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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 생각지도 / 2026년 2월
평점 :
열흘 전 위층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왔다. 윗집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사했으니 정리할 것이 많으려니 했다. 한편으론 걱정도 생겼다. 먼저 살던 사람이 이사 온 후 3개월 동안 조금씩 집을 고치면서 살아서 얼굴 붉히는 일이 생겼고, 서로 앙금이 싹 가시지 않은 채 이사 갔기 때문이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쿵쿵거렸다. 관리실에 조치를 부탁했고 마무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웬걸? 그다음 날은 밤 12시 넘어서까지 뭔가 조립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올라가 따질까 하다가 참았다.
층간 소음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데는 저의가 깔려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도 예의를 지키니 당신도 예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닌가. 내가 지키는 것을 당신은 지키지 않는 건 참을 수 없다. 아파트에서 쾌적함을 누리려면 서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란 틀에 군말 없이 밀어 넣어야만 한다는 생각,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정의가 됐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사회계약, 개인주의와 같은 근대 사상이 동아시아에 침투하면서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p. 7)'
시골 마을에서 자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구마시로 도루는 과거의 시골과 현대의 도쿄를 오가며 변화를 발견했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보다 청결하고 건강하며 질서정연하지만,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어색함이었다.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제약하며 부자유를 만들었다.
질서정연한 거리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눈총을 받는다. 식당에서 아이가 밥투정을 한다든지 운다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조금만 산만해도 ADHD로 규정해 치료대상으로 분류한다. 정신의료가 환자의 편에 서야 하지만 사회 활동에 적격인지 부적격인지를 판단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자본주의 논리는 출산과 육아마저 비용 대비 효율에 가둬버린다.
'도쿄 같은 도시에서는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개개인이 오늘날의 질서에 맞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 결과,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의 젊은 세대 상당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다. (p. 174)'
남학생 따로 여학생 따로 몰려 앉는 풍경이 요즘 대학교 강의실 모습이라고 한다. 누군가 옆에 앉을 때 '앉아도 될까요?'라고 물어보고 허락이 있어야 앉는 것이 요즘 청년들의 예의다. 무례함에서 벗어났지만 대신 그 자리에 따뜻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싸늘한 친절함'이 자리 잡았다.
'일례로 여성과 사귀고 싶은 남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과 의사소통해 줄 만한 여성과 만나야 한다. 만약 그 남성이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조건을 여러 개 갖추고 있다면 의사소통은 쉬워진다. (...) 반면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남성은 여성들이 멀리하기 쉽고, 여성과 의사소통할 기회 자체가 줄어든다. (p. 238)'
요즘 홈트도 열심히 하고 그 좋아하는 탄수화물을 멀리한다. 매일 꼬박꼬박 영양제도 챙긴다. 건강을 위해서다. 아내가 내게 주문처럼 하는 말이 있다.
"건강해야 살아야 돼.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의료기술이 발달한 사회에 살다 보니 건강은 더 이상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노화될 권리마저 잃어버렸다.
이틀 후 먹거리를 들고 미안하다며 위층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이사 온 이웃이 우리랑 같은 교회 다니는 분들이란 이야기를 딸아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미안하다면 찾아온 위층 분이 얼마나 고마운지, 아내와 천만다행이라면 마음을 놓았다. 참지 못하고 올라가 따졌다면? 엘리베이터에서야 모른체하며 지낸다지만 교회에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파트의 질서와 예의가 정의랍시고 그 정의를 정의롭게 실현했으면 어쩔 뻔했나. 먼저 살던 이웃처럼 앙금을 갖고 쭉 지냈을 게 분명하다.
아파트의 질서가 예의가 이웃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할리 없다. 가끔씩은 소음이란 불쾌함을 서로 받아들일 때 옛 시절에 이웃들과 나눴던 정을 되찾게 된다.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고, 부자유로 고통받는 사람이 적은 사회가 실현되길,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p. 298)'
쾌적함을 위해 사회가 제시한 기준, 그 틀을 깰 때 오히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에서 벗어나 인간다움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