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 -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필사 문장 30 좋은 습관 시리즈 34
김선영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 책이어서 그런가?) 이 책을 읽고 글을 남기려고 하니 어떤 상황이 떠올라 빙긋 웃음 짓게 된다. 어릴 때 글짓기 숙제를 하는데 옆에서 선생님이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창피해서 팔로 가리고 쓰고 싶은데 그러자니 치우라고 할 것만 같아 고민스럽다. 하필 또 잘 한다며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이라면 더욱더 난처한 그런 장면이 떠오른다.


PT 받듯 문해력을 익히는 <어른의 문해력>, 깔끔하고 호감가게 글 쓰는 법을 알려주는 <어른들의 문장력>에 이어, 13년 동안 방송 글을 썼던 김선영(글밥) 작가가 이번에는 '지난 4년 동안 매일 필사했던 4,400여 글귀 중 '글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을 고르고 골라 30개로 추려 문장이 왜 마음을 움직였고, 글을 쓰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하나씩 설명 (p. 14)'한 책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 내놓았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로서는 책장을 펼쳐 목차만 살펴봐도 구미가 당겨 안경을 고쳐 쓰게 된다. 어떤 루틴을 만들어야 글을 꾸준하게 쓸 수 있을지, 다채로운 표현을 갖춘 훌륭한 글은 어떤 시선으로부터 얻게 되는지, 인간미 넘치고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글 쓰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이 책은 '필사의 문'을 열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는 분들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앞으로 30일 동안 매일 초대장을 보낼 테다. (p. 14)'

김선영 작가는 '나도 잘 쓰고 싶다'라는 바람 때문에 필사한다고 말한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하는데 필사가 두 가지 모두를 만족한다는 것이다. 글쓰기 재료가 되는 배경지식을 넓힐 수 있고, 다양한 글 구조를 접하다 보니 문해력과 문장력이 좋아진다. 필사한 글에서 생각을 이어갈 수 있으니 글감이 마르지 않는다. 그리고 어휘력이 풍부해져 단조로운 글에서 탈출할 수 있다.


'마감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 두 바퀴가 당신의 멈춰있는 차를 굴릴 테니까. (p. 95)'


짧은 글이지만 글을 쓸 때 나 나름 추구(만) 하는 절차가 있다. 어떤 내용을 담을지 구상하고 (첫 문장 쓰기가 어렵지만)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글을 쓴다. 단락의 순서를 바꾼 다음 정확한 자료를 찾아가며 글 내용을 보완한다. 맞춤법 검사기의 도움을 받아 글을 수정한다. *중복되거나 우리말로 바꿀만한 낱말을 찾아 고친다. 그리고 읽어본다.

읽다가 턱 걸리면 표현을 바꾸거나 문장을 아예 뜯어고친다. 다시 맞춤법 검사를 하고 글쓰기를 마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복되거나~~'부터 절차를 생략한다. '오늘이 리뷰 마감이니까 다음부터...' '그래도 추구하는 절차이니 지켜야지...' 갈등하다가 결국 게으름에게 결정권을 내준다. (이 후기도 결국 게으름의 결정에 따를 것이 뻔하다. 오늘이 마감일이니...)

'문장의 리듬감은 미적인 쾌감도 준다. 우리가 글을 읽는 이유는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목적만은 아니다. 즐겁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내용에서도 오지만 형식에서도 온다. 문장이 지닌 균형과 변주의 팽팽한 대결이 주는 긴장감이다. 리듬이 구현한 아름다움이다. 리듬감이 있는 문장을 눈으로 읽다 보면 마치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다. 베껴 쓰면 리듬은 더욱 깊숙하게 침투하여 내 몸에 달라붙는다. 가끔 시를 필사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p. 170)'

내 글에 제일 구현하고 싶은 것이 '글의 리듬감'이다. 김선영 작가가 써놓은 (위의) '리듬감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귀를 읽는 순간 더 간절해졌다. 그런 글이 완성돼서 흥얼거리듯 즐겁게 읽는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글을 발췌해두고 가끔 읽기만 했지 필사는 하지 않았다. '리듬이 깊숙하게 침투'하도록 본격적으로 필사를 해야 할까 보다.


