 전투

때 소포클레스는 6,7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러난 10년 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동맹군이 승리를 거

두었을 때, 소포클레스는 소년합장단의 선창자로 신

에게 전쟁의 승리를 감사드리는 찬신가를 선창한다. 소포클레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5세기, 그 중에서도 특히 살라미스

해전이 패퇴한 기원전479년부터 결국 그리스를 쇠진하게 한 펠

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기원전 431년부터 50년은 아테나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화의 최전성기였다. 또 한 헤로도토스

(기원전480년경~425년경)역사가 집필 되었다.


아름다운 파르테논이 세워졌고 정치적으로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도시 빈민층이 득세하여 페리클레스가 주도

하는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

소포클레스가 처음에 아이퀼로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소포클레스는 대체로 전통을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비극의개

혁에도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아여 마치 아이퀼로

스가 제2의 배우를 추가함으로써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가

되었으며 그 밖에도 무대에 배경 그림을 도입했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육일승천과 서산낙일

을 모두 경험했다. 아이스퀼로스 못지않게 신들의

힘과 위대함을 인식하고 신을 공경하는 경건한 생활을 하지만

그에게 신은 항상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기 같은 존재

였다. 소포클레스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보여주려 했다.


신에 대하여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는 소포클레스의 종교관은 따라

서 델포이 신정의 문 위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

금언에 가깝다 하겠다.

위대한 창조자였던 이들 3대 비극작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정신에 힘입어 그리스 정신을 가장

위대하게 구현해냈으며, 인류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리스

비극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

 

-천병희 옮김

 

나의 생각

“고전은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

그리스에서는 왜 희극에 대한 노래를 하지 않았을까?

비극이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까웠을까? 비극 속에서

더 깊은 심연 자신으로의 희귀, 신과 자연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발견했으리라본다. 인간의 비극을 통해 아름다운

예술은 탄생하고 새로운 가치 성찰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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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3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이군요 ㅋ 전 소포클래스만 읽어봤네요 😅 그런데 너무 좋았었다는~!! 다른 작가 작품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카시오페 2022-02-17 08:19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새파랑님 고전책은 저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올해 꼭 몇권을 읽어보려다 그리스 비극을 이제야 읽게 되었답니다.
고전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혜의 향기가 있는것 같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3가지 생각

습관만이 인생을 변화 시킬수 있다

습관이 그 사람을 천재로 만든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자주하는 그것이다.


자신을 제어하는 훈련

일기 쓰기

하지 말아야 되는 일은 하지 말자

하지 말아야 되는 일을 적어두자

명상을 한다.

오늘 내가 가야할 곳만 다짐한다.

1. 산책

2. 명상

3. 일기

 

간절

===더 나은 나를 위한 염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을 응시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업기 때문이다.

간절이란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며

긴박한 마음이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자신의 정점을 복 돋우어

이루어야 할 일생의 과업이다. 그 과업은 자신의 생김새와 DNA처럼

자신만의 개성을 담보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원하고 사회가 좋다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그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는다.그 과업은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이내 열정이 시들어 버린다간절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를 선물한다. 인내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일에 지속적으로 몰입하게 되고 그 몰입은 또 다른 커다란 몰입으로 이루어져 남들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개성을 취하게 한다.


우리는 이 독보적인 개성을 천재성이라고 부른다. 이 천재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만인의 보편적인 영혼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괜스레 끌린다. 그들은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잠재된 천재성을 일깨워 그들 자신도 그런 여정을 떠나도록 감동적으로 독려하기 때문이다율라베스는 자신이 선택한 최선의 것을 자신의 심장처럼 수용하고 아끼려는

마음이다. 율라베스는 흔히 조심스러운, 사려 깊은, 신을 경외하는 의미다.

 

신중

허상으로의 탈출

아침이면 수면 상태에 들어갔던 나의 의식이 다시 돌아온다.

밤은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하루의 마무리는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완성한다 내가 아침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하루의 질이 결정된다이 은은하고 저녁 내내 나는 시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그 특이한 황록색 하늘을 나는 아직 응시하고 있다.

아 내눈이 얼마나 공허하던지 저 높이 있는 조각나 막대 모양의 긴 구름들이 별들이 나타나자 움직이기를 포기하는 구나 이른 아침 하루의 일과를 신중하게 기획되지 않으면 그 하루는 대게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나는 각성을 위해 도반들과 함께 공부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윌든을 읽기 시작했다.


"실의에 대한 송가"

나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 매일 조금씩 변하는 나를 다시 관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연은 나에게 매일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내가 어릴 적 지녔던 자연에 대한 순박한 환상이 실의나 절망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가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연은 이른 아침에 최선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은 하루라는 인생을 시작하게 하기 위한 출발번이며 어제의 잠으로부터

자를 깨우는 시간이다. 저녁노을이 아닌 이른 아침은 보람된 하루를 결심하는

최적의 시간이다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오늘은 어제와

같이 기억에서 벗어나 흘러버리기 일쑤다. 아침이 오면 우리 대부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나고 소수의 인간들은 지적이며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하루는 영적인 시를 쓰기 위해 사용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거룩한 예술은 하루를 감동적으로 조각하는 수고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것을 구성하누 모든 순간에 하찮아 보이는 세부 항목까지 자신의 깊은 숙고를 통해 결정한다. 소로는 자신이 숲속으로 간 이유를 신중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신중은 나의 삶의 핵심을 정면으로 질문하고 해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중이란 영어 단어 자유란 단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신중만이 내게 쌓여 있는 허영과 허상으로부터 나를 탈출시키고 내가 원하는 자유의 여신을 조금씩 보여준다. 신중은 행복한 삶의 열쇠이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삶의 도전을 용감하게 응전하도록 독려한다.




삶은 영광스럽다. 그러기에 삶은 나의 전부를 요구한다. 나는 활기차게 나의 홰에 오를

것인가. 그때 나는 무엇을 외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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