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질문
이화열 편역 / 앤의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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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이 아닌 새로운 시각을 지니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인생이란 여정 가운데 문득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한 건,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으면서였다. 여정의 반을 훌쩍 넘어서야 '넌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라는 질문을 하다니... 그나마 이곳까지 별 탈 없이 왔으니 망정이지 미로에 빠졌다면? 끔찍하다. 되돌아갈 수 없는 여행이어서 더욱 그렇다.


'오랫동안 내 완벽한 아침 식탁은 시사잡지 <트 익스프레스'Express>의 부록이 배달되는 주말이었다. 부록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실리는 <프루스트의 질문 Questionnaire de Proust>을 읽는 즐거움 때문이다.' - 에세이스트 이화열

이화열 편역의 <프루스트의 질문>은 마르셀 푸르스트가 질문에 답을 적은 노트다. 프랑수아즈 사강, 움베르토 에코, 카미유 클로델, 우디 앨런, 스티븐 킹, 맷 데이먼 등 셀럽들이 적어놓은 답도 있다. 철학적 질문부터 재미있는 질문까지 위대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100개가 이 앨범에 담겨있다.


첫 번째 질문,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덕목은?
'진지함, 만약 내가 경망스러워진다면 덕목도 바뀔 것이다.' 프루스트의 답이다.
카미유 클로델은 '없다. 모든 덕목은 권태롭다.'라고 답했다.

나의 답은 '신독(愼獨)'이다. 삼갈 '신愼'에 홀로 '독獨', 출처는 <대학>으로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신독에 완성은 없고 계속 노력해야겠지만 좌우명으로 삼아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삶을 살고자 '신독(愼獨)', 이 말의 뜻을 품고 살아간다.

중략

백 번째 질문,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주피터의 단검에 찔려 죽듯이 벼락에 맞아 죽고 싶다.' 소설가 미셀 투르니에
'스코틀랜드의 강가에서 좋은 와인 한 병을 움켜쥐고.' 영화배우 엠마 톰슨

뜻밖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죽음도 뜻밖에 일어나는 일이니) 난 이미 이 질문의 답을 여러 번 생각했다. 제정신인 상태에서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 잠자다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신은? 아직 이른 질문이라고 생각하나. 생각해둬서 나쁠 건 없으니 생각해 보길... 생각할 때마다 바뀐다. 그래서 이 앨범에는 질문에 세 번까지 답을 적도록 여백이 마련돼있다.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는 인생은 안갯속을 걸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게 없으니 그렇다.

질문은 앞에 깔린 안개를 걷어내준다. 흐릿했던 것들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한다. 질문은 질문을 데리고 온다. 이젠 질문에 답하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와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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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꿀 테크놀로지 2024 - 닛케이가 전망한 기술 트렌드 100
닛케이BP 지음, 윤태성 옮김 / 시크릿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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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는 지난해 9월 인간형 로봇, 옵티머스 1세대 모델을 공개했다. 그로부터 15개월이 지난 며칠 전 옵티머스 2세대 모델 영상을 공개했다. 스쿼드를 하기도 하고, 달걀을 손가락으로 집어 옮기는 등 정교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발도 신고 있다. 지형에 맞는 신발을 신으면 모든 지형에 적응 가능하다는 뜻이다.


닛케이의 매년 발행하는 시리즈 <세계를 바꿀 테크놀로지 2024>는 AI, 건축/토목, 전기/에너지, 모빌리티, 의료/건강/식농, 라이프 & 워크 스타일, IT/통신 이렇게 7개 분야를 추적해 2024년 주목해야 할 기술 100개를 소개한다.

시간을 조금 더 건너뛰어 2030년 기대되는 테크놀로지를 살펴보자. 1위는 '운전자가 없는' 자동차를 도로 등에서 자율주행하는 기술인 '완전 자율주행(모빌리티)'이다. 레벨을 5개로 나누는 데 현재 운전자가 탄 상태에서 어느 정도 자율주행 가능한 레벨 3 수준에 와있다.

2위는 디지털 공간 위에 작업 현장을 재현하는 '산업 메타버스(라이프 & 워크 스타일)'기술이다. 메타버스를 통해 숙련자가 원격 작업을 함으로써 인력과 숙련공 부족을 메울 수 있다. 3위는 간호, 요양에 쓰이는 '간호 로봇(의료, 건강, 식농)'이다. 이동 보조, 배설 지원, 지켜보기, 커뮤니케이션, 목욕, 요양 업무 지원이 가능하다.

