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책상이 뒤집혀 있었다
세이야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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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영화 <더 글로리>를 보고는 어느덧 이십 대 후반이 된 두 아이에게 중고등학생 시절에 학폭 경험이 있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물었어야 할 질문을 이제서야... 하는 후회와 함께 미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아들아이는 뭐 딱히? (그냥 귀찮아서 말을 안 하는 것일 수도...) 하는 표정이었다.

딸아이는 학폭은 없었고 친한 친구였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무리 지어 따돌림 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딸아이는 쿨하게 그러든지 말든지 다른 아이와 놀았고 그 아이도 떠나면 또 다른 아이와... 이런 식으로 해결한 모양이었다 (딸아이 성격이 그렇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두 아이가 참 고마웠다.


<어느 날 책상이 뒤집혀 있었다>는 일본의 인기 코미디언인 세이야의 자전적 소설이다. 학창 시절에 겪었던 따돌림과 폭력에 맞선 이야기다.

'흰 와이셔츠에 배어든 카레 국물처럼, 열여섯 살 아이들의 새하얀 마음에 들러붙은 '이상한 아이'라는 인상은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남았다. 학교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따돌림은 이런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p. 16)'

고등학교 입학 첫날, 이시카와의 실수 아닌 실수 한마디로 따돌림이 시작됐다. 다음날 교실에 들어서니 책상이 뒤집혀 있었다. 얻어맞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해 수치스럽고 머리카락도 빠졌지만 나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란 생각을 하며 견디며 지냈다.

이시카와는 어른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끼어들 경우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힐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극제 행사 소식을 접한 이시카와는 자신의 콩트 창작 능력을 발휘해 따돌림 반전의 기회로 삼기로 한다.

'그건 괴로운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고독과 외로움, 누군가가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즉 약함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자신의 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이를 업신여기며 안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단 괴롭힘 문제는 복잡한 것이며,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p. 137)'

이시카와는 콩트를 준비하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괴롭혀온 구로카와의 사정을 듣게 되면서 그를 불쌍히 여긴다. 문극제 당일까지 구로카와의 방해가 있었지만 지혜롭게 대처해 마침내 최우수상을 받으며 기나긴 따돌림이란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난다.


'"집단 괴롭힘은 당하는 쪽에도 원인이 있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압도적으로 괴롭히는 쪽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 137)'

영화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가 들어보니,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장 많이 듣고 상처받았던 말이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는 말이었단다. 그래서 '어, 나는 잘못 없어'라는 말을 사명처럼 이해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항상 학폭 사건을 대할 때마다 당한 아이에게 주목해왔다. 그러다 보니 가해자는 어느새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고는 피해자에게 한다는 말이 '쟤도 문제가 있었네...'

자칫 따돌림에 맞서 당당하게 극복한 작가 세이야의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느라 '그래 세이아처럼 했으면 괜찮았을 일을...'라며 또 눈길을 피해자에게 돌릴까 걱정된다. 먼저 가해자에게 향했어야 하는 눈길인데도 말이다.

<더 글로리>를 본 아내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 학폭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항상 열변을 토한다. 당한 아이를 생각하면 아무리 학폭 가해자가 어리더라도 용서해 주면 안 된다고.

간단치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가해자를 주목해야만 학폭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야 학폭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가해자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다가가 품어줘도 늦지 않다. 자꾸만 피해자에게 '그때 좀 더 강했어야지'라는 닦달은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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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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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개그맨이란 말을 썼다고 알려진, 지난해 가을 우리 곁을 떠난 전유성 씨의 일화가 생각난다. 인사치레로 하는 '형~ 언제 밥 한 번 먹어요.'라는 말을 하면, 날짜 잡자고 덤벼들곤 했다고 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한 말을 상대방 의도대로 오역誤譯하며 '밥 한 번 먹지 않는' 세태를 꼬집으며 정역定譯으로 대들은 셈이다.


