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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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결정 장애인가 봐~' 식당에서 메뉴 고르는 일이 힘들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저자인 김지혜 교수도 '결정 장애'라는 말이 재미있다는 생각에 수없이 써왔다고 한다. 뭐가 문제일까? '장애'란 부족하고 열등함을 의미하니 장애인을 업신여긴 셈이 된다. 나도 모르게.

'문제는 그가 서 있는 기울어진 세상에서 익숙한 생각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p. 37)'

장애를 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신체적, 정신적인 기능이 제한되어 고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심지어 동성애마저도 고칠 수 있는 병으로 간주한다. 장애, 동성애가 비정상이란 기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차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뿐.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p. 11, 프롤로그)'

저자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차별이 어떻게 정당한 차별로 둔갑하는지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차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해법이 될만한 것들을 논의한다.


아내, 딸아이와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한 건 지난해 시월이었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10월 27일 광화문과 여의도 일대에서 행해질 '동성 결혼 합법화'와 '차별 금지법 제정' 반대 연합예배 참석을 독려하는 광고를 예배시간에 하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하는 죄이고, 차별 금지법은 동성애자에게 특혜를 주는 악법이라는 주장이다. 차별 금지법이 통과된 나라에서 아동들의 성전환 비율이 급증했다는 것도 교회가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말라는 정치적인 발언도 이어졌다. 마음이 불편했다.

'어떤 차별은 종교적인 이유로 요구된다. 종교에 따라, 교리를 이유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리 내에서 차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p. 128)'

딸아이는 유튜브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성소수자의 화장실 출입 문제 등을 예로 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아내는 선뜻 어느 쪽을 선택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성소수자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본다면 해결될 문제라며 내 생각을 말했다.

목사님이 광고할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을 쳐다봤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택함 받았다고 여기는 선한 백성인 성도들이 명백하게 성소수자를 차별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생각이 들었다.

성적 취향을 숨기고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있을 수도 있다. 드러내지 않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성소수자를 구별해 이방인 취급을 한다. 성적으로 문란한 목회자도 있지만 유독 성소수자의 성적 문란함만 비난한다. 그들에게 교회 문을 닫아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대형 교회 목회자 중심으로 10월 27일 집회가 계획됐다. 교회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약자인 성소수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이 파시즘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멘을 외치는 성도들, 예배드리며 같이 있을 때는 다수에 속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면, 직장에서 을의 위치 있다면, 노인이라면, 장애인이라면... 차별받는 소수로 범주화된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어울림의 공포와 싸우는 한 가지 방안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소속되기 위해 '완벽한' 사람이 되려 노력하거나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하는 대신,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으로 환영받는 세상을 상상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최소한 내가 배척당할까 봐 두려워 다른 누군가를 비웃고 놀리고 짓밟는 일이 없도록, 넉넉하게 모두를 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를 꿈꾼다. (p. 209)'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그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인인 나의 신앙고백이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그 차별로부터 비롯된 여러 형태의 폭력은 예수님의 삶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사회에서 배척당한 소수자를 품에 끌어안는 사랑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차별하는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 차별받는 사람에게는 특별함이다. 담장이 높아 담너머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사다리를 줄 것이 아니라 담장을 낮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당연한 것도 특별함도 사라진다.

이 책에서 꺼낸 많은 차별 이야기를 아내와 딸아이에게 들려주려 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22대 국회에 아직 발의조차 되지 않은 차별 금지법을 왜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데 앞장서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봤으면... 그리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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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쓰다, 페렉
김명숙 지음 / 파롤앤(PAROLE&)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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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번역한 비교문학 박사 김명숙은 <사물들> 속 주인공 제롬과 실비, 둘과 파리를 걷기로 했다. <사물들>의 문장과 함께.

'숫자만으로 전달되는 것이 있다. "제롬은 스물넷, 실비는 스물둘이었다."
아무 설명 없이 부러움을 자아낼 숫자다. 그렇긴 해도 그 시기만큼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는 때도 없다. 빠지지 않는 가난까지. (p. 19)'

설렘, 불안, 가난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러운 나이, 스물넷, 스물둘. 파리와 어울리는 나이다. 파리가 늙지 않는 건 청춘의 한때를 보낸 작가들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나는 '다름'에서 '같음'으로 가는 길에 도시를 만났다. 내게 도시는 "아주 깊숙하게 바라볼" 텍스트다. (p. 8)'

저자가 써 내려간 파리의 텍스트를 읽어보자. 눈으로 식도락을 즐기듯... 셰에라자드가 술탄에게 들려준 끝나지 않는 이야기 천일야화처럼 파리 텍스트도 끝이 없다.

