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의 시대를 건너는 법 - 박웅현의 조직 문화 담론
박웅현 지음 / 인티N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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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는 시대정신이 크게 바뀌는 혁명을 거쳤다. 170만 년 전에 '불'을 발견해 화식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잠잠하다가 7천 년 전쯤 농업혁명이, 그 이후 6700년이 흘러 산업혁명이, 전기의 발명으로 1780년대에서 불과 120여 년이 지난 1900년대에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이전까지가 장인匠人의 시대였다면 2차 산업혁명은 '시스템의 시대'가 됐음을 알리는 혁명이었다.

'그 당시의 키워드는 이런 단어들입니다. 조직력, 효율, 규모, 상명하달, 일사불란. 전부 시스템의 시대에서 온 것들입니다. (p. 39)'

내가 일하던 조직은 프로세스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시스템의 세계였다. 광고인 박웅현 역시 그 시스템에서 광고를 만들어왔다. 그런 그가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해군과 달리 그냥 움직이는 해적, 그 해적을 상징하는 해골을 사무실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해군의 시스템을 버리고 해적의 정신으로 광고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는 살 수 없다" (p. 25)'고 말한다.


광고를 만들던 저자가 브랜딩 컨설팅이 가능했던 건, 광고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듯 조직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이 조직 구성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해적의 시대라는 시대 문맥에 따라 조직 문화도 변화해야 한다. 시스템 시대의 키워드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조직 구성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들이 조직 안에서 일의 가치를 느끼고 출근하고 싶어져야 한다.

'"철학을 문학화시켜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철학은 정확한 개념이고 문학은 피를 끓게 하는 개념입니다. (p. 80)'
전략 대신 정서를 건드려야 하고,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알려줘야 한다. 사실이 아니라 분위기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일하는 시대다.

어떻게 하면 조직을 창의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광고 일을 30년 가까이 해오면서 자신의 화두로 여긴 '견문연행(見聞軟行)'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견'은 감동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잘 들여다보는 것이다. '문'은 잘 들어주는 것이고, '연'은 연성화, 즉 긴장을 낮추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은 위험 부담을 감수할 수 있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Better sorry than safe."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정적이고 안전해요. 하지만 그것보다 실패하더라도 해보고 미안하다고 하는 게 낫습니다. (p. 179)'


조직 문화 담론 <해적의 시대를 건너는 법>은 일과 사람, 조직운영에 대한 박웅현의 생각이 담긴 책이다. 저자가 그의 생각을 30대 중반 이상인 조직의 리더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듯하다. 젊은 세대들을 향해 '저 세대는 왜 저럴까'라며 집단으로 묶어 다른 존재로 타자화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런 세대론으로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개인과 개인으로 마주할 때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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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 개정판
남영신 지음 / 까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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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산다가 맞을까, 서울에서 산다가 맞을까? 까치글방 사장이 저자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어떤가. 난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살다'를 태어난 이후 줄곧 살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관점에서 보면 장소의 교체는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서울에 산다', '미국에 산다'처럼 '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살다'를 그렇게 정적으로나 소극적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생활로 본다면 '서울에서 산다', '미국에서 산다'처럼 장소를 지정하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pp. 58, 59)'

'에'와 '에서' 가운데 어떤 조사를 쓰느냐에 따라 말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우리말에는 이런 차이로 생기는 재미가 있다 (물론 알아채지 못하면 그만이긴 하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어는 조사나 어미가 문법적 기능을 하므로 이를 잘못 사용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국어 문장에서는 조사 사용법이 까다롭다.


저자는 언어를 배에 비유한다. 진리가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라면 언어라는 배가 우리를 실어 그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이왕이면 낡고 삐걱거리는 배보다 멋지고 성능이 좋은 배를 타고 가야 좋지 않을까? 이 책은 내가 타고 가는 배가 최고의 성능을 갖추도록 안내한다.


