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농축 디자인 스토리 - 공간의 문화적 디테일을 읽는 다섯 레슨 ㅣ 박진배 뉴욕 FIT 교수의 ‘공간’ 시리즈
박진배 지음 / 효형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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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merry-go-round 또는 carousel)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놀이기구다. 롯데월드 정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앞에 화려한 전구와 거울, 금빛 컬러로 장식된 회전목마가 빙빙 돌고 있다. 회전목마는 롯데월드 아니 전 세계 테마파크의 오브제 역할을 한다.

회전목마는 목마를 탄 사람은 물론,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까지 바꿔놓는 마법을 부린다. 모두 밝게 웃는다. 기회가 되면 꼭 살펴보길 바란다. 웃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대부분 손을 흔든다. 지켜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진배 교수의 <고농축 디자인 스토리>는 <공간미식가>, <공간력 수업>에 이은 '공간'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이 책에서는 공간의 진화와 그 속에 담긴 서사를 중심으로 5개 주제를 다룬다.

건물을 보수할 때 미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는 비계를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같은 명품 하우스는 그들을 상징하는 디자인 이미지로 통째로 포장해 공간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주제인 자연과 교감을 통해 만들어낸 공간으로 저자는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꼽는다. 나무, 물고기, 새, 너구리는 각종 야생이 살고 있는 곳으로 150년 동안 수많은 도시공원의 모델이 됐다.

어떤 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라이터, 세계 2억 명이 갖고 있는 지포 Zippo는 세 번째 주제, 디자인과 브랜딩으로 팬덤 형성 비결을 가진 사례로 소개된다.

오브제 스토리로 앞서 이야기 나눈 회전목마 외에 책의 서사가 눈에 들어온다. 책의 기능으로서 책의 삶, 그리고 책이 각색을 통해 연극, 영화와 같은 다른 형식으로 작품이 되는 삶, 여기에 세 번째 삶이 추가된다.

'장식품 기능이다. 1970년대 가정집 거실마다 전시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필두로 1990년대부터는 도서관 테마가 크게 유행,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무대나 상업공간을 꾸미는 디자이너들은 연극의 세트, 패션 부티크, 호텔, 레스토랑, 심지어는 술을 마시는 바도 책으로 장식한다. 책이 쌓인 공간의 지적 분위기가 그럴듯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p. 262)'

다섯 번째 주제, 도시에 예술적 요소를 더해 주는 공공디자인에 관해서는 마천루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시그램 빌딩은 뉴욕 최초의 마천루다. 38층 높이에 브론즈 프레임과 갈색 유리로 조화를 이룬 이 빌딩이 현재 뉴욕 빌딩 숲을 이룬 효시인 셈이다.

전엔 63빌딩이었지만, 지금 서울의 상징이 된 롯데타워는 123층에 555미터 높이로 수직 도시라 할만하다.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쇼핑하는 등 모든 게 가능하니 말이다.

고인이 된 롯데 신격호 회장의 꿈은 하루라도 좋으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서울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 꿈은 여러 사정으로 지연돼 이뤄내지 못했다. 또 하나, 타워 모습을 파리 에펠탑 형태로 했으면 했다. 하지만 이 꿈도 붓이 타워 외관 디자인으로 결정돼 물거품이 됐다. 서울을 대표할 마천루가 에펠탑을 베낀 거라니, 우리 정서가 동의하지 못한 결과다.

마지막 주제는 이제까지와 조금 다른 이야기로 AI 시대의 교육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강의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라이브 공연을 통한 학생들과의 소통이다. 지식은 책에도 있고 인터넷에도 수두룩하다. 실시간 대면 강의는 생각보다 강력한 상상력과 전달력을 지니고 있다. 평생 잊히지 않는 좋은 강의는 그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함께한다. 교수가 강단에 오르는 것은 배우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과 같다. (p. 339)'

AI는 절대 할 수 없는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란 생각도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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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가정법원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이명숙.이서원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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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전세살이 할 때 집주인 사정으로 1년도 안 돼 뒤 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어느 날 퇴근하면서 먼저 살던 동으로 습관적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아차 싶었다. 문을 열고 누구라도 나오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계단으로 뛰어내려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앞에 아내가 서있었다.
"자기, 앞 동엔 왜 갔어? 거기 만나는 여자 있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멈칫했다. 때마침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불륜 사건이 뉴스로 나오던 때였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 허겁지겁 앞 동에서 빠져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놀려줄 작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미리 나와 서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작심하고 계속 날 의심했다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를 활동하는 이명숙 변호사가 36년 넘게 접한 실제 법정 사례 가운데 43개를 뽑아 가족심리상담가 이서원 교수와 함께 들여다본 이야기가 <오늘도 가정법원에서 인생을 배웁니다>에 담겨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들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법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하한선을 규정한 공식이라면, 상담은 상한선을 끌어올려 주는 인생 공식이다. 이 책은 하나의 소송 사건을 '권리와 책임이라는 변호사의 시선'을 통해 하한선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예의와 태도라는 상담가의 시선'을 통해 어떻게 하면 상한선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p. 8 프롤로그)'

불륜을 감추려고 아이들을 결혼시켜 사돈이 되면서까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는 사건은 불륜의 끝판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이룬 가정 뒤에 돈이라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을 때 그 사랑이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사건도 소개됐다.

