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몰아치는 1619년 겨울 어느 날, 독일 황제의 대관식을 보러 프랑크푸르트로 여행 중이던 한 프랑스 청년이 악천후에 발이묶여 독일 울름의 한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된다. 세상은 전쟁으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창문을 두드려 대는 저 바깥의 매서운 눈보라, 하지만 여기, 이 난로 앞은 얼마나 평온한가. 청년은 눈 덮인 오두막 따뜻한 난롯불 앞에 앉아 사색인지 몽상인지 모를 상념에 잠겼다. 가끔씩 졸고 백일몽을 꾸기도 하면서, 우연히 얻게 된 모처럼의 평화, 아마도 지나온 삶의 모든 장면이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어쩌다 이 소란스런 전쟁의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되었을까?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적이 있는 것도, 전파해야 할 이념이 있는 것도, 지켜야 할 조국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용병으로 나서서 돈을 벌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그에겐 촉망받는 학자의 길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두 살 먹은 이 청년에겐 스승들이 기대했던 학자의 삶도, - P17
아버지가 마련해 둔 법률가의 이력도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그도. 학문에 길이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삶에 요긴한 지식의 보고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학문을 채울 확실한 지식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경험에서 알게 된 지식들이 그랬다. 각인각색. 이런 지식들은 사람마다. 보는 위치마다 달라, 무엇이 진짜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이는 나무도 가까이서 보면 매우 크다. 심지어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속는 경우도 있다. 경험만 믿는다면필시 우리는 옛날 사람들처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그래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경험만큼 유용한것도 없다. 도처에 널려 있는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건 뭐니뭐니 해도 우리의 감각이다. 그러나 ‘진짜‘ 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사람한테 이는 큰 낭패다. 코페르니쿠스가 아무리 지구가 태양을중심으로 돈다고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해도, 우리 눈에는 늘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의 이론적 가설을 믿을 수 있을까? 설령 갈릴레이 같은 사람이 관찰 결과까지 들이 댄다 해도, 망원경을 우리 눈에 갖다 대 줘도, 이를 확인하려면 여하간 일단은 우리 눈에 상이 맺혀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본 것이든, 네가 본 것이든, 심지어 과학자가 본 것이든,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 P18
아리스토텔레스와 학문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인의 눈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학문 진보에 가장 큰걸림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tistoteles는 그들이 반대한 모든 것의 원조였다. 그러나 수천 년에 걸친 지식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으로 집약될 만큼, 그가 거대한 철학자였다는 것도 분명하다. 사실 오늘날까지 장장 2,400년에 걸쳐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서, 나아가 서구 문명 전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의였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립의 부름으로 차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될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여기엔 아마 이런 연줄 덕도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 유명하다. 물론, 스승을 비판하면서 스승과 겨룰 만한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세운 제자로도 유명하지만 말이다. 열여섯 살(혹은 열일곱 살)에 그는 아테네로 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장장 20년 동안 수학한다. 플라톤이 죽고 난 후에는 아카데미아를 나와 리케이온‘ 이라는 학원을따로 만들어 12년간 교육에 종사하며 독자적인 학파를 만들기도 한다. 아가테미아에서 그는 특히 독서광으로 통했는데, 이 때문에 스승 플라톤은 그를 읽는가 (우리말로 하면 ‘책벌레‘ 쯤 될 것이다)라 불렀다고 한다.
전문화 시대인 오늘날의 눈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다양한 분야에 방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논리학과 형이상학, 나아가 자연학, 생물학, 정치학, 윤리학등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학문들의 시초에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난 후, - P57
아테네에 반알렉산드로스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면서 불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튄다. 만주정을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제군주가 곱게보였을 리 없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스승이었고 이전에 다른 참주의 자문을 맡기도 했으니, 이러한 그의 정치적 경력은 불경죄의빌미가 된다. 인간을 신격화하여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테네에 남아 그대로 사형을 감수한 소크라테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떠난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 예순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삶의 이력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는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사형을 당했든 도망을 갔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일과는 무관하다. 소크라테스가 문자 이전 시대의 철학자로서 삶 자체로 지혜를깨우쳐 준 성인으로 기억된다면, 그의 제자 플라톤이 구술 시대와 문자 시대의 중간에서 온갖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 철학자로 기억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자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료들을 모으고 조직하고 체계화한 일종의 이론가로 기억된다.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자쯤 될까? 그런데문자 시대의 이 해박한 이론가가 온갖 분야를 건드리면서 방대한 양의 글을 쓴이상, 그 사상의 진면목을 알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근대인들의학문적 이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대목만 짚어 보기로 하자. 이론가가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잡다하게 흩어져 있거나 뒤섞여 있는 것을 펼쳐 놓고 나누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들을 탐구했을 뿐 아니라, 학문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었다. 그는 학문을크게 이론학(테오리아 theoria: 신학, 수학, 자연학)과 실천학(프락시스praxis: 윤리학, 정치학), 그리고 제작학(포이에시스 poiesis: 예술 작품을 비롯해 생산과 관련된 - P58
것으로 나누었다. 이 그리스 말들은 우리에게도 꽤 익숙하다. 영어의 theory‘, practice‘, poetry‘ 는 각각 이 말들에서 왔다. 시를 비롯한 예술 작품이 포함된 것은 좀 낯설지만, 제작학‘ 은 실용 학문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결국 오늘날의 학문 분류도 큰 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있는 셈이다.