저자는 이번 개정판에 추가한 가장 새로운 내용으로 5장 '순화' 부분을 꼽았다. '쉽고 평범한 글쓰기'에 대한 소망을 5장에 담았다고 한다. '실용적이고 멋진 한국어'를 쓰는 것이 저자의 목표다. 이는 실용성이 높은 언어를 의미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사람이 가장 쉽고 정확하게 습득하게 해 주는 언어'를 가리킨다.

'내가 실용적으로 멋진 언어의 조건으로 제시한 쉽고, 간결하고, 정확함의 정의를 먼저 내리고자 한다.
쉬운 언어: 어려운 한자어, 외국어를 쓰지 않을 것.
간결한 언어: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거나 중복되지 않을 것.
정확한 언어: 논리적일 것, 명료할 것, 중의성을 피할 것. (p. 222)'

정확한 언어 사용을 위해 기피하면 좋을 표현으로 (내가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어서인지) 영어식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를 많이 접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긴다.
우선 '~에 의한'.
''무장 세력에 의해 인질로 잡힌'은 '무장 세력이 인질로 잡은' 또는 '무장 세력에게 인질로 잡힌'처럼 구성하는 것이 한국어 다운 표현이다. (p. 261)'
또 하나 '~을 필요로 하다'.
''저를 필요로 하는'은 단순히 '제가 필요한'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p. 264)'


'이상한 한국어 문장도 숱하게 많다. 맞춤법에 맞지 않는 문장, 어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문장, 문맥이 서지 않은 문장,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 등이 여기저기에서 우리 눈을 어지럽힌다. 그런 문장을 보면 우선 그 속에 녹아 있는 고귀하고 아름답고 중요한 의미가 훼손됨을 느끼고, 나아가서 마음이 답답해지거나 짜증이 나게 된다. (p. 18)'

흔히 쓰는 말도 글로 옮기다 보면 그 낱말에서 왠지 어색함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글을 자주 써보지 않은 탓도 있고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습관처럼 쓰다 보니 그렇다. 언어생활이 후퇴되지 않도록 사전도 찾아보고 좋은 글은 필사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맞춤법 검사도 빼먹지 않고 하는 편이다. 생각 없이 낱말을 나열하는 데 급급해 비문을 마구 사용하고 싶지 않다. 우리말에만 있는 말맛을 한껏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통, 지식과 정보 교환이라는 목적지에 아름다운 모습과 좋은 성능의 배를 타고 가려고 한다. 이왕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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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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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이 "요즘도 책 읽으며 지내나(요)?"라고 묻곤 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책이나 읽고 지낼 건가(요)'로 들린다. 뭐라고 대답할까? 길게 답할 여유를 주는 질문이 아니니 짧은 대답을 마련해야 했다. '뭔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정의란?' '평등은?' '죽음은?' '올바른 배려란?'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수히 많은 그 뒤죽박죽인 것들을 한 번쯤은 내 나름 정리하고 싶었다. 내 생각과 의견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앎, 그리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난 책을 읽는다.

'누군가 쓴 것을 내가 읽는다 내가 쓴 것을 당신이 읽는다. 심심해서 외로워서 궁금해서 슬퍼서 읽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난다. (p. 234)'
나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문자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의 시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나는 누구일까' '이게 내가 맞나?' 이것도 정리하고 싶은 주제 가운데 하나다. 노재희 작가의 삶을 펼쳐 보여준 산문집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에서 나는 '존재'에 대한 것만 골라 생각했다.


노재희 작가는 어느 날 체온을 재 보았다. 평소보다 1.5도 높아 병원에 갔다. 치사율 50퍼센트의 결핵성 뇌수막염임을 알게 됐고, 40여 일 병상에 누워있는 바람에 일상이 중단됐다. 게다가 20여 일간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당황스러운 순간을 맞닥뜨린 작가는 '나'란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 이후의 일들은 모두 다른 가족들로부터 듣고 재구성한 기억이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번 듣다 보니 실제로 내가 다 겪어서 기억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내가 다 겪은 일이다. (p. 38)'

스스로 알고 있는 '나'가 있겠고,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시간은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해주는 낯선 '나'로 채우고, 어린 시절의 나는 일기장을 펼쳐 '와아아~' 소리치며 내게 달려오는 기억 너머의 '나'들로 메꾸면 짜깁기한 '나'가 완성된다.