'이 사건을 겪으며 나는 생각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가? (p. 124)'

가족폭력을 키우는 건 포기하고 침묵하는 '학습된 무력감'이다. '아이들 때문에 참는다'라고들 말하며 이혼을 망설이지만, 그 인내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이 아니다. 아이들을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남편이 돈벌이를 위해 아내에게 성매매를 시키는 사건은 남자로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은 대기업 승진을 앞두고 세 아이가 있는 돌싱 남자를 받아들인 안민지 씨 사레다. 아이들은 친자식처럼 키우려고 불임 수술까지 했다. 미국에서 세 아이 유학 뒷바라지까지 하며 15년 동안 헌신했지만, 안민지 씨는 자녀 교육을 핑계로 남편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간 나쁜 아내가 돼버렸다. 남편이 재산까지 빼돌리며 이혼을 준비해 안민지 씨에게 남은 건 미국의 월셋집뿐이었다. 안민지 씨를 더 뼈아프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세 아이가 '새어머니가 우리를 학대했다'라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법은 이혼과 위자료라는 형태로 책임을 물을뿐 부부 또는 가족이 오랫동안 쌓아온 사연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법적으로 해결되더라고 상처는 남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라 더 아프고 깊다.

배우자와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그 가족 구성원을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 가정을 깨질 수밖에 없다. 신뢰가 자리 잡을 수 없다. 착각해서 앞 동에 갔다 오는 사소한 일을 아내가 불신의 눈으로 바라봤다면, 우리 가정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혼은 천천히 신중하게, 이혼을 재빠르게.' 한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절연을 매정하게 여기는 정서가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침묵과 인내가 더 문제를 키우고 상처를 깊게 만든다. 끝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법의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삶의 길이 시작된다. 온전한 인생이란 법의 길과 삶의 길이 함께할 때 시작될 수 있다. (p. 7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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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벤자민 마이어스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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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만났고, 그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삶은 부부라는, 이전과 다른 풍경이었다. 이렇듯 아내와 맺은 관계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삶은 어디로 간 걸까? (p. 15)'

작가로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로버트 애플야드는 열여섯 살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막 끝난 1946년, 영국 탄광촌 더럼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광부의 삶을 살았다. 언젠가 로버트 역시 광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삶 이전에 탄광 마을 너머 바깥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소년 로버트는 알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하루하루 일하고 그 대가로 끼니를 때우며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노스요크셔 로빈 후드 베이 오솔길에 들어선 로버트는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람 덜시 파이퍼를 만난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이의 노부인, 지식은 많아 보이지만 거침없이 말하는 덜시와 로버트는 진솔한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던 중 오두막 옆 낡은 창고를 손봐주던 로버트는 로미 란다우라는 시인의 이름과 <앞바다 The Offing>라는 제목이 적힌 원고 뭉치를 발견한다.


아내 맺은 관계로 내 삶의 풍경이 달라졌듯이, 덜시 파이퍼 그리고 로미 란다우의 시와 관계를 맺은 로버트 애플야드의 삶 역시 다른 풍경을 맞이한다.


덜시와 로버트의 관계는 갈등 속에 파묻힌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에게 화해의 실마리를 준다. 부모 세대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청년, 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줘야 할까.

'"운전을 못 한다니?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 진짜 아예 못 해요."
"진짜 운전이라는 걸 하는 사람도 있니?"
"음, 네."
"로버트, 솔직히 말이다. 200미터 남짓 떨어져 있고, 완전 내리막길이잖니.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바퀴가 그냥 알아서 구르게 놔두면 돼. 아주 쉽잖아. 네가 할 일은 완만한 모퉁이 몇 군데서 핸들을 조금 틀고, 가끔 경적을 울리는 것뿐이야. 아 참, 그리고 필요할 때 브레이크를 밟고." (p. 239)'

앞으로 닥칠 미래에 로버트는 겁먹었다. 덜시는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로버트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로버트와 다투려 하지 않고 끝없는 관대를 베푼다. 그 관대함이 그다음 그다음으로 이어지도록.