지금까지 번역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번역하며 살아갈 기세인 황석희 번역가가 일상에서 겪은 오역 이야기를 에세이 <오역하는 말들>에 담았다. 전유성 씨의 개그 같은 삶처럼 재밌기도 하고 페이소스도 묻어난다.


지난해 가을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빠진 적이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깊이에의 강요>가 있는데 제목이 영 마음에 걸렸다. '5월에의 초대'처럼 그럴듯해 많이 쓰지만 <우리말 바로 쓰기>를 쓴 이오덕 선생에 따르면 '~에의'는 일본말 'への'를 직역한 병신말이다. '5월로 초대합니다'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어색한 말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깊이에의 강요'라는 제목이 꺼림직해 우리말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원제가 궁금했다.

'Der Zwang zur Tiefe'

''깊이(Tiefe)를 향한(zur) 강요(Zwang)' 마지막에 비평가가 했던 말을 '강요' 대신 '강박'이라는 의미를 선택해 직관적으로 바꿔 본다. (...) '강요'와 '강박', 두 단어 중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 뉘앙스가 다르다. 그게 뭐 그리 다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번역가의 입장에서 두 문장은 뉘앙스만이 아니라 아예 의미가 다르다. (...) 다만 내가 번역한다면 '깊이에의 강요'가 아니라 '깊이를 향한 강박'으로 할 거라는 거지. 짧은 내 식견엔 그편이 독자의 오독을 막기에 더 좋은 길이다. (pp. 81, 82)'

'깊이를 향한 강박', '~에의'가 빠지고 나니 얼마나 맘에 들던지 황석희 번역가가 너무 고마웠다. 아무 생각 없이 일본말을 우리말로 정역하다 보니 우리말이 오염됐다.


아내와 눈물 콧물 빼며 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대사다.
'엄마 애순은 궁상맞은 생활을 타박하는 딸 금명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처럼 살지 마. 근데 엄마는 엄마대로 행복했어. 엄마 인생도 나름 쨍쨍했어. 그림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다고." (p. 167)'

자식들은 부모님 삶은 불행하다고 섣불리 단정 짓곤 하는데 황석희 번역가는 이를 제멋대로 해석한 오역이라고 지적한다. 부모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석희 번역가가 고생하며 사신 어머니께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와 결혼할 거냐고 물었단다. 절대 안 한다는 어머니의 대답이 서운해 속마음을 담아 노골적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나랑 모자 사이로 못 만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엄마는 잠시 뭔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 미안한 듯 입을 뗐다.
"너는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엄마한테서 태어나야지. 내가 너무 못해 줬어."
말문이 막혔다. 농담이 나오질 않았다. (p. 199)'

황석희 번역가는 이 말을 번역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의 말이 너무 뻔히 읽혀서 번역하는 것조차 미안했기 때문이다.


영화나 뮤지컬을 번역하는 황석희 번역가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무수한 말들은 각자의 언어로 번역하면 살아간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내와 대화에서 가장 많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다.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감정이나 상황을 파악하지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채 내 멋대로 해석한 오역에서 빚어진 말이다.

'깊이에의 강요'처럼 어떤 오역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다. 또 때론 황석희 번역가의 어머니 말처럼 굳이 번역하지 않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분개해야 할 때도 있다. 적대시하고 불신에 사로잡혀 악의를 가진 오역을 만났을 때다.

부득이 오역이 필요한 때도 있다. 상대방을 보호하고 갈등을 피하고자 할 때 선의를 가진 오역이 그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오역은 절대적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라며 아내에게 따질 게 아니라 내 나름 오역하면 된다.