좁음에 익숙한 이들이 있는 곳, 카트르파주. 세련된 도시인들 파리지엥. 익숙하고 낯선 사물을 음미하느라 허기에 시달리게 만드는 무프타르 거리.

'영화관은 공간이자 시간이다. (p. 50)' 파리는 어둠 속에서 모두가 바라보는 스크린이다. 욕망의 진열장이기도 하고. 파리에는 휑하니 앞질러 가는 사람, 도시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지만 저마다 다른 이유로 늙어가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이다. 품위 있게 돈 자랑을 실컷 할 수 있는 경매도 파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몽상가들의 도시 파리. '흐릿한 실루엣, 화려하지 만 쓸쓸하고 사랑의 화살이 날아다니지만 사랑이 떠난 자리인 듯한 허전함. 화면 가득 빈틈없이 채워져 있지만 공허함이 떠다닌다. 상상의 끝은 그런가... (p. 79)'

우울과 권태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겨워진다. 하지만 파리라는 공간이 지겨움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기에 파리를 떠난 이들은 파리를 다시 보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얼마나 얘기해야 할까? <사물들>에서 고른 문장은 하나하나가 마들렌이었다. 마르셀이 한 입 베어 물자 순식간에 떠오른 과거의 기억들처럼, 실비와 제롬의 문장을 되뇌자 떠오른 작가, 화가, 음악가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서로 멀게만 느껴지던 그들은 잘 어울렸고, 달라서 풍성했다. (p. 101)'

당신에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은 무엇인가? 파리의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것. 파리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파리는 기억이기에... 내게 마들렌은 <미드나잇 인 파리>이다. 파리의 과거를 무작정 동경하게 만드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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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 어스 - 지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을까
페리스 제이버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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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는 무엇일까? 코끼리? 고래? 챗 GPT에게 물었다. 미국 오리건 주에 있는 꿀버섯(Honey Fungus)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약 2,500~8,500년 동안 자란 이 버섯은 약 9.6제곱 킬로미터에 걸쳐 퍼져 있다. 축구장 약 1,350개 만한 크기다.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의 생각은 좀 다르다. 1960년대에 처음 주장한 '가이아 Gaia 가설'로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는 지구 그 자체'라고 밝혔다. 미국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발전시킨 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암석, 물, 대기와 같은 무생물과 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생물이 거주하는 데 최적의 상태를 만들면서 유지하도록 스스로 조절하는 생명체'다.

'가이아 가설의 핵심은 생명이 지구를 변모시키고 지구의 자기조절 과정에 중요한 일부로 통합되어 있다는 개념이며, 이는 시대를 앞서간 선견지명이었다. (p. 26)'


저자 페리스 제이버는 <비커밍 어스>에서 지구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한다. 그리고 지구의 가장 초기 생명체이자 가장 작은 미생물이 암석, 물, 대기를 어떻게 바꾸는지, 이들보다 더 크고 복잡한 생명 형태인 균류, 식물, 동물 등이 암석, 물, 대기에 어떤 변모를 일으키는지, 세 번째로 최근에 지구에 등장한 인간종이 지구를 얼마나 빠르게 변화시켰는지를 다룬다.

'이 책을 나는 위대한 목격이라 말하고 싶다. (...) 우리가 사는 이 행성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시간을 거쳐 왔는지에 대해서, 살아있는 지구에 대해서, 과학적 증명과 사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우리 공생까지도. (천선란, 이 책을 향한 찬사)'

지하 300미터도 넘는 깊이에서 미생물들이 바위를 흙으로 바꾸고 있다. 비버는 북미 생태계의 모양을 잡았고, 북미에서 인간의 역사와 지질의 모양을 잡았다. 이렇게 만든 토양 생태계를 인간은 쟁기를 들고 땅을 갈아 심각하게 교란한다.

플랑크톤이 바다와 지구 자체의 화학을 조절한다. 켈프 숲은 해수면 아래로 들어오는 햇빛의 분포, 해류의 속도와 방향, 바다눈이 가라앉는 속도에 영향을 미쳐 물속 기후와 서식지를 만든다. 인간종은 플라스틱으로 플랑크톤의 탄소 운반 능력을 방해해 지구의 기온과 기후를 조절하는 생물지질화학 순환을 훼손한다.