'누군가 '자기 계발의 끝판 왕은 책 쓰기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책을 쓰면서 성장한다. 책을 쓸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애쓴다. 애쓴 만큼 더 자란다. 책이 나오면, 나는 내가 내뱉었던 말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다. 책을 쓰면 더 좋은 삶을 살게 된다. (pp. 264, 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일 1페이지 영어 어원 365 - 언어학자와 떠나는 매혹적인 어원 인문학 여행, 202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김동섭 지음 / 현대지성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공연장 사업성 검토 당시 Cirque Du Soleil의 공연 <퀴담>을 관람한 적이 있다. Cirque Du Soleil의 공연장 대부분은 무대가 가운데 있는 원형이다. 도시를 이동하며 공연하기도 하는데 둥근 천막의 조립식 공연장을 가지고 다닌다. 프랑스어 'Cirque'가 서커스란 뜻으로 우리말로 '태양의 서커스'라고 한다.

로마 제국은 우민 정책을 통치수단으로 삼았는데 서커스 circus 제공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때 서커스는 곡예단이 아니라 전차 경주가 열리는 원형 경기장을 가리킨다. (특히 지방을 도는) 서커스, 쇼, 원형광장 등을 뜻하는 단어 circus는 말과 전차가 달리던 로마의 서커스에서 유래됐다.


어원 전문 학자 김동섭 교수의 <1일 1페이지 영어 어원 365>는 제목처럼 '영어 단어 어원에 얽힌 역사, 문화, 신화, 경제, 과학, 종교, 예술, 음식, 스포츠 등 다양한 히스토리를 하루에 하나씩 한 페이지 분량으로 소개 (p. 9)'하는 책이다. 학생 시절, 속성으로 무작정 암기하며 단어를 익히는 공부가 아닌, 조금은 느릿느릿하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호기심을 자극해 가며 단어를 익히도록 도움을 준다.


어린 시절 방학이면 사촌들이 놀러와 함께 어울리곤 했다. 놀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특히 여자 사촌들과 함께 놀거리는 더 없었다. 고무줄놀이를 하기도 그렇고 칼싸움은 더더욱 어울려 놀기 힘들었다. 그래서 주로 방에 둘러앉아 수수께끼를 풀었다. 이를테면
'앞으로 먹고 옆구리로 싸는 것은?'
'버스!'
ㅋㅋㅋ~ 어이없지?
'앉으면 멀어지고 일어서면 가까워지는 건?'
'천장!'
딸, 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헐~ 뭐야?'라며 어이없어 한다.
각 나라별 수도 맞추기도 단골이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수도를 많이 안다.

아일랜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리차드 델리라는 사람은 하루나 이틀 안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 수 있다며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친구들은 설마 하며 놀려댔다. 델리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quiz'라는 말을 벽 여기저기에 썼다. 이튿날 낙서를 본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했고 결국엔 '수수께끼' 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것'이란 뜻으로 quiz란 단어를 사용했다.


고등학생 시절, 체육시간에 테니스 룰을 배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스코어 방식이 낯설어 규칙을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 테니스의 점수는 1점, 2점...으로 올라가지 않고, 한 포인트 올릴 때마다 15, 30, 40으로 점수를 계산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0'을 '제로'가 아니라 'Love'라고 한다. 40 대 0을 '포티 제로'라고 하는 식이다. 테니스 경기에서 점수가 40 대 40이면 두 번 연속해서 이겨야 하는데, 이때의 점수를 '듀스 deuce'라고 한다. 탁구, 배구, 배드민턴 등이 듀스가 있는 스포츠 종목들이다.

듀스 deuce는 '숫자 2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deux에서 왔다. 즉, 두 선수의 점수가 똑같다는 뜻이다. 정작 어원을 제공한 프랑스어에서는 동점을 의미하는 égalité에갈리테로 용어가 바뀐 것을 보면, 영어가 옛날 전통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p. 386)'

아 참, 테니스에서 0대신 love를 쓰는 이유로 달걀이라는 프랑스어 l'œuf 뢰프의 발음이 영어의 love가 되었다는 썰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책에서 말한다. 달걀 모양이 0을 닮아서인가?