음~ 무슨 오역이 적당할까? 어렵다. 세상에서 아내가 하는 말을 번역하는 게 제일 어렵다. '지금 뭐 할 건데?', 빤히 쳐다볼 때... '뭐 잊어버린 거 없어?', '그럴 줄 알았어', '할 말 없어?'... 어떤 대답이 이어져야 할까.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쳐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러고는 잘 때 번뜩 생각난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대신 '내가 당신을 이해하는 게 서툴지? 난 왜 그게 늘지 않을까?' ??? 뭥미? 실패다. 오역 참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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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떨어진 화살을 굳이 가슴에 꽂지 마라 - 한·중·일 50만 독자를 위로한 신경 쓰지 않는 연습
나토리 호겐 지음, 이정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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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 뜻대로 안된다. 하긴 세상일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척척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불만일 테지만 말이다. 그 어느 것보다 맘먹은 대로 안되는 게 부부 사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은 내내 우리 부부 사이에 어떻게 적용하면 이 책이 우리 부부에게 처방전이 될까... 이런 생각으로 머리를 꽉 채웠다.


저자 나토리 호겐은 30년 넘게 수행을 삶으로 이어온 승려다. 이 책을 시작하면서 그는 "당신은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불교가 항상 묻는 물음이라고 한다.

이 질문에 2500여 년을 이어온 불교가 내놓은 대답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언제나 마음이 평온한 사람이 되고 싶다"이다. 저자는 불교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마음이 평온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해 설법하는 콘텐츠'라고 정의한다.

다툰 다음 넋두리하듯 아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래~ 우리 집은 나만 입다물고 있으면 평온하지,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

왜 이런 말을 할까? 혼란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우선 뭔가 틀어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지 불분명하다. 그다음, 한쪽이 이해하고 참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럼 누가 참아야 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더욱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진 게 짜증 난다. 심하게 다투다 보니 서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고 그 결과 둘 다 상처를 입었으니 다투기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기도 글렀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가진 지혜의 힘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자는 뜻에서 책을 썼다. 불교에서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다. 그러니까 마음이 흐트러졌을 때야말로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다.(p. 7)'

내게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허구한 날 다퉈서 평온을 깨뜨린단 말인가? 그 능력이란 걸 내가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발휘'할 수 없는' 능력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원제가 <신경 쓰지 않는 연습>이라고 한다. '연습',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뜻을 덧붙이면서 '발휘할 수 없는 능력'이라고 탓하지만 말고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하는 연습'을 해보자고 한다. 가정을, 부부 사이를 평온하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해 보자고.


우리 부부는 왜 다툴까?

집착 때문이다. 아내가 내 맘을 몰라줄뿐더러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포기하면 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포기 대신 집착이 그 자리에 쌓여간다.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다툼의 원인이다. 칭찬해 주기 보다 상대가 먼저 칭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앞서는 게 문제다. 이런 마음을 포기하고 내가 먼저 칭찬하면 되는 데 '꼭 말을 해야 아냐'며 핑계 삼는다.

'바꾸어 말하면 칭찬받고 싶다는 욕구는 사랑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도움이 되고 싶다는 세 가지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 충족된다. 사치스럽다는 느낌도 든다. (p. 74)'


서로 받은 상처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말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분노해서도 안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화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분노는 욕망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방종放縱, 마음의 집중을 잃어버리는 산란散亂, 위해를 가하려 하는 분忿,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는 뇌惱,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해害 등의 번뇌를 잇달아 발생시킨다. (p. 206)'


마음을, 부부 사이를 평온하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으로 나토리 호겐은 습관을 바꿈으로써 '신경 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라고 권한다. 느낀 대로 차분하게 긍정을 말하고, 삶의 태도는 정중하게 그리고 집착과 미련을 버리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무심하게 살기를 권한다. 무심과 무관심은 다르다.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것이 무관심이라면 무심은 무작정 차단하지 않으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 부부는 만난 지 2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래서 한때 결혼 상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하거나 결혼에 자신 없어하는 후배를 만나면 같잖게 바둑 격언으로 충고하곤 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 둔다고...'