4위는 2030년 실용화 될지도 모를 '핵융합(전기, 에너지)'이다. 1g의 연료로 석유 8톤에 해당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얻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기술이다. 5위는 자외선과 적외선을 에너지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투명 태양광 발전용 패널(건축 토목)'로 벽면, 천창 등 유리를 설치할 수 있는 곳에 대체 가능한 기술이다.

그밖에 순위 5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거론되지 않은 분야 가운데 AI로 실제와 비슷하게 만든 이미지, 동영상, 음성 등을 탐지하는 '딥페이크 대책(AI)' 기술, (앞서 이야기한 옵티머스에 적용되고 있는) 뇌파 등을 이용해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기술 'BMI(IT 통신)'도 2030년 기대되는 테크놀로지다.


한빛미디어 박태웅 의장에 따르면, 테슬라가 선보인 이 휴머노이드 로봇은 두뇌가 AI로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이 명령하는 알고리즘 대신 Viosion Sensor로 보면서 스스로 학습하고 행동한다. 앨런 머스크의 꿈이 증강 인간, 즉 인간의 몸과 컴퓨터를 결합하여 인간을 증강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 모양의 로봇을 자신의 뇌로 조정하는 슈퍼 휴먼이 되는 것이다. 어떤 행성에서도 살 수 있는 다행성 종, 사이보그다.

박의장은 앨런 머스크 같은 사람을 장기주의자라고 말한다. 이들은 인류가 멸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과연 호모 사피엔스가 사이보그로 진화하는 시대가 오는 건가? 몇몇 슈퍼 엘리트들이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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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남자
오세영 지음 / 델피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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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이 있던 날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관객 수 900만 명을 돌파했다. 그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전두광의 대사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

1811년 12월 18일, 당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서북민 식자층과 굶주림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촌민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들어 올린 봉기의 횃불은 실패해 홍경래의 '난(반역)'이 됐다. 반면 1789년,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향한 제3계급(평민)의 불만에서 비롯된 봉기는 성공해서 새로운 정부와 사회를 건설해낸 역사적 전환점인 사건, 프랑스 대'혁명'이 됐다.


대원수 홍경래를 가까이서 호위하는 안지경은 난이 실패로 끝나자 쫓기는 신세가 돼버린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중 배질 홀 선장이 지휘하는 영국 배 알세스트 호에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배를 타고 고생 끝에 대서양의 외딴섬에 다다르게 되는 데, 그곳은 바로 나폴레옹의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이다.

"혁명과 민란은 다른 것이네. 민란은 억압에 일시적으로 항거하는 것이지만 혁명은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니까."
안지경은 당혹스러웠다. 하면 홍경래의 난은 폭동에 불과했단 말인가. (...)
경전은 백성을 위한 나라를 치자의 덕목으로 꼽고 있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나라는 다루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위민이 아니고 여민(與民)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많은 혁명이 구제도보다도 못한 신악(新)을 낳으면서 실패로 돌아갔지.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은 다르네. 새로운 세상을 열었으니까." (p. 181)'

그곳에서 나폴레옹을 만나 프랑스 대혁명을 공부하게 된 안지경은 홍경래가 실패한 여러 가지 이유를 짚어보며 프랑스대혁명을 이끌었던 제3신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마침내 안지경은 홍경래가 못다 한 혁명을 이루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향한다.

'방향은 분명히 하되, 시일을 두고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차분하게 백성들의 반응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프랑스대혁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와 레종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p. 311)


10.26 사건 그리고 그 당시 주도했던 자들이 혁명이라 부르던 12.12 사태의 한가운데 서서, 나는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내 인생엔 중요한 시기였겠지만 반란을 꾸민 자들에게 나의 고3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죽이는 혁명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듯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하나회라는 군인 집단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 이듬해 재수생이었던 나는 지하철역에서 검문 당할 때마다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바닥에 쏟아야 했고 일 년 내내 최루탄을 맡으며 공부했다. 여러모로 수치스러웠고 불편했었다.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불붙은 6.10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6.29선언을 이끌어내 민주주의가 찾아오는가 했지만 군사독재는 여전했다. 더디지만 민주주의는 성숙해져 갔다. 그러나 다시 역사의 퇴행이 시작됐다.


