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 이라는 뜻이다. 말 뜻대로 하자면, 18세기 칸트나 19세기 헤겔도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을 가르쳤던 셈이 되고, 오.. 늘날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도 스콜라철학이 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철학을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공식적으로 가르친 건 언제일까? 딱잘라 말할 순 없지만, 대체로 9세기 기독교 세계를 통일한 카롤루스 대제 때부터라고 본다. 그는 제국의 팽창뿐만 아니라 내치에도 힘쓰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열었다. 그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또한 높은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던 카롤루스 대제는 제국에 통합된 여러 민족들 - 앞선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비해 문화적으로 미개했던 민족들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많은교회 부속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신학만을 연구하고 가르친 건 아니다. 이전까지 내려오는 풍부한 전통, 곧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을 흡수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따라서초기 스콜라 철학은 성서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나 로마 철학자의 저서를 문헌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형태를 띠었다.
스콜라스티코스skolastikos‘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공부에 전념하는 자 라는 뜻이었지만, 이때부터는 가르치는 자‘ 라는 뜻으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가르치는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 불렀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자라고 하면 소르본, 옥스퍼드 등 중세 때 세워긴 유서 깊은 대학에서 연구하던 학자나 교수, 박사들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스콜라 철학 이라는 말은 정작 이 철학이 무엇인지에대해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셈이다. 사실 스콜라 철학은 다양한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어 정의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측면을 스콜라 철학의 핵심으로 본다. 우선 핵심 정신의 - P62
면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점, 그리고 수단의 면에서 아주 엄밀한 방법을 요구한다는 점,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것이 스콜라 철학의 성격을 알려주는 동시에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선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 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렇게 보면 말만 ‘조화‘일 뿐, 사실상 이 시기 철학은 없었던 셈 아니냐고 생각하기쉽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시각으로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능 학자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심지어 데카르트도 전문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여러 학문들이 전문적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과 철학이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물론 이 시기 대부분의 신학자가 곧 철학자이고 신학적 문제가 철학적 문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학과 철학은 엄연히 구별되었다. 사실 조화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둘이 서로 조화되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함축한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는 말은 이러한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여하간,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수 있는 범위의 것을 연구하며, 신학은 신이 내린 계시를 통해 이성의 파악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연구했던 만큼, 둘은 구별되었고 서로 갈등하면서도 서로를살찌우는 측면도 있었다.
두 번째로 방식의 측면에서 스콜라 철학은 흔히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논리, 심지어 궤변적일만큼 무익한 논리 싸움에 골몰했던 철학으로 간주된다. 오늘날스콜라적이다‘ 라고 하면 대체로 이런 뜻으로 통한다. 20세기 철학자 존 듀이는 스콜라 철학을 "아무런 목적도, 특별한 핵심도 없이, 형식적인 구별들을 양산하는 사고 양식" 으로 정의하면서, 그 특징을 과잉된 정교함과 정밀함이라고 - P63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역시 일면적일 수 있다. 사실 사변적이고 논리적으로 복잡한 걸로 치자면 헤겔 철학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헤겔 철학을이런 식으로 낙인찍진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규정에는, 스콜라철학의 내용 자체에 대한 반감이, 곧 신학에서 철학을 완전히 독립시킨 후대의 관점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군의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을 신학에 적용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원전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레스와, 천 년 이후 중세 한복판의 스콜라 철학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전승사를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나 이는 온전하게 후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우선 고대의 다른 많은 저작들처럼 기독교의 지배가 시작된 처음1세기 동안, 그의 글도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더구나 지금 전해지는 저작들도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60년,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300년이라는긴 시간이 지난 후 조각조각 떨어져 있던 글들을 로마인 안드로니코스가 자기나름대로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저작들의 운명은 그 이후에도 평탄치 않았다. 물론 스콜라 철학이 수립되던 시기부터 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는 삼단논법 같은 기술적 방법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 유럽 학자들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인 ‘오르가논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저작들이 유립 안에 없어서가 아니라,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 이 저작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라틴어는 유럽의 보편어였고 공부하는 - P65
박탈당했을까? 16세기 르네상스 이후부터 새로운 지식인 그룹이 생거나고 이들이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지적 권위를 갖기 시작할 때(이 책 1장을 참조하라, 스콜라 철학은 더 이상 과거의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것은 베이컨주의 과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의 등장과 더불어 죽어 갔고, 계몽주의 및 혁명의 시대인 18세기에 완전히 막을 내린다. 스콜라 철학이 완전히경멸과 비난의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르네상스 때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일이다.
스콜라 철학은 신앙의 무게 아래 이성을 억압하면서 쓸모없는 현학적 논의만 일삼는 철학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18세기 프랑스 혁명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백과전서파들, 그리고 19세기 대철학자 헤겔은 스콜라철학에 대해 철학이 아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중세를 ‘암흑기‘ 로 보는시각도 이렇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점차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나스콜라 철학과 중세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증세는 그 자체로 암흑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무지로 인해 우리에게 암흑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극복하려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앞선 시대는 늘 오류와 무지로 점철된 시대이기 마련이다. 우리 역시 본문에서는 스콜라 철학을 이런 시각으로 보아왔다. 데카르트의 눈으로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시각 역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스콜라 철학자들 역시 신앙의 그늘아래에서 세계의 거대한 문제에 대해 사유했으며, 이 중 많은 문제들이 근대를지나 오늘날까지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래도 사람이 살고있었던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데카르트 철학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스콜라철학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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