'부부는 타인이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만큼 둘이 생활하려면 어떻게 맞추며 살아갈 것인지 잘 타협해야 한다. 죽을 때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이 가진 사고방식을 조정하고 타협하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 (p. 311)'

쉽고 다정하게 부처의 말을 전해주는 승려 나토리 호겐이 던진 "당신은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 아니 "어떤 부부가 되고 싶습니까?"에 답을 해보자면...

이제까지 굳이 가슴에 꽂지 않아도 되는 화살을 꽂으면 살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서로 맞추고 타협하는 연습을 해서 땅에 떨어진 화살을 굳이 줍지 않겠노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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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는 일
채수아 지음 / 모모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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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아 작가와 마주 앉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듯이 읽어간 책이었다. 진솔한 이야기 88편을 영혼의 자서전, 에세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담았다.

당연히 작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내가 떠올랐다. 시어머니와 에피소드에서는 69세라는 비교적 짧은 인생을 사신 나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너무 닮은 삶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일생이 어쩜 이리 닮았을까. 참는 삶 말이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었다. 아주버님 부부도, 고모도, 남편도, 우리 아이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 세월이 17년 동안 이어졌다. (p. 5, 프롤로그)'

'그래~ 우리 집은 나만 입다물고 있으면 평온하지.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 내 아내가 자주 넋두리하듯 내뱉곤 하는 말과 너무 닮았다.


채수아 작가는 아버지 복이 있어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딸이기도 했다. 자신의 꿈을 접고 아버지가 원하는 선생님이 된 것도 아버지 사랑의 결과였다.

하지만 결혼 후 작가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시어머니의 짜증 섞인 말투, 남을 무시하는 험담, 부정적 기운, 게다가 습관처럼 하는 거짓말까지... 이토록 힘들었던 건 작가의 아버지와 너무 달라서였다.

결혼 전에는 작가의 마음에 미움이 자리 잡을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남편을 만난 후 미움도 배웠다. 한때 수녀가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길 정도로 상처 깊은 사람에게 온기가 되어줄 자신이 있었던 그였다.

작가는 힘듦, 미움, 상처... 사랑의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그 모든 걸 회복해냈다. 사랑으로 치유했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고, 가족의 사랑이 으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엄마는, 아내는 좀 더 힘을 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아내는 '집안의 해, 안 해이기 때문이다. 햇살이기 때문이다. (p. 217)'


채수아 작가와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아쉬움 마음이 앞섰다. 나의 어머니, 아내 그리고 채수아 작가 이들 셋이 닮은, 아니 많은 여자들까지도 포함해서 닮은 여자의 일생에서 남는 아쉬움이다.

작가와 여자들의 삶이 딸로서 부모 이야기, 며느리로써 시부모 이야기, 아내로서 남편 이야기, 엄마로서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선생님으로서 학생들 이야기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빠졌다. 내 이야기 있다손 치더라도 구석자리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다리에 파묻고 있다.

내가 참으니 아주버님, 고모, 남편, 아이들이 행복해 보였고, 나만 입 다무니 가정이 평온했다니. 그럼 난... 나의 행복과 평온함은 어디에 있나.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그 행복과 평온함이 희미해 '여자의 일생'이 허탈해한다.

'내 삶의 이야기를 읽은 당신과 마주 앉아 있는 기분이다.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위의 댓글처럼 당신도 위로받고 힘이 났으면 좋겠다. 사랑은 참 힘든 일이지만, 결국은 늘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를 향한 사랑과 상대방을 향한 사랑은 둘 다 소중하다. (pp. 266, 267)'

나의 책 친구 채수아 작가도 나의 아내도 작가의 말처럼 '나를 향한 사랑과 상대방을 향한 사랑 둘 다 소중'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나를 향한 사랑을 상대방을 향한 사랑보다 더 많이 하고 소중하게 여기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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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 생각지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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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위층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왔다. 윗집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사했으니 정리할 것이 많으려니 했다. 한편으론 걱정도 생겼다. 먼저 살던 사람이 이사 온 후 3개월 동안 조금씩 집을 고치면서 살아서 얼굴 붉히는 일이 생겼고, 서로 앙금이 싹 가시지 않은 채 이사 갔기 때문이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쿵쿵거렸다. 관리실에 조치를 부탁했고 마무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웬걸? 그다음 날은 밤 12시 넘어서까지 뭔가 조립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올라가 따질까 하다가 참았다.