<베니스의 개성상인>, <자산어보>로 익히 알려진 오세영 작가의 <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남자>는 홍경래의 난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Fact에 작가의 상상력 Fiction을 더한 팩션(Faction)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두 사건 모두 억압에 반발해서 민중이 봉기를 한 비슷한 상황인데, 그 결과가 전혀 다름에 의문을 갖는다. 한쪽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한쪽은 비전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 그 차이다.

또 하나, 홍경래의 봉기가 실패로 끝나 '난'으로 기록된 것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소설을 통해 작가는 말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아직 미완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홍경래를 이어 안경직이 나타났듯이 양극화가 심화돼서 불만이 쌓이고 옷을 걸만한 작은 못이 벽에 생기는 순간, 혁명을 이어갈 인물이 계속해서 나올 테니 말이다. 어떤 집단이 가로막고 나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제3계급의 봉기는 끊임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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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에 진정 정답이 있을까요? 리뷰글 잘 읽었어요.
 
나, 영원한 아이 (양장) - 2019 세종도서 교양부문
에곤 실레 지음, 문유림.김선아 옮김 / 알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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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까운 변두리 툴룬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배운 시간을 빈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중퇴하기까지 3년에 불과하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빈 분리파'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표현법을 마련한다.

빈 미술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에곤 실레의 그림은 특별하지 않은 '잘 그린' 풍경 그림이었다. 점차 자신만의 내면과 선을 잇는 그림을 그리게 되고 클림트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표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가 된다.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모든 것들' 혹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투쟁'이었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에 대해 탐구하고, 인간 내면의 관능적인 욕망에 대해 연구하고, 그로부터 인간의 육체를 그의 불안과 의심의 반영인 듯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묘사했다. 인물을 그릴 때 작품의 배경은 백지상태로 두어 그의 고독과 단절감을 드러내었다. (p. 150)'

회화는 진실만을 보여줘야 한다고 실레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적 윤리가 꺼려 하는 인간 본래의 욕망, 성(性)과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을 만약
두 개의 감정으로 나눈다면,
웃거나 우는 것 (p. 30)'

1914년에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에디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배속에 아이를 가진 채 독감에 걸렸고 이로 인해 죽었다. 그 시대에 이단아였던 에곤 실레도 곧이어 스물여덟 살에 그의 아내를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궁극적인 감각, 그것은 종교와 예술 아닌가.
자연은 중간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곳은 신이 존재하는 곳이며, 나는 그를 강하게,
더욱더 강하게, 저 끝까지 느끼고 있다.

나는 '현대' 예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는 '영원한' 예술만이 존재할 뿐이라 믿는다. (p. 141, 자화상을 위한 스케치 중에서)'

나의 편견에 기댈 때, 에곤 실레의 그림은 퇴폐적이고 외설적이어서 거부감이 든다. 게다가 그의 글과 시는 낯설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텍스트를 잘 다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레의 조국 오스트리아에서는 그의 그림을 전시할 때 그의 글도 같은 비중으로 전시한다고 한다.


'글은 에곤 실레가 자신을 표현하면서 그림만큼 중요한 표현 수단이었고, 시를 통해서 그림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세밀한 감성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드러냈다. 시는 그의 또 다른 캔버스였다. (p. 148)'

에곤 실레의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나는 자코메티와 그의 작품이 떠올렸다. 메마른 듯 뒤틀린 선과 색 그리고 글이 에곤 실레의 실존이라면, 자코메티의 실존은 꽉 찬 세계의 짓눌려 평생 침식당해 약하디 약하고 마른, 불안한 존재다. 두 실존이 겹쳐 보였다.

'사람은 자기가 느껴본 만큼만 세상을 볼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에곤 실레가 보는 세상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글을 번역하는 건, 에곤 실레는 죽었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글을 읽는 우리. 그리고 이 세상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p. 5, 옮긴이의 말 - 김선아)'

나도 살아있어 죽은 에곤 실레의 실존을 읽고 본다. 영원히 아이로 기억되는 에곤 실레의 실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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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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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소설은 모두 집에 관한 이야기다. (p. 290)

대학 졸업 후 얻은 직장은 집에서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었다. 어찌어찌하다 늦어지면 집에 못 들어갈 때가 잦았다. 부득이하게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자취를 했다. 거여동, 당시 그 동네는 아파트는 없고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인근의 공수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제법 사는 동네였다.