또 하나 '나'란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겪은 '나'가 있겠고, 때론 아름답게 때론 욕심을 부려 기억이 다듬어 놓은 '나'가 있다. 어느 '나'가 진짜 '나'일까. 둘 다일까?


작가의 할아버지 이부연 씨는 1924년 강원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큰아버지가 소개해 준 김금녀 씨와 혼인날 처음 만나 결혼했다. 우편국에서 일했고 일본군에 징집돼 고생했지만 평생을 항로표지원을 일하다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그 후 30년을 더 사셨다. 아들 셋을 잃었고 자녀 여섯을 키웠다. 뇌졸중인 아내를 자식들 도움 없이 보살피기도 했다.

어린 작가에게 등대지기 할아버지는 자랑이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웃는 모습도 멋졌다. 그랬던 할아버지는 작아져 줄어들고 쪼그라진 마지막 모습을 작가에게 남기셨다. 작가가 아는 이부연 씨의 삶이다.

'항로표지원 이부연 씨가 생을 마쳤을 때 몇 사람의 지인과 일가친척 말고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 대부분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p. 105)'

70년 가까이 함께 한 아내는 이부연이란 존재를 어떻게 기억할까? 맏딸인 작가의 어머니는? 이웃들은? 직장 동료들은? 그리고 이부연 씨 자신은? 어느 이부연 씨가 진짜 이부연 씨일까. 모두 다일까?


신은 존재할까? 작가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 자체가 신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이 확실히 존재한다면 믿을 일이 아니다. 그냥 존재하므로. 또 과학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불완전함으로 두는 반면, 종교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한 섭리로 해결하는 권위를 보이고 오히려 신의 존재 증거로 삼는다.

'자신의 하찮은 일상과 스트레스뿐인 인간관계에서 도망쳐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162)'

작가는 신의 존재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기도카펫을 깔고 기도하듯 '절운동'을 한다. 20분 동안 하는 백팔배는 머릿속을 가지런히 한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마치 기도한 것처럼.

(중략)

이제부터 노재희 산문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을 읽으며 정리해 볼 주제는 '제대로 산다는 건 뭘까?'이다.

'서른셋까지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몇 살쯤까지 살아야 제대로 살아본 것일까? 그리고 제대로 산다는 건 뭘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p. 87)'

내 맘대로 책을 읽다 보니 작가가 보여주려 했던 것과 많이 빗나간듯하다. 아무렴 어떠랴. 나를 수신인으로 쓴 글이 아닐 텐데... 노재희가 쓴 글을 그냥 내가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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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한옥 - 도심 속에서 다른 삶을 짓다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부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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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라는 단어에서 '한韓'은 '하나'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가득', '한 아름'과 같이 '전체'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한가운데' '한낮'처럼 '정점'을 뜻하기도 한다. 하늘도 하나고 땅도 하나이며, 우주도 하나다. (...) '옥屋'은 하늘에서 집 안으로 화살이 날아와 박힌 모습을 표현한 글자다. 화살은 하늘의 기운을 땅에 전달하는 매개체로 조상이나 신을 집에 모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두 한자의 의미를 결합하면 한옥은 '시작이면서 모든 것이기도 한 생명 정신을 담은 집'으로 이해할 수 있다. (p. 5, 들어가며)'

건축사무소 '착착 스튜디오' 김대균 대표의 '들어가며' 글에 공감하는 되는 부분을 이어 더하면, 한옥에 '시간의 촉감'이라는 멋진 표현을 입힌다. 한옥을 짓는데 쓰이는 나무, 흙, 한지, 기와 따위의 재료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 오래된 아파트는 낡았다고 여기는 반면 한옥은 오래될수록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과 결이 같다.

