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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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 시간에 설교를 마친 다음, 태어나 처음 교회에 온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강단에 올랐다. 목사님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기 위함이었다. 아기를 본 순간 '아유~'라는 웃음을 품은 감탄사가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나 역시 웃는 얼굴로 옆에 앉은 아내와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웃음 띤 얼굴이었다. 행복해 보였다.

''행복한 사람'을 판가름하는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 있다. (...)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얼굴에 지순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 순간들을 일상 세계에서 가지는가. (p. 20)'


강남순 교수는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며 자기소개 시간을 가진다. 학생들의 소개가 끝나면 '강남순에 대하여 질문'하라고 하며 자신을 소개한다. 서로 질문하며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받은 질문 가운데 마음에 남는 2개의 질문이 있다며 소개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나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날(ideal day)은 어떤 날인가'다.

'이 질문들은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일상적 삶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만들고 싶은 미래를 생각하도록 하는 중요한 초대장 기능을 한다. (p. 230)'

이 두 질문이 강남순에게 개인적인 삶과 공적 삶을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도록 하는 초대장이라면, 철학자 강남순의 철학 에세이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내게 멈췄던 사유를 이어나가도록 만드는 초대장 같은 책이었다.


왜 쓸까? 사유를 이어가 본다.
'쓰기 행위는 무엇보다도 자기 삶에 대한 방치와 무관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론적 몸짓'이다. (p. 26)'
이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책을 읽고 쓰는 행위를 할 때 내 삶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바쁘게 달려오느라 방치했던 내 삶을 살피며 과거의 나와 대화한다. 글로 옮김으로써 그 대화가 명확해지기까지 한다.

세상이 내 삶이 너무 부조리해서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삶을 종료하는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하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는 없을까? 저자는 '시시포스적 삶'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계속 굴러떨어지는 부조리 맞서, 바위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반복적인 삶일지라도 그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 하나님.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투자할 곳을 알려달라고 기도하는 내 모습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래서 '함께 살아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주고받음'의 틀에서 기능하는 '교환경제의 신(economy of exchange)'만이 존재한다. 급기야 어떤 이는 그 신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고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한 '외적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결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삶은 '거대한 오류(great fallacy)'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 유한한 삶의 지독한 낭비다. (p. 253)'

아무 생각 없이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언제 올지도 전혀 모른 채 기다리는 '무사유의 삶'. 이것이 무서운 것은 '생존기계(living machine)'가 돼버려 삶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유마저 없다면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악'이기도 하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에서 직장 생활을 마쳤다. '돈 버는 기계'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행인 건 퇴직한 다음 책을 읽게 됐고 이 책처럼 사유를 이어가며 질문하도록 도움을 준 책을 여럿 만난 것이다.

질문, 기계적 삶을 멈추게 하는 질문, 강남순 교수에게 삶을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던 질문, 행복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런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시시포스적 삶, 즉 외부에 기대지 않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부조리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아기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웃게 되는 행복할 권리를 가진 존재가 된다.

'"행복한가"라는 물음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의 릴레이로 이어진다. 나 외부에 있는 그 어떤 것이 나 대신 행복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러한 물음과 마주하는 것이 때로 힘들더라도, 스스로 질문 앞으로 자신을 초대해야 하는 이유다. (p.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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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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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다른 사람 집에서 살면서 집안일을 돕는 식모살이라는 게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 고향에서도 잘 사는 집에는 어김없이 식모살이하는 누나가 있었다. 적게는 열세네 살부터 스무 살 남짓이었고 대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식모살이를 했다.

이 식모살이 누나들은 한쪽 구석에서 아기를 업고 동네 아이들이 노는 데 끼지 못한 채 그냥 쳐다만 보거나 훈수를 두곤 했다. 집안을 먹여살리려고 타지에 와서 또래 아이들이 보내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아마 그때는 가족의 삶을 짊어지느라 자신의 삶 한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으리라.