영단어가 갖고 있는 사연을 하나하나 읽노라면, 단어와 엮여있을법한 나의 추억이 생각나고 그 단어에 관한 또 하나,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하게 된다. 그 단어와 나 사이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태 특별한 인연이 생긴다. 하루하루 새로운 영어 단어와 은밀한 둘만의 인연을 만들어 가고 싶다면 이 책을 꼭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 가부장제 체제의 부상과 쇠락, 이후의 새로운 질서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 에디토리얼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들과 부부동반 모임을 할 때마다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주제는 자식들의 결혼과 자녀 출산에 대한 이야기다. 부모 자격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할 때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하는 다 큰 아이의 말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는데 우리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 그럼에도 결혼만큼은 했으면 좋겠다고 강요할 수 있지만, 아이를 가지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낸시 폴브레의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은 가부장제와 경제, 사회, 정치를 아우르는 교차정치경제학이란 새로운 학문으로 돌봄 노동이 얼마나 과소평가되었고, 가족, 경제, 사회 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이 미쳤는지를 설득력 있게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낸시 폴브레는 매사추세츠 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로 돌봄과 젠더를 오랫동안 연구한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다. 그는 경제를 협소하게 정의하는 전통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그동안 무시된 가족과 여성이 담당해온 무상 돌봄 노동을 경제적인 것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 1부에서는 신고전파 경제학,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등 기존 이론들의 개념을 설명하며 재정의하고 확장한다. '재생산' 개념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생산 비용의 분배 문제도 중요하게 다룬다. 2부에서는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착취, 자본주의 제도 그리고 복지국가, 젠더 불평등, 돌봄 비용 등 가부장제 체제의 부상과 쇠락 그리고 최근의 백래시에 이르는 새로운 질서까지를 서사적으로 서술한다.


'가부장제 체제란, 가부장적 권력 구조가 다른 집단 권력 구조와 역사적으로 고유한 방식으로 중첩되고 교차하는 체제를 뜻한다. 권력 구조는 공통점을 가진다. 법, 이념, 자산 분배는 특정 집단에게 집단적 이득과 손해를 안긴다. 평평하지 않은 경기장과 부러진 사다리, 빈곤의 덫, 유리천장, 모성 벽, 끈적끈적한 바닥 같은 언어는 구조적 제약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p. 21)'

돌봄 노동을 여성이 전담해서 수행하게 된 것이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다. 저자는 그 원인을 가부장제에서 찾는다. 여성이 돌봄 노동에 특화하도록 가부장 제도가 경제, 사회 제도와 협동했고, 부산물로 힘을 얻어 강화했다. 가부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돌봄 노동을 착취했다.

돌봄 노동도 생산을 수반하는 노동력이다.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돌봄이라는 가치를 권력으로 몰수한 셈이 되니 착취가 되는 것이고, 부당하게 여성 집단을 이용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비용을 들인 돌봄은 아이라는 '공공재' 키워냈지만, 그 노동의 편익은 돌봄 노동을 한 엄마에게만 고스란히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사회가 나눠가진다. 돌봄 노동을 제공하지 않고 아이라는 공공재를 편익만 누렸다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에서 그토록 싫어하는 무임승차에 해당되기도 한다. '공공재' 개념의 돌봄 논리는 돌봄에 왜 국가의 재정이 지원돼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국가가 아이를 양육하는 비용을 양육자에게 별로 지원하지 않으면서 그 아이가 내는 세금으로 양육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출산율은 대체 수준 이하로 떨어졌고 세대 간 이전의 지속가능성은 위태로워졌다 (p. 272)'

국가 재정이 돌봄에 지원되지 않는 한, 돌봄 불이익이 줄어들지 않는 한, 부모는 자식들에게 아이를 가지란 말을 계속 못할 것이다.