'"아직도 왜 이렇게 저에게 관대하게 베풀어주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덜시."
"말했잖아. 그게 내가 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아마 언젠가는 너도 그렇게 될 거야." (pp. 326, 327)'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그 분쟁을 통과한 이들의 기억 속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전쟁 후유증을 겪는 상황에서 로버트는 독일에 대해 적의로 가득 차 있다. 덜시는 독일 출신 시인 란다우와 맺은 관계를 이야기해 주며 그녀의 시를 로버트에게 권한다.

저자 벤자민 마이어스는 1976년 생으로 영국 더럼에서 태어나 그곳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설 속 주인공 로버트와 닮았다.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글은 운율에 서정을 갖춘 시처럼 다가온다.

저자는 1912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후, 시집을 발표해 명성을 쌓았고, 로빈 후드 베이 근처 바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로미 란다우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 속으로 데려온다.

소설 속 덜시는 '천사처럼 찰나에 밝게 타오르며 글을 쓴 다음, 자신의 민족이 파괴한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끝장내길 택한 비운의 독일인 시인 (p. 324)' 란다우를 로버트에 앞에 데려다 놓고 독일인과 화해를 그리고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 결국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건 몇 개 안 돼. 자유, 그리고 자유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 시, 어쩌면 좋은 와인 한 잔, 맛난 식사, 자연, 운이 좋으면 사랑을 얻을 수도 있겠지. 그게 전부야. 독일인을 전부 미워하진 마. 그들 대부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거든." (p. 62)'


탄광촌을 떠나온 소년은 친절한 어른을 만나 세상을 다른 풍경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시를 만나 미움은 버리고 사랑을 취한다. 그렇게 다른 풍경에서 자라 어른이 된 로버트 애플야드는 '"... 삶에 시가 부족해서." (p. 147)' 잘못된 이들을 위해 시를 쓴다.

우리 아이들이 발견한 '<앞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밀려가 저 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p. 302)' 그리고 노년을 앞둔 나는 퇴직한 다음 책을 만났고, 책 속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으며 요즘 또 다른 풍경으로 옮겨와 살아가고 있다.

"또 다른 풍경 속 삶은, 또 언제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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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벤자민 마이어스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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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만났고, 그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삶은 부부라는, 이전과 다른 풍경이었다. 이렇듯 아내와 맺은 관계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삶은 어디로 간 걸까? (p. 15)'

작가로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로버트 애플야드는 열여섯 살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막 끝난 1946년, 영국 탄광촌 더럼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광부의 삶을 살았다. 언젠가 로버트 역시 광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삶 이전에 탄광 마을 너머 바깥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소년 로버트는 알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하루하루 일하고 그 대가로 끼니를 때우며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노스요크셔 로빈 후드 베이 오솔길에 들어선 로버트는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람 덜시 파이퍼를 만난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이의 노부인, 지식은 많아 보이지만 거침없이 말하는 덜시와 로버트는 진솔한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던 중 오두막 옆 낡은 창고를 손봐주던 로버트는 로미 란다우라는 시인의 이름과 <앞바다 The Offing>라는 제목이 적힌 원고 뭉치를 발견한다.


아내 맺은 관계로 내 삶의 풍경이 달라졌듯이, 덜시 파이퍼 그리고 로미 란다우의 시와 관계를 맺은 로버트 애플야드의 삶 역시 다른 풍경을 맞이한다.


덜시와 로버트의 관계는 갈등 속에 파묻힌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에게 화해의 실마리를 준다. 부모 세대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청년, 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줘야 할까.

'"운전을 못 한다니?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 진짜 아예 못 해요."
"진짜 운전이라는 걸 하는 사람도 있니?"
"음, 네."
"로버트, 솔직히 말이다. 200미터 남짓 떨어져 있고, 완전 내리막길이잖니.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바퀴가 그냥 알아서 구르게 놔두면 돼. 아주 쉽잖아. 네가 할 일은 완만한 모퉁이 몇 군데서 핸들을 조금 틀고, 가끔 경적을 울리는 것뿐이야. 아 참, 그리고 필요할 때 브레이크를 밟고." (p. 239)'

앞으로 닥칠 미래에 로버트는 겁먹었다. 덜시는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로버트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로버트와 다투려 하지 않고 끝없는 관대를 베푼다. 그 관대함이 그다음 그다음으로 이어지도록.

'"아직도 왜 이렇게 저에게 관대하게 베풀어주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덜시."
"말했잖아. 그게 내가 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아마 언젠가는 너도 그렇게 될 거야." (pp. 326, 327)'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그 분쟁을 통과한 이들의 기억 속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전쟁 후유증을 겪는 상황에서 로버트는 독일에 대해 적의로 가득 차 있다. 덜시는 독일 출신 시인 란다우와 맺은 관계를 이야기해 주며 그녀의 시를 로버트에게 권한다.