대학생인 스물네 살 틸다는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동생 이다를 돌보며 함께 살아간다. 술에 취했을 때 엄마는 마치 괴물 같다. 틸다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수영장 레인을 스물두 번씩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베를린에서 펼쳐질 미래를 꿈꿔보지만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한 이다의 모습이 떠올라 틸다는 갈등한다.

'나는 이다가 나 없이 생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 봐, 무너지는 엄마에게 대처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전자와는 달리 후자가 일어날 확률은 의심할 여지 없이 100퍼센트이고, 아마도 곧 일어날 것이다. (p. 182)'

자신의 진로를 찾아 하나둘 떠나는 친구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집을 떠나야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 엄마로부터 동생 이다를 보호하려면 꿈을 접어야 한다.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까.

'내가 떠나면 이다에게는 학교와 집과 엄마밖에 없다. (p. 233)' 선택의 갈림길에 선 틸다에게 옳은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어린 시절 내가 본 식모살이 누나, 남의 집 아기를 업고 있던 그 누나에게 어쩌면 업어줘야 할 친동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동생을 업어줘야 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친동생을 포함한 가족을 위해 남의 집 아이를 업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선택은 어린 나이임을 따져보면 자신이 한 것은 아니다.

커서 생각했겠지. 가족을 위한 사랑과 책임이었다고 여겼으면 후회하지 않았을 테고 만약, 만약에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해 내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면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을 것이다.

한때는 가출한 청소년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바깥보다는 집이 안전하니깐. 하지만 요즘은 집보다 차라리 바깥이 더 안전한 경우가 늘고 있다. 그 청소년에게 집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질 짐조차도 되지 않으니 틸다보다 더 낫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후회나 아쉬워할 선택의 기회도 없으니 더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내가 아는 식모살이 누나도 가족을 위한 식모살이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집이 싫어 가출한 누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건, 삶의 주도권을 쥘지 포기할지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건,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그나마 다행이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가 될 테니까.

'옷을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고 머리부터 물로 뛰어들어 깊이 잠수한다. 풀장 바닥에 앉아 물 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올려다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버둥대는 아이들의 다리,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 흔드는 노인들의 다리, 잠수하는 아이들의 몸, 풀장 가장자리에 머무는 여러 다리. 이런저런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합동 공연은 여기서 보면 대체로 재미있다. 나는 레인을 스물두 번 돌기 위해 바닥을 박차고 올라온다. 스무 번을 돌았는지 스물두 번을 돌았는지 헷갈리면 짜증이 나서 스스로에 대한 벌칙으로 다섯 번을 추가한다.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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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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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할 때 사물함 문 안쪽에 5X7 사이즈의 제법 큰 여자 사진을 붙여놓았었다. 당시 이런 것이 내무반의 유행이었는데 큰 사진은 자랑거리였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사진을 보는 일은 군 생활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됐다. 내무반 선임과 후배들이 부러워했던 사진 속 주인공은 교회 일 년 후배의 친구였다.

입대 전 여러 차례 만나긴 했지만 사귀는 사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빨간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전신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편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겼다. 지금까지도... 제대 후 후배에게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그 후배도 그 친구를 만난 게 오래전이어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버려진 사이가 아니라 헤어진 사이라서 동하 씨 생각이 났어." (p. 94)'

서른 남짓의 세주와 동하. 일 년 전에 헤어진 세주가 어느 날 동하에게 '관용'이란 꽃말을 가진 '문샤인 산세베리아' 화분 하나와 책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함께 동하가 없을 때 집에 놓고 간다. 동하는 책 갈피에서 초등학교 때 찍은 세주 가족사진을 발견한다.

'사진 뒤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로 이해했다. (p. 41)'

육 개월이 지나 여행에서 돌아온 세주에게 동하는 자신의 방을 며칠 동안 내어준다. 세주도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라는 글자가 적힌 동하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발견한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세주와 동하는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다. 세주의 가족사진과 동하의 사진, 두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서로의 아픈 상처를 알게 된다. 그리고 둘은 돌아가야 할 방향이 다를 때 하는 인사를 나눈다.