층간 소음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데는 저의가 깔려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도 예의를 지키니 당신도 예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닌가. 내가 지키는 것을 당신은 지키지 않는 건 참을 수 없다. 아파트에서 쾌적함을 누리려면 서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란 틀에 군말 없이 밀어 넣어야만 한다는 생각,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정의가 됐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사회계약, 개인주의와 같은 근대 사상이 동아시아에 침투하면서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p. 7)'

시골 마을에서 자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구마시로 도루는 과거의 시골과 현대의 도쿄를 오가며 변화를 발견했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보다 청결하고 건강하며 질서정연하지만,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어색함이었다.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제약하며 부자유를 만들었다.

질서정연한 거리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눈총을 받는다. 식당에서 아이가 밥투정을 한다든지 운다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조금만 산만해도 ADHD로 규정해 치료대상으로 분류한다. 정신의료가 환자의 편에 서야 하지만 사회 활동에 적격인지 부적격인지를 판단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자본주의 논리는 출산과 육아마저 비용 대비 효율에 가둬버린다.

'도쿄 같은 도시에서는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개개인이 오늘날의 질서에 맞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 결과,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의 젊은 세대 상당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다. (p. 174)'

남학생 따로 여학생 따로 몰려 앉는 풍경이 요즘 대학교 강의실 모습이라고 한다. 누군가 옆에 앉을 때 '앉아도 될까요?'라고 물어보고 허락이 있어야 앉는 것이 요즘 청년들의 예의다. 무례함에서 벗어났지만 대신 그 자리에 따뜻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싸늘한 친절함'이 자리 잡았다.

'일례로 여성과 사귀고 싶은 남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과 의사소통해 줄 만한 여성과 만나야 한다. 만약 그 남성이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조건을 여러 개 갖추고 있다면 의사소통은 쉬워진다. (...) 반면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남성은 여성들이 멀리하기 쉽고, 여성과 의사소통할 기회 자체가 줄어든다. (p. 238)'

요즘 홈트도 열심히 하고 그 좋아하는 탄수화물을 멀리한다. 매일 꼬박꼬박 영양제도 챙긴다. 건강을 위해서다. 아내가 내게 주문처럼 하는 말이 있다.
"건강해야 살아야 돼.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의료기술이 발달한 사회에 살다 보니 건강은 더 이상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노화될 권리마저 잃어버렸다.


이틀 후 먹거리를 들고 미안하다며 위층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이사 온 이웃이 우리랑 같은 교회 다니는 분들이란 이야기를 딸아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미안하다면 찾아온 위층 분이 얼마나 고마운지, 아내와 천만다행이라면 마음을 놓았다. 참지 못하고 올라가 따졌다면? 엘리베이터에서야 모른체하며 지낸다지만 교회에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파트의 질서와 예의가 정의랍시고 그 정의를 정의롭게 실현했으면 어쩔 뻔했나. 먼저 살던 이웃처럼 앙금을 갖고 쭉 지냈을 게 분명하다.

아파트의 질서가 예의가 이웃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할리 없다. 가끔씩은 소음이란 불쾌함을 서로 받아들일 때 옛 시절에 이웃들과 나눴던 정을 되찾게 된다.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고, 부자유로 고통받는 사람이 적은 사회가 실현되길,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p. 298)'

쾌적함을 위해 사회가 제시한 기준, 그 틀을 깰 때 오히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에서 벗어나 인간다움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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