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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 모리가 화요일에 다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
모리 슈워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11월
평점 :
군 복무 시절 버스 표를 검사하는 차장이 "군인 아저씨" 하고 불렀다. '나?' 어색했다. 이제부터 아저씨가 되는 순간이었다. 30대 후반 연수원에서 팀을 나눠 축구 경기를 했다. 공 좀 차던 나는 내게 굴러오는 공을 냅다 찼다. 난생처음 헛발질을 했다. 신체적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50대 초반, 통로에 쓰러지는 책상을 (내 딴에는) 가볍게 뛰어넘었다.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손목이 부러졌다. 장애물을 피해 돌아서 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신체적 자신감은 사라졌다.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정신적으로도 예전의 당당함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정년퇴직 전 한직에 있을 때는 사회적으로도 쓸모를 다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퇴직한 다음엔 고정 수입이 없어져 상대적인 경제적 빈곤마저 찾아왔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청소년, 청년, 중년이라는, 나이가 규정하는 정체성을 하나씩 잃고 노년의 문턱에 다다랐다.
요즘 나는 아내와 한강을 걸으며 이런 질문을 한다. "저 앞에 오는 사람하고 나하고 누가 더 나이 들어 보여?" 아내가 대답한다. "비슷해" 그럼 나는 그건 아니지란 표정으로 "에이~ 정말?"
방으로 들어가는 딸아이를 붙잡고 질문한다. "(TV에 나오는) 저 사람이랑 아빠랑 누가 늙어 보여?" 냉정한 딸의 대답이 돌아온다. "똑같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 다시 잘 봐봐~". "똑같다니까?" 단호한 대답이 섭섭해 딸아이에게 눈을 흘긴다.
거울 속에 낯선 나를 볼 때마다 '늙음'을 인정하기 싫어 고개를 돌리곤 한다. 아무 데서나 침을 뱉거나, 음식점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우측통행인데 어깨에 힘 빡 주고 가운데로 걸어오는 나이 든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내는 '저런 사람들 때문에 나이 든 사람 모두 욕먹는 거야'라고 말한다. '저런 사람들' 속에 내가 해당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도 (치매나 어떤 병 하나 없이 100세를 사셨으니) 건강하신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기 전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 TV 보시는 걸 낙으로 하루하루 소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의 인생 가운데 몇 살까지를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나 나름 기준을 정해봤다.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그래서 뭘 언제까지 해야지라는 목표가 삶에서 사라진다면, 그때까지.
그런 삶이 내게 온다면 참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스콧 니어링이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7주 후 자신의 의지로 숨을 거두었다는 걸 자서전에서 읽고 나도 같은 결심을 했었다. 삶이라 인정할 수 없는 순간에 결행하기로. '늙음!' 참 인정하기 싫다. 내가 노인 취급을 받는다니...
사람들은 노인을 이렇게 본다. 고집불통에 잔소리가 많고, 답답하고,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관성적이고, 눈치 없고, 불만투성이다. 전성기를 지난 노인은 비틀대며 걷고, 존경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새겨들을만한 말이 하나도 없다. 경쟁력도 없고, 비효율적이어서 이젠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이다. 누릴만한 건 다 누린 사람들. 언뜻언뜻 나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그런 노인이 되어간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는 우리에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로 알려진 모리 슈워츠의 유고집이다. 모리 교수의 아들 롭 슈워츠가 아버지가 떠나고 난 한참 뒤에 이 책의 원고를 책상 서랍에서 발견했다.
'이 책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는 65세 이상과 은퇴자를 주 대상으로 삼지만 그 외 모든 연령대에도 해당한다. 중년에게는 미래의 모습을 그릴 유용한 토대가 될 것이다. 현재 삶에 적용할 내용도 많지만 나이 든 부모를 더 잘 이해하고 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p. 12)'
6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 같은 사람, '늙음'을 거부하는 나에게 모리 교수가 건네는 첫마디 말은 나이 듦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 내재된 노인 차별주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나이 든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인정해야 남은 인생에서 나다운 삶, 성장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이제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자. (...) "받아들이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맞아, 난 점점 늙고 있지. 지금도 그렇고, 계속 그럴 거야. 늙음을 경험할 기회와 그것이 가져올 새 기회들이 생기니 고맙지'." (p. 266)'
나의 나머지 생을 살아갈 삶의 지침서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60대에 접어들면서 주변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 모습이 낯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앞에 잔뜩 낀 안개가 비로소 걷히는 기분이다. 어쩌면 건강하고 아름답게 내 삶을 마무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모리 교수의 지혜로부터 얻었다. 노후는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잘 살아내야 할 인생의 한 시기일 뿐이다.
'늙는 방법을 아는 것은 지혜의 걸작이며, 삶이라는 위대한 예술에서 가장 까다로운 장이다.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아미엘의 일기> 중에서 (p. 278)'
덧) 당신이 만약, 지금 30대를 넘어 아직 60대가 되지 않았다면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우선 나처럼 대비 없이 60대를 맞이해버려 황망해하는 일이 없을 테고, 그다음 이 책을 읽고 노후를 준비한다면 덤으로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게 돼서 살아계신 부모님과의 좋은 관계를 얻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