'동갑인 우리는 이상하게 사귈 때부터 호칭이 서로 달랐다. 나는 세주라고 불렀고 세주는 내 이름에 꼭 '씨'를 붙였다. 처음에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갑이라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그 거리감을 이해하자 호칭에는 금방 익숙해졌다. (p. 92)'

나는 이름을 불렀고, 후배의 친구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것 같다. 세주와 동하처럼 처음엔 거리감 있지만 금방 익숙해지는 호칭이었을듯하다. 하지만 세주와 동하의 관계와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받은 사진 뒤편엔 어떤 메모도 없었다. 나 역시 그 후배에게 어떤 메모도 없는 사진을 보냈다. 겪은 아픔은 물론 그 어떤 사연도 서로 모른다.

우린 만났고 이별을 했다. 세주와 동하도 만난 후 서로 떨어져 있는 이별을 했다. 우리에겐 지금까지 이어진 이별만 있을 뿐 작별은 없었다. 세주와 동하에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작별이 있었다.

세주와 동하에게는 사랑이 시작될 때 어설픈 풋풋함 그리고 계획이 어긋나 얻은 좌절, 서로 감정을 드러내며 용기를 나누는 서사가 있지만 우리 둘에겐 그런 것이 생략됐으니 미완성이다. 서로의 아픔을 알고 이해하는 감정은 사랑일 테지만 나와 후배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참 궁금했다. 어떤 감정으로 사진을 보내는지. 그리고 왜 연락을 끊었는지.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 만나고 싶었다. 시작도 끝도 정리된 것이 없어 아련함을 동반한 찜찜함이 지금도 내게 남아있다.

'세주는 무슨 말을 하려고 'ㅁ'자를 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ㅁ' 자에 이어 쓴 문장은 이러했다.
몹시 보고 싶어. 그것은 동하의 글씨체였다. (p. 54)'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나도 'ㅁ'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보고 싶어진다. (p. 131, 추천의 글,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 차경희 대표는 동하에게, 세주에게 'ㅁ'으로 시작하는 글을 남겼지만...

만약 내게 사진을 보내주었던 그 후배가 SNS라든지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지금 내 글은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ㅁ'으로 시작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마음 써줘서 고마워~ 그때 힘든 일이 네게 있었다면 나도 마음 써줄 준비가 돼있었는데...'라는 글을 남기며 이별 상태를 끊고 제대로 된 작별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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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압축 교양수업 - 6000년 인류사를 단숨에 꿰뚫는 60가지 필수 교양
임성훈 지음 / 다산초당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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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답하는데, 때때로 '어떤 주제로 갖고 얘기하더라도 30분 정도는 그 대화에 끼고 싶어서'라고 답하곤 한다.

대화로 의사소통한다.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에서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라고 정의한다. 삼단논법으로 따지자면 대화에 교양은 필수다. 그 교양을 책으로 쌓을 수 있으니 내 대답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초압축 교양수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학, 역사, 철학으로 나누어 결정적 장면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익히 들어 아는듯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대화에 섣부르게 낄 수 없을만한 22가지 역사적 사건, 22명 철학자의 사상, 16개 문학 작품을 추려 이 책에 담겼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말만 알아서는 선뜻 대화에 끼어들기 어렵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왕좌에 앉게 해준 뒤, 이집트를 떠나 골치거리였던 폰토스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원로원에 전했던 말이라는 것 까지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셰익스피어가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언 "브루투스 너마저."까지 설명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카이사르가 친아들처럼 여겼던 브루투스를 중심으로 한 원로원들에게 암살 당할 때 한 말이다.

"신은 죽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망치를 이름 앞에 붙인 이유는 니체가 기존의 질서와 철학, 우상을 파괴하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신, 이성, 이데아와 같은 관념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해온 우상일 뿐이다. 니체가 사망선고 내린 신은 '우상화된 신'이다.

