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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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소설은 모두 집에 관한 이야기다. (p. 290)

대학 졸업 후 얻은 직장은 집에서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었다. 어찌어찌하다 늦어지면 집에 못 들어갈 때가 잦았다. 부득이하게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자취를 했다. 거여동, 당시 그 동네는 아파트는 없고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인근의 공수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제법 사는 동네였다.

전세로 방을 얻은 첫 번째 집은 반지하였다. 집주인도 세입자였는데 내게서 받은 전세금으로 자신들의 전세금에 보탰다. 남편은 환경미화원이었고 아내도 일을 했다. 혼자 생활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여자 집주인이 빨래를 해주곤 했는데 남편이 이를 문제 삼아 부부 싸움을 하는 눈치였다. 이사한 지 3개월 만에 다른 집을 알아봤고 이사했다.

이번엔 반지하에서 한 층 올라간 1.5층이었다. 그 집 주인도 세입자였고 내 전세금은 첫 번째 집과 마찬가지로 쓰였다. 남자의 직업은 이웃한 곳에 있는 공수부대의 군인으로 계급은 중사였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집주인이 세입자가 아닌 집으로 이사했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혜진의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집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집에 사는 사람들, 집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관계에 더 가까운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집과는 무관해 보이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만 겨우 집이라는 공간을 설명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p. 290)

'어디 사세요?'라는 물음에 대답이 즉각적일 수 없다. 대화의 흐름상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OOO에 살아요'란 대답으로 우선 장소를 특정할 수 있다. '아파트도 있고 주택도 있는 동네네요?' 이쯤 되면 집의 형태를 알려줘야 한다. '아파트는 아니고 주택이에요. 다세대.' '요즘 주택도 집값이 제법 나가죠?' 이 질문엔 주거형태를 알려줘야 한다. '전세예요' 또는 '월세예요'

'어디 사세요'라는 집과 관련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대답 속에 사회적 모순, 개인의 욕망 등 모든 상황과 역학관계가 다 들어있다.

(중략)

<산무동 320-1번지>에서는 세입자와 세입자의 관계를 다룬다. 호수 엄마는 남편과 함께 재개발 동네에 빌라를 여러 채 갖고 있는 집주인 장 선생의 일을 대신한다. 장 선생이 엉망인 이 동네에 오는 것을 꺼려 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을 대신해 월세 독촉을 하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관리를 잘 하며 사는지 살피는 대가로 호수 엄마는 세를 일부 덜 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절박한 호수 엄마와 세입자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 장 선생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허름한 동네에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여기 싹 철거되고 아파트 들어서면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돈 있는 사람들 세 주고 나면 월세 받으러 다닐 일도 없지. 여러 말할 거 없어요. 재개발 안 되는 게 우리한텐 고마운 일이야. 아닌 말로 재민 엄마 당장 나가겠다고 하면 세입자를 또 무슨 수로 구해요. (p. 169)'


<축복을 비는 마음>의 인선은 양 사장 밑에서 팀을 이끌며 집 청소하는 일를 한다. 어느 날 까탈스러운 신입 경옥을 통해서 양 사장에게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린다. 인선은 더 알게 되는 게 불편하다. 당연시 여겨왔던 일의 정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인선에게는 그 억울함도 상쇄할 만한 마음이 있다.

'경옥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할 땐 마음이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냐고 물었다. 받는 돈은 똑같은데 몇 배나 더 일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하지 않으냐는 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
인선이 답했고 경옥이 물었다.
축복요? 무슨 축복요?
깨끗하게 청소해 드리는 만큼 좋은 일 많이 생기시라고 빌어주는 거죠. (p. 270)'


부동산 공화국, 우리는 살아가는 곳이다. 집을 빼놓고는 그 무엇도 이야기할 수 나라에 살고 있다. 친지, 친구, 이웃... 그 어떤 타인을 만나도 하고 싶은 질문은 '어디 사세요?'다. 그 대답으로 모든 걸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여러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김혜진은 집의 소유와 거주, 임대인과 임차인의 이분법 외에 일어날만한 관계와 마음의 주고받음을 찾아내 이야기한다.

세입자의 집에 방 하나를 임차해 살았던 그때, 돌이켜 보면 조카처럼 여겨 빨래해 주던 집주인 아주머니의 넉넉한 마음과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술이나 한잔하자며 방문을 두드리던 형뻘의 특전사 중사와 그의 아내와 함께 나누던 유쾌한 이야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관계에 가난을 비교하거나 내려다보며 업신여김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이 책을 통해 각자가 간직한 유일하고도 개별적인 집을 한 번쯤 떠올릴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어떤 시절에 내가 머물렀던 집들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단련시키며 기꺼이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pp. 290,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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