'여성에게 이타적 행동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면 타인에 대한 돌봄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상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헌신을 강제할 제도가 필요하다. (p. 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 모리가 화요일에 다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
모리 슈워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군 복무 시절 버스 표를 검사하는 차장이 "군인 아저씨" 하고 불렀다. '나?' 어색했다. 이제부터 아저씨가 되는 순간이었다. 30대 후반 연수원에서 팀을 나눠 축구 경기를 했다. 공 좀 차던 나는 내게 굴러오는 공을 냅다 찼다. 난생처음 헛발질을 했다. 신체적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50대 초반, 통로에 쓰러지는 책상을 (내 딴에는) 가볍게 뛰어넘었다.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손목이 부러졌다. 장애물을 피해 돌아서 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신체적 자신감은 사라졌다.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정신적으로도 예전의 당당함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정년퇴직 전 한직에 있을 때는 사회적으로도 쓸모를 다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퇴직한 다음엔 고정 수입이 없어져 상대적인 경제적 빈곤마저 찾아왔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청소년, 청년, 중년이라는, 나이가 규정하는 정체성을 하나씩 잃고 노년의 문턱에 다다랐다.


요즘 나는 아내와 한강을 걸으며 이런 질문을 한다. "저 앞에 오는 사람하고 나하고 누가 더 나이 들어 보여?" 아내가 대답한다. "비슷해" 그럼 나는 그건 아니지란 표정으로 "에이~ 정말?"
방으로 들어가는 딸아이를 붙잡고 질문한다. "(TV에 나오는) 저 사람이랑 아빠랑 누가 늙어 보여?" 냉정한 딸의 대답이 돌아온다. "똑같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 다시 잘 봐봐~". "똑같다니까?" 단호한 대답이 섭섭해 딸아이에게 눈을 흘긴다.

거울 속에 낯선 나를 볼 때마다 '늙음'을 인정하기 싫어 고개를 돌리곤 한다. 아무 데서나 침을 뱉거나, 음식점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우측통행인데 어깨에 힘 빡 주고 가운데로 걸어오는 나이 든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내는 '저런 사람들 때문에 나이 든 사람 모두 욕먹는 거야'라고 말한다. '저런 사람들' 속에 내가 해당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도 (치매나 어떤 병 하나 없이 100세를 사셨으니) 건강하신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기 전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 TV 보시는 걸 낙으로 하루하루 소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의 인생 가운데 몇 살까지를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나 나름 기준을 정해봤다.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그래서 뭘 언제까지 해야지라는 목표가 삶에서 사라진다면, 그때까지.

그런 삶이 내게 온다면 참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스콧 니어링이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7주 후 자신의 의지로 숨을 거두었다는 걸 자서전에서 읽고 나도 같은 결심을 했었다. 삶이라 인정할 수 없는 순간에 결행하기로. '늙음!' 참 인정하기 싫다. 내가 노인 취급을 받는다니...

사람들은 노인을 이렇게 본다. 고집불통에 잔소리가 많고, 답답하고,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관성적이고, 눈치 없고, 불만투성이다. 전성기를 지난 노인은 비틀대며 걷고, 존경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새겨들을만한 말이 하나도 없다. 경쟁력도 없고, 비효율적이어서 이젠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이다. 누릴만한 건 다 누린 사람들. 언뜻언뜻 나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그런 노인이 되어간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는 우리에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로 알려진 모리 슈워츠의 유고집이다. 모리 교수의 아들 롭 슈워츠가 아버지가 떠나고 난 한참 뒤에 이 책의 원고를 책상 서랍에서 발견했다.

'이 책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는 65세 이상과 은퇴자를 주 대상으로 삼지만 그 외 모든 연령대에도 해당한다. 중년에게는 미래의 모습을 그릴 유용한 토대가 될 것이다. 현재 삶에 적용할 내용도 많지만 나이 든 부모를 더 잘 이해하고 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p. 12)'

6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 같은 사람, '늙음'을 거부하는 나에게 모리 교수가 건네는 첫마디 말은 나이 듦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 내재된 노인 차별주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나이 든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인정해야 남은 인생에서 나다운 삶, 성장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이제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자. (...) "받아들이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맞아, 난 점점 늙고 있지. 지금도 그렇고, 계속 그럴 거야. 늙음을 경험할 기회와 그것이 가져올 새 기회들이 생기니 고맙지'." (p. 266)'

나의 나머지 생을 살아갈 삶의 지침서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60대에 접어들면서 주변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 모습이 낯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앞에 잔뜩 낀 안개가 비로소 걷히는 기분이다. 어쩌면 건강하고 아름답게 내 삶을 마무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모리 교수의 지혜로부터 얻었다. 노후는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잘 살아내야 할 인생의 한 시기일 뿐이다.