이런 이유로 한옥의 운치에 매력을 느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로망이 가지고들 있다. 하지만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탓에 여러 가지 면에서 한옥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그런 욕망을 한 달 살기로 대체하기 일쑤다.


한옥살이의 꿈을 접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 한옥을 고쳐 짓고 새로 지은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행복이 가득한 집>에 소개한 '한옥' 가운데 추리고 뽑은 스물네 채의 집과 그 집 주인 사연을 <더 한옥 THE HANOK>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다.

디자이너 양태오의 계동 한옥, 이 집은 건축가 김영섭이 살았던 곳으로 지은지 100년이나 됐다. 새 주인 양태오는 두 채의 아담한 집을 한 곳은 사무실 겸 생활공간으로, 다른 곳은 부모님이 머무는 공간이자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자신의 취향 대로 고쳐 라이프스타일에 알맞게 탈바꿈했다.

미술 평론가 유경희는 서촌 한옥을 기본적인 대강의 옛것들은 살려둔 채 새것과 연결하여 전통적이면서 모던하게 새로 지었다.
'"... 이런 공간이면 좋겠다는 기준도 명확하고요. 일단 시적詩的이어야 해요. 어둠이 섞인 빛에 로망이 있지요. 약간 어두운 데 가만있으면 서서히 형체가 드러나는 곳 있잖아요. 그런 곳에서 책을 읽는 일,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치이자 럭셔리예요..." (P. 115)'

그런가 하면 류호향 선생의 경기도 광주 함양당은 아름다운 차 향기가 가득하고 사람들이 오가는 문화 공간인 곳이다.
'차에는 이를 아름답게 마실 수 있는 다법이 존재하고, 이를 행하는 것은 수련과 같다. 하지만 어디서든 차를 마실 수 있기에 장소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옥에는 창과 문이 나뉘어 있지 않다. 바람이 다니면 창이고, 사람이 다니면 문인 것이다. (p. 145)'
차(茶)에 집중하면 스스로 고요함을 자각하는 류효향 선생의 일상이 차와 같은 이유다.

영월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는 현재 일부 오픈 운영 중인 한옥 호텔이다. 2027년에 최종 마무리할 예정이다. 한옥 전통 건축 기법을 사용했고, 건물 높이에 차등을 주었다. 그 결과 영월이 품고 있는 자연을 온전히 담아내 한옥 미학의 매력인 차경借景을 살려냈다.


대궐 같지는 않았지만 한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아직도 그 집 모양을 기억 속에 갖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소 외양간, 그 옆에는 엎드려 만화책 보곤 하던 사랑방, 앞마당에서 주로 얼굴을 씻었고, 뒤뜰 장독대로 가려면 부엌을 지나가야 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 마루에 쌀뒤주가 놓여있었고 마루 뒤쪽으로 난 쪽문을 열어젖히면 담장에 감나무 한 그루가 걸쳐있었다. 대들보가 드러난 마루에 누어 하늘을 올려다 보기도 했다.

상상만 해도 그때 마셨던 공기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심호흡하게 된다. 막힌 공간이 아니라 외부공간이 집안 가운데 떡하니 들어와 있으니 답답함은 없고 흙냄새 맡으며 흙장난이 가능한 곳이었다.

'어리석음을 깨닫는 집'이란 뜻으로 신영복 선생이 이름을 지어주신 지우헌, 디자인하우스가 운영하는 한옥 갤러리로 북촌 한옥 마을에 있는 곳이다. 전시된 작품 감상, 전통차와 책 읽기 그리고 한옥 체험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이 간직된 한옥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때 분위기만큼은 한껏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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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오페라 - 아름다운 사랑과 전율의 배신, 운명적 서사 25편 방구석 시리즈 2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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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대, 스페인 세비야 인근 교도소 지하 깊숙한 곳에 혁명 주도자 '플로레스탄'이 갇혀있다. 왕당파 교도소장 '피차로'는 개인 감정 분풀이로 플로레스탄을 납치해 가둔 것이다. 플로레스탄의 아내 '레오노레'는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피델리오'라고 이름을 바꾸고 남자인 척 신분을 감춰 복수를 꾀한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내 남편을, 남편을 내 가슴에...
... 내 가슴에 안을 수...
내 아내를, 내 아내를 내 가슴에 안을 수... (p. 28)'