수많은 박테리아, 조류, 지의류, 플랑크톤이 응결핵을 만드는 단백질을 생성해 강한 바람, 상승기류에 따라 대기로 올라가 하늘에 자리를 잡고서 비구름을 만들고 강우와 함께 지구 표면으로 돌아온다. 대기 중에 산소는 불꽃의 원천이 되었다. 불은 숲의 나무를 솎아주고 해충을 막는 등 회복력 있는 생태계를 만든다. 불을 의지로 일으켜서 사용할 줄 알게 된 인간종은 에너지의 제약을 초월해 기후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지금도 지구라는 생명체는 대기나 해양, 땅속 구성 물질을 정교하게 조율하고 있으며 대기의 산소, 바다의 염분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구의 온도를 조절한다.

약 45억 년 지질 시대를 45미터로 따질 때 인간종은 작은 동전의 두께만큼 거리인 마지막 2밀리미터를 남겨두었을 때 출현했다. 새내기인 인간이 지구라는 생명체의 암세포가 돼버렸다. 경쟁보다는 공생에 초점을 두고 진화를 거듭해온 생명체 지구에 말이다.

지구라는 생명체는 이제까지 지내온 45억 년 동안과 똑같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지구에 머물며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안락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인간종이 계속 암세포 역할을 한다면 이를 물리칠 수 있는 항암 능력까지 갖추게 될 테고. 그러니 인간종이 사라진다 해도 지구라는 생명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인류 멸종보다 규모가 큰 대멸종도 이겨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인류는 지구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갖춘 존재다. 하지만 그 능력에 한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지구라는 생명체와 통합된 하나의 실체라는 것도.

'"... 저 밖에 지적인 생명체 가 아주 많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고향 행성을 떠날 수 없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생명은 행성 자체의 발현이고 지금 살고 있는 행성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373,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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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농장
조지 오웰 지음, 최성애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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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메이저(마르크스)'는 동물의 삶이 고통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이유를 동물이 노동으로 일군 생산물을 인간들(자본가 집단)이 가로채버리기 때문이라고 연설한다.

'동지 여러분! (...)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인간입니다. 인간을 몰아냅시다. 그러면 굶주림과 중노동도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p. 12)'

올드 메이저는 죽었지만 동물들은 '나폴레옹'과 '스노우볼'이라는 두 돼지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 인간을 쫓아냈다. 농장 이름도 '매이너 농장'에서 '동물 농장'으로 바꾸고 동물들이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칠계명'도 만들어 헛간 벽에 써놓았다.

'칠계명을 단 하나의 구호로 효과적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구호였다. 그는 이 구호가 동물주의의 핵심 원리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p. 41)'

나폴레옹과 스노우볼 사이에 다툼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강아지일 때부터 키운 자신의 수행견(KGB) 아홉 마리와 돼지 '스퀼러(기관지 프라우다)'를 앞세워 스노우볼을 쫓아내고 권력을 점차 독차지했다.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칠계명도 바꿔가며 돼지들의 권력을 확대하고 특권화한다. 돼지 외에 동물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오히려 혁명 전보다 사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끝내 나폴레옹을 비롯한 돼지들은 동물들을 기만하며 인간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인다. 이 장면을 목격한 동물 농장의 동물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동물 농장>은 조지 오웰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에 출간한 정치 우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내세웠지만 스탈린에 의해 독재국가로 변했다.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은 올바른 사회주의를 위해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려고 이 소설을 쓴듯하다.


소련은 1991년 해체됐다. 그럼에도 지금 <동물 농장>을 읽게 되는 건, 냉전시대이던지 아니던지 독재자가 탄생하는 과정은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모습과 사뭇 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우리는 12.3 내란을 일으킨, <동물 농장> 속 독재자 나폴레옹을 무척이나 닮은 한 사람을 겪고 있다.

법치(Rule of Law)를 주장하며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법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칠계명을 교묘히 바꿔 특권을 누리는 나폴레옹과 똑같다.

'뮤리엘 이 클로버에게 읽어준 여섯 번째 계명은 이러했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아무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웬일인지 '아무 이유 없이'라는 세 단어는 그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p. 99)'

'그는 클로버에게 벽에 쓰인 글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지금 그곳엔 단 하나의 계명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p. 141)'

두 다리로 걸으며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동물주의 핵심 원리마저 깨부수는 돼지들의 행동은 계엄을 통해 헌법마저 무시하는 모습과 너무 닮았다.

나폴레옹의 온갖 횡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동물들의 의심을 잠재우는 스퀼러(기관지 프라우다) 또한 대통령을 왕처럼 떠받들며 그 어떤 비리도 감춰주는 레거시 미디어와 복사판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독재가 가능할까.