그런데 분류의 기준을 살펴보기 전에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이 분류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논리학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학문분류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논리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걸까? 그렇다. 논리학은 하나의 학문‘ 이라기보다는 모든 학문의 ‘도구‘, 즉 ‘오르가논 Organomi이다. 그러나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근대인 베이컨이 『새로운 오르가논Nouvum Organumi, 즉 ‘새로운 도구‘ 라는 제목의 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도전장을 던진 이유도 이 ‘도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몰라도 ‘인간은 이성적 동물‘ 이라는 말만은 누구든 알 것이다. 그런데, 이성reason‘ 이라는 말의 어원인 ‘로고스 logos 는 그리스어로말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본래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말 에서 어떻게 ‘이성‘ 으로 건너뛸 수 있을까? 말에 사고의 질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고의 질서란 추론의 질서이며, 추론의 질서가 곧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말 에 주목했다. 그리고 말을 말이 되게 해 주는 것을 체계화했다. 곧 말을 일관되고 효과적이게만들어 주는 필수 규칙들을 만들고,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구조화하는 범주들을나누었다. 그리고 이 규칙과 범주들을 가지고 자연을 탐구했다. 따라서 논리의토대를 닦았다는 점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주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 P59
이제 학문 분류의 기준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 영역을 크게 읽의 목적에 따라 구분했다. 우선 이론학의 목적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신도, 도형도 자연물의 원리도, 그걸로 뭘 어떻게 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반대로, 실천학과 제작학의 목적은있는 것을 변형하기‘ 이다. 어떻게 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다시어떻게 나누어질까? 역시 변형의 목적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실천학은 행위자자신의 변형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제작학은 행위자 바깥에 있는 다른 것을 변형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윤리학은 나를 좀 더 유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수사학은 멋진 웅변으로 남을 감화하기 위한 것이다. 더 주목할 것은 이론학 내에 포함된 학문들을 분류하는 기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대상의 특수성에 따라 나누었다. 가령, 선이나 면 같은 추상물을다루는 수학은 자연물의 원리를 다루는 자연학과는 다르다. 나아가, 양을 다루는 수학 안에서도 불연속량인 수를 다루는 산술학과, 연속랑인 선 · 면 · 부피등을 다루는 기하학은 다르다. 자연학도유와 종에 따라 나뉜다. 각각의 유와 종이 다른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만큼, 이 각각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도 다르다. 가령 동물의 삶의 목적과 식물의 삶의 목적이 다른 만큼 동물학과 식물학도 다르다. .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분류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대상의특수성을 강조하는 한, 각각의 학문은 다른 원리, 다른 방법, 다른 목적에 따라탐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니아가 학문들은 결코 서로 소통하거나 합쳐질 수없다. 그러니 결국 통일된 체계를 수립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처럼 각학문이 각기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학문의 도구인 ‘오르가논‘은 - P60
극히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인이 맞섰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학문 체계이다. 근대인들의 학문 이상은 바로 ‘보편학 Mathesis Universalis 이었다. 즉 모든 학문을 대상에 따라 나누는 대신 동질화하여 보편적인 체계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통합의 열쇠가 바로 ‘방법‘ 이었다. 단, 이는 더 이상 형식적인 논리 규칙이 아니라 모든 학문을 탐구하는 실질적인 방법이어야 했다. 이 방법 을 가지고 모든학문을 하나의 나무 모양으로 통합하려 한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는 바로이러한 보편학의 이상을 대표한다 (3장과 연결해 보라).. 참고로 위의 분류에 따라, 오늘날 전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소개해 두자. 우선, 말과 생각의 도구인 ‘오르가논 에 해당하는 논리학적 저작이 있다. 범주론』, 『해석론』, 『분석론, 전서와 후서, 변증론, 『소피스트적 논박 등이 그것이다. 이론학적 저작으로는 『자연학』, 『형이상학』, 『영혼론, 등이 전해지며, 실천학적 저작으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등이 있다. 그리고제작학적 저작으로는 수사학과 문학적 저작인 『시학이 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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