오페라 <피델리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줄거리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로 알려진 1805년도 작품이다 (베토벤이 오페라도 작곡했다니... 처음 알았다). 특정한 효과를 위해 트럼펫 연주자가 무대 뒤에서 따로 연주하는 '오프스테이지 트럼펫'이라는 유명한 기법이 자주 사용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트럼펫 소리를 약하게 연주해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신비롭거나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벌써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0월 문화콘텐츠 전문작가인 이서희의 '감동과 희열을 주는' 명작 뮤지컬 서른 편을 소개하는 <방구석 뮤지컬>을 읽었었다. 대표 넘버를 들으며 뮤지컬 작품 내용을 접하는 시간은 즐거움이었다. 뮤지컬에 이어 이서희 작가가 오페라 이야기를 정리해 내놓았다.

'이 책에는 각 작품의 줄거리와 각 곡의 가사, 인문학적 해석까지 덧붙여 25편의 명작 오페라를 실었습니다. 또한, <방구석 뮤지컬>처럼 QR코드를 삽입하여 대표곡을 듣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p. 6, 프롤로그)'

뮤지컬의 음악은 팝, 재즈 등 스타일이 다양한 반면, 오페라는 오페라 음악만을 사용한다. 뮤지컬 배우들은 노래와 대사를 하며 연기하지만 오페라는 대사가 없고 노래에 중점을 두고 연기한다. 뮤지컬은 원작이 소설이나 영화가 대부분이어서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오페라는 다르다. 역사적인 주제나 다소 심오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이유로 작품의 줄거리를 모르다면 뮤지컬 보다 오페라는 훨씬 지루하고 낯설다. 알려진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 어느 작품인지 정도는 알지만 작품 내용은 잘 모르는 게 대개의 경우다.


투란도트 공주는 어떤 남자도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리라 맹세했다. 그녀와 결혼하려면 공주의 복수가 담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풀지 못한다면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페르시아 왕자 사형 집행장에서 투란도트를 본 칼리프는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리프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수수께끼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수수께끼를 푼 칼리프에게 투란도트는 계략을 꾸미지만 결국 둘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하게 된다.

'허나 비밀은
밀봉되어 있어,
어느 누구도
내 이름을 알 수는 없다

그렇다, 그대의 입술 위에
내가 알려주리라 (p. 275)'

푸치니의 3대 명작 가운데 하나인 오페라 <투란도트>의 대략이다. 푸치니는 투란도트의 결말을 짓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 까닭에 제자 알피노가 스승을 위해 <투란도트>를 완성,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했다고 한다.

창피스럽게도 이렇게 널리 알려진 <투란도트>임에도 중국 공주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일고 알게 됐다. 이뿐만일까? <방구석 오페라>에 소개된 스물다섯 편 명작의 제목은 익히 들어 익숙하지만 그 스토리는 생소하기 짝이 없다.


뮤지컬 넘버를 들으며 <방구석 뮤지컬>을 읽은 결과로 뮤지컬과 친해졌다면, 가사와 함께 QR코드로 오페라 대표곡을 들으며 <방구석 오페라>를 통해 역사나 인생의 역경을 표현하는 문학적 서사에 빠져드는 경험이 가능하다.

이서희 작가가 오페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눈물을 흘리며 혼돈과 감동을 느꼈듯이, 한 권의 책이 우리에게도 작가와 똑같은 순간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우리에게 가이드가 되어 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지금껏 경험해 온 사랑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앞으로 겪게 될 사랑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 315,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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