저자 벤자민 마이어스는 1976년 생으로 영국 더럼에서 태어나 그곳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설 속 주인공 로버트와 닮았다.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글은 운율에 서정을 갖춘 시처럼 다가온다.

저자는 1912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후, 시집을 발표해 명성을 쌓았고, 로빈 후드 베이 근처 바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로미 란다우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 속으로 데려온다.

소설 속 덜시는 '천사처럼 찰나에 밝게 타오르며 글을 쓴 다음, 자신의 민족이 파괴한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끝장내길 택한 비운의 독일인 시인 (p. 324)' 란다우를 로버트에 앞에 데려다 놓고 독일인과 화해를 그리고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 결국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건 몇 개 안 돼. 자유, 그리고 자유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 시, 어쩌면 좋은 와인 한 잔, 맛난 식사, 자연, 운이 좋으면 사랑을 얻을 수도 있겠지. 그게 전부야. 독일인을 전부 미워하진 마. 그들 대부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거든." (p. 62)'


탄광촌을 떠나온 소년은 친절한 어른을 만나 세상을 다른 풍경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시를 만나 미움은 버리고 사랑을 취한다. 그렇게 다른 풍경에서 자라 어른이 된 로버트 애플야드는 '"... 삶에 시가 부족해서." (p. 147)' 잘못된 이들을 위해 시를 쓴다.

우리 아이들이 발견한 '<앞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밀려가 저 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p. 302)' 그리고 노년을 앞둔 나는 퇴직한 다음 책을 만났고, 책 속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으며 요즘 또 다른 풍경으로 옮겨와 살아가고 있다.

"또 다른 풍경 속 삶은, 또 언제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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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
스즈키 도시타카 지음, 김소연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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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구구~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들려오는 비둘기 소리다.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가 천덕꾸러기가 돼버려서인지 비둘기가 구구~ 대는 소리마저 반갑지 않다. 우리가 아는 숲속 새소리와 달리 탁한 소리랄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8올림픽 때 행사를 위해 수입한 비둘기들이 지금 도심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라는... 흔해져 버린 대다가 뭐든지 먹어치우고 똥을 아무 데나 싸대서 미운 털이 박혔다. 드문 현상인데, 비둘기는 사람들이 멀리하는 새가 돼버렸다.


'나에게는 새들의 말이 들린다. (p. 21)'

생물학자로 동물언어학을 창시한 스즈키 도시타카 교수가 18년 넘는 시간을 들여 알아낸 사실이 놀랍다.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의 울음소리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고 인간의 언어처럼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라고 주장한 기원전부터 2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언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스즈키 교수가 그런 사실은 뒤집었다. 박새가 말을 한다는 걸 뒷받침하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확보해 발표함으로써 동물행동 학계가 그 성과를 인정했다.

박새의 '츠르르르르' 소리는 '뱀'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걸 실험으로 알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박새는 언어의 문법 규칙을 적용해 박새어와 북방쇠박새어의 혼합문까지 이해한다. 더 이상 박새의 모든 울음소리가 감정 표현이라고 못 박을 수 없게 됐다.

'그들에게도 울음소리에 의미를 포함시키거나 그것을 조합해 문장을 만드는 힘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p. 272)'

날개를 파닥이는 제스처로 '네가 먼저 해'라는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암컷이 날개를 파닥이는 행위는 수컷에게 '새집'으로 향하도록 재촉하기 때문이다. 수컷은 날개를 파닥인 '암컷'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날개의 파닥임이 결정하는 것은 새집에 들어가는 순서이며, '네가 먼저 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p. 290)'


수만 년 전 우리 인류의 조상은 새의 언어를 이해했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만약 그랬다면 맹금류나 거칠고 힘센 동물로부터 갓난아이를 지키는데 새의 언어가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높은 곳에서는 다가오는 동물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다.

동물한테 언어가 없을 거라는 2천 년 이상 된 인간들의 어리석은 신념이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뒤집으려고 스즈키 도시타카는 SNS, 강연, 라이오, 텔레비전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새들의 언어와 인간 세상을 이어주려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 책도 그런 목적 가운데 하나다.

"동물들의 풍요로운 언어 세계를 함께 밝혀나가지 않겠습니까!" (p. 316)'

새들의 언어를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들의 대화를 안다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갓난아이를 지키는 데 도움을 받았듯이 자연재해를 대비하고 피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비둘기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있다.
"이제 더 이상 평화가 너희들의 이미지가 아니란다. 그러니 도시 천덕꾸러기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 보라고..." ㅎㅎ 새에게 언어가 있다니. 알아듣게 될 때가 올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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