'늙는 방법을 아는 것은 지혜의 걸작이며, 삶이라는 위대한 예술에서 가장 까다로운 장이다.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아미엘의 일기> 중에서 (p. 278)'

덧) 당신이 만약, 지금 30대를 넘어 아직 60대가 되지 않았다면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우선 나처럼 대비 없이 60대를 맞이해버려 황망해하는 일이 없을 테고, 그다음 이 책을 읽고 노후를 준비한다면 덤으로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게 돼서 살아계신 부모님과의 좋은 관계를 얻게 될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전자 스위치 - 최신 과학으로 읽는 후성유전의 신비
장연규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이긴 하지만 어머님이 69세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 어머님의 암 유전자가 나에게도 전해졌을까 봐 아내는 큰 걱정을 한다. 오메가3, 밀크씨슬 등을 꾸준히 챙겨준다.

어느덧 암으로 고생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나이가 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온 친구는 십여 년 전부터 십이지장 암으로 시작해 여기저기 전이된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 불안한 나머지 그 친구는 아이 둘 모두 유전자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 결과 암에 취약한 체질임이 밝혀졌다. 이제 두 아이는 자주 암 검사를 받아 앞으로 자신의 질병이 될지도 모를 암에 대비해야만 한다.


'많은 생명 현상을 유전학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유전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생명 현상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미스터리 생명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탄생한 학문이 후성유전학입니다. (p. 8)'

장연규 교수의 <유전자 스위치>는 후성유전의 신비를 다룬 책으로 후성유전과 유전학의 차이점과 후성유전학의 기본 지식과 개념을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유전학과 유전의 틀을 깨는 미스터리한 생명 현상 소개는 후성유전학의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후성유전학의 원리와 적용 사례를 상세하게 실었고, 그 원리를 의학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지막 장에서 다뤘다.


생명체의 형질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라는 유전물질이 결정한다. 그래서 일란성 쌍둥이는 똑같은 DNA를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당연히 같은 형질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자라면서 둘의 형질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같은 DNA를 가졌음에도 형질이 다른 이유는 뭘까?

'우리 몸에는 DNA 속의 유전정보 중에서 어떤 것을 사용할 것인지 또는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조절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시스템이 바로 '후성유전 조절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9)'

어쩌면 생명체가 단순한 모양이었을 텐데, 이 시스템 덕분에 인간과 같은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했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의 형질 차이가 돌연변이 또는 후성유전 시스템이 다르게 작동한 결과인 셈이다. 게다가 다르게 새겨진 후성유전적 정보가 DNA처럼 유전됨은 물론 후성유전 조절 시스템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유전학 지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은 모두 후성유전이 그 원인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후성유전의 신비함에서 주목할 대목은 나 또는 내 친구의 아이들 경우와 같이 부모로부터 암이 생기기 쉬운 DNA를 받았을 때, 환경을 바꿔 '후성유전 조절 시스템'으로 극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유전자의 기능 오류로 암세포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유전자의 기능 오류는 돌연변이가 주된 원인이지만 후성유전 시스템의 오류에 의해서도 생긴다. 약물로 후성유전 시스템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면? 암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후성유전학 관련 약물이 암 치료의 새로운 대안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자식 세대에게 약간 능력이 부족하거나 또는 질병에 약한 DNA를 물려줬다면 부모로서 참 난처한 일이다. 이를 알았을 때 부모와 관계가 불편하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을 읽고 후성유전적 변화로 이를 개선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후성유전학에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전자가 같을지라도 선택과 노력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도 과학적으로 그 사실이 뒷받침된다면 얼마나 안심이 될까. 후성유전학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응원해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방향을 정할 때, 현명한 선택과 노력으로 유전자도 바꾸고 타고난 운명도 바꿀 권리가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p. 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