전세로 방을 얻은 첫 번째 집은 반지하였다. 집주인도 세입자였는데 내게서 받은 전세금으로 자신들의 전세금에 보탰다. 남편은 환경미화원이었고 아내도 일을 했다. 혼자 생활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여자 집주인이 빨래를 해주곤 했는데 남편이 이를 문제 삼아 부부 싸움을 하는 눈치였다. 이사한 지 3개월 만에 다른 집을 알아봤고 이사했다.

이번엔 반지하에서 한 층 올라간 1.5층이었다. 그 집 주인도 세입자였고 내 전세금은 첫 번째 집과 마찬가지로 쓰였다. 남자의 직업은 이웃한 곳에 있는 공수부대의 군인으로 계급은 중사였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집주인이 세입자가 아닌 집으로 이사했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혜진의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집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집에 사는 사람들, 집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관계에 더 가까운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집과는 무관해 보이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만 겨우 집이라는 공간을 설명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p. 290)

'어디 사세요?'라는 물음에 대답이 즉각적일 수 없다. 대화의 흐름상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OOO에 살아요'란 대답으로 우선 장소를 특정할 수 있다. '아파트도 있고 주택도 있는 동네네요?' 이쯤 되면 집의 형태를 알려줘야 한다. '아파트는 아니고 주택이에요. 다세대.' '요즘 주택도 집값이 제법 나가죠?' 이 질문엔 주거형태를 알려줘야 한다. '전세예요' 또는 '월세예요'

'어디 사세요'라는 집과 관련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대답 속에 사회적 모순, 개인의 욕망 등 모든 상황과 역학관계가 다 들어있다.

(중략)

<산무동 320-1번지>에서는 세입자와 세입자의 관계를 다룬다. 호수 엄마는 남편과 함께 재개발 동네에 빌라를 여러 채 갖고 있는 집주인 장 선생의 일을 대신한다. 장 선생이 엉망인 이 동네에 오는 것을 꺼려 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을 대신해 월세 독촉을 하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관리를 잘 하며 사는지 살피는 대가로 호수 엄마는 세를 일부 덜 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절박한 호수 엄마와 세입자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 장 선생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허름한 동네에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여기 싹 철거되고 아파트 들어서면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돈 있는 사람들 세 주고 나면 월세 받으러 다닐 일도 없지. 여러 말할 거 없어요. 재개발 안 되는 게 우리한텐 고마운 일이야. 아닌 말로 재민 엄마 당장 나가겠다고 하면 세입자를 또 무슨 수로 구해요. (p. 169)'


<축복을 비는 마음>의 인선은 양 사장 밑에서 팀을 이끌며 집 청소하는 일를 한다. 어느 날 까탈스러운 신입 경옥을 통해서 양 사장에게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린다. 인선은 더 알게 되는 게 불편하다. 당연시 여겨왔던 일의 정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인선에게는 그 억울함도 상쇄할 만한 마음이 있다.

'경옥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할 땐 마음이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냐고 물었다. 받는 돈은 똑같은데 몇 배나 더 일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하지 않으냐는 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
인선이 답했고 경옥이 물었다.
축복요? 무슨 축복요?
깨끗하게 청소해 드리는 만큼 좋은 일 많이 생기시라고 빌어주는 거죠. (p. 270)'


부동산 공화국, 우리는 살아가는 곳이다. 집을 빼놓고는 그 무엇도 이야기할 수 나라에 살고 있다. 친지, 친구, 이웃... 그 어떤 타인을 만나도 하고 싶은 질문은 '어디 사세요?'다. 그 대답으로 모든 걸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여러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김혜진은 집의 소유와 거주, 임대인과 임차인의 이분법 외에 일어날만한 관계와 마음의 주고받음을 찾아내 이야기한다.

세입자의 집에 방 하나를 임차해 살았던 그때, 돌이켜 보면 조카처럼 여겨 빨래해 주던 집주인 아주머니의 넉넉한 마음과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술이나 한잔하자며 방문을 두드리던 형뻘의 특전사 중사와 그의 아내와 함께 나누던 유쾌한 이야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관계에 가난을 비교하거나 내려다보며 업신여김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이 책을 통해 각자가 간직한 유일하고도 개별적인 집을 한 번쯤 떠올릴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어떤 시절에 내가 머물렀던 집들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단련시키며 기꺼이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pp. 290,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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