노예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복서(프롤레탈리아)'는 혁명 이전 보다 나은 삶을 기대했기에 행복했다. 하지만 복서는 큰 실수를 했다. 알파벳을 배우는데 게을리했다. 무지는 우둔함으로 이어지고 무기력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재를 도운 셈이다.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데도 그 사람을 따르는 무지한 민중은 오늘날에도 개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태극기를 들고 독재자를 찬양한다.

당나귀 '벤자민(지식인층)'은 나폴레옹의 잘못을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침묵하며 책임지지 않으려는 현실의 지식인들. 오히려 논문 표절을 알면서도 덮어 권력에 편승해 이익을 챙긴다.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는 방조 역시 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본가들과 야합으로 독재는 굳어진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에서 인간으로, 다시 인간에서 돼지로, 그러다가 또다시 돼지에서 인간으로 계속해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 (p. 148)'


선한 동기로 권력을 잡았다 하더라도 권력의 맛에 부패해버리면 위험한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시대를 막론한다. 인간의 속성이다. 독재를 막는 유일한 길은 무엇일까. 시민들이 깨어있는 것뿐이다. 욕심을 좀 더 부린다면 '미디어 리터러시'로 무장한 채 깨어있는 것, 그것이 독재를 막는 최선책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권력 욕망은 계속될 것이기에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여전히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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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 소설, 향
최정나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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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자신 외에 소중한 것은 없었다. (p. 45)'

기주는 상은과 로아, 일곱 살 터울의 두 딸을 둔 엄마다. 기주의 남편은 딸 상은과 불화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삶의 마지막을 통제했다. 7년이 지난 후 기주는 새 남편과 상은 사이에 갈등을 해결하려고 그동안 방치되어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살아온 상은 앞에 로아를 데려다 놓는다.

엄마로부터 상은이 방치된 삶을 살았다면 로아는 유기된 삶을 살아왔다. 웃음과 침묵을 생존방식으로 터득한 로아에게 상은은 폭력을 가했다. 폭력의 방식은 교묘해졌고 그 수위를 점점 높여갔다.

'이유는 실제와 다르다. 나는 그냥 로아를 때리고 싶었다. 그게 다다. 말릴 사람도 없는데 상대가 저항하지도 않는다면 인간은 잔인해지기 마련이다. (p. 55)'

엄마 기주는 두 딸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엄마에게 화가 나면 상은은 로아를 엄마에게 보내 어떻게 맞았는지 설명하도록 했다. 그래도 기주는 상은이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나서기를 멈췄다.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난 뒤, 곧바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허겁지겁 다시 읽기 시작했다. 확인해야 할 문장이 있었다. (p. 163, 발문, 김이설).

나는 바뀌는 화자의 관점을 이해해 보려고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그 때문에 나는 네가 되어본다. 언니가 되어 나를 본다. 그리고 너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본다. (p. 13)'

주위를 둘러보면 상처받은 피해자는 수두룩한데 상처를 준 가해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약간의 아픔도 견디지 못하고 내 상처만 아프다며 피해자 틈에 숨어있는 걸까? 아니면 받은 폭력을 다른 폭력으로 돌려주며 가해자와 공범이 되어 숨은 걸까. 모두 공범이라면 잘못한 사람은 없는 셈이니까 말이다.

작가 최정나는 숨어버린 가해자를 찾는 방법으로 가해자인 언니가 되어 가해자의 눈으로 피해자인 로아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선택한듯싶다. 왜?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를 바라보게 되면 소설가 김이설이 '발문'에서 밝힌 대로 가해자에게 서사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폭력은 가족이나 조직의 위계 또는 계층, 젠더 등과 같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으로 쉽게 치환된다. 그러면 가해자를 이해하게 되고 그 어쩔 수 없음은 오히려 동정을 이끌어내는 서사가 된다.

상은의 폭력도 문제지만 더 큰 책임은 엄마 기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 말하는 양육자의 방치에 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안쓰럽고 삶에 지쳐 힘겹게 살아가는 엄마의 서사가 가해자를 감춘다.

반대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보면, 피해자 스스로 절대 할 수 없는 피해자가 받은 상처와 고통을 샅샅이 살펴보는 복기가 가능해진다. 보통 피해자는 상처를 빨리 잊고 고통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한다. 주변의 우리도 그렇게 조언하기 십상이고.

하지만 상은의 눈으로 로아를 바라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로아의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제까지 관습처럼 해 오던 대로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어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가해자는 숨을 곳이 없어진다. 사랑해서, 가족이니까, 널 위해서라는 가해자의 변명도 사라진다. 오롯이 드러난 로아의 상처, 피해자의 증언만 남는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피해자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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