'니체에게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왜곡되어 존재가치를 상실해 버린 신, 인간이 우상화해 버린 신이 문제였다. (p. 319)'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에게 알은 세계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라는 정도는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의미를 모른다면 <데미안>을 주제로 한 대화에 참여하기 쉽지 않다.

'아직 약한 부리로 단단한 껍질과 싸워야 한다. 껍질 안의 새는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알을 깨야 한다. 그렇게 한 세계를 깨뜨리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p. 346)'

살면서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때 갖는 생각은 절망이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뒤 그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 알을 깨고 나온 경험이 있기에 <데미안>의 글귀에 공감하게 되고 명언이 되어 많은 사람들 가슴에 남는 이유다.


쌓은 교양을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거나 망신주기 위한 질문에 이용하면 안 된다. 대화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짓이다.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대선 토론에서 그런 질문이 토론 당사자는 물론 지켜보는 사람을 눈살 찌푸리게 만들었다.

알고 있는 교양을 써먹을 욕심에 자랑하듯 마구 늘어놓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자들이 많은 자리에서 군대에서 익힌 무기 지식을 쏟아낸다든지, 영어를 마구 섞어가며 알은체 하는 것 말이다. 이런 광경 역시 대선 토론에서 볼 수 있었다. 허풍은 교양과 거리가 멀다.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유럽 문화의 대부분을 이해하기 힘들다." - 토머스 볼핀치 (p. 104)'
유럽에서 탄생한 조각, 회화 등의 예술작품은 물론 문학 작품이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모티브는 우리들이 (대충 아니고 제대로) 알아야 할 교양이다. 교양을 갖추기 있지 않으면 대화에 관여하거나 이끌어가기 힘들다. 그 교양을 이 책 한 권으로 끝낼 수 있다. 단, 교양이 자신을 내세우는 교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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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 내가 좋아하는 것들 17
길정현 지음 / 스토리닷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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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찐 절친인 아내분도 그릇 덕후다. 그릇장은 꽉 차 받침대가 휘워질 정도고 침대 밑은 물론 집안 여기저기 그릇이 쌓여있다 보니 가끔씩 내 친구는 아내분의 그릇 취미에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그래도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예쁜 그릇에 대접받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아까 경화 씨가 내놓은 그 그릇 좋더라~"
"나도 그릇 좋아해~"
날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과 말속엔 '당신이 돈을 못 벌어와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나도 예쁜 그릇 사고 싶다고, 으이그~'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해 멋쩍게 대화가 마무리된다. 같이 쇼핑 가면 그릇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다 놓곤 하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지켜봤는데도 이런 헛소릴 하니 아내는 얼마나 허파가 뒤집어질까 싶다.


취미 부자 나예 작가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은 그릇을 바라보면 인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부르겐란트에는 새침데기 같은 케이크보다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호밀 빵이나 숭덩숭덩 썰어낸 바게트 따위가 잘 어울린다. 샐러드처럼 여러 색감이 섞인 음식을 올리면 굉장히 정신이 없게 보인다는 게 단점인데 단순한 음식을 단출하게 올린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휘뚜루마뚜루 쓰기에 아주 좋은 녀석이다. (pp. 29, 30)'

마치 아이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히듯 그릇을 대한다. 그런가 하면 깨진 그릇을 옻으로 이어 붙이는 공예 기법 킨츠기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그릇에 생기는 빙열을 쳐다보며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주름이라는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릇에 담긴 계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릇을 보며 그 그릇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엄마와 엄마의 삶을 생각나게 하는 그릇도 있다. 아코팔 아네모네 접시에 송편을 올리던 까칠한 할머니는 또 어떻고? 누구나 혼자만 간직하고픈 (하지만 친한 한두 명에겐 풀어놓는) 비밀이 있듯이 나예 작가에게는 그런 그릇이 있다.

'나만 알고 싶고 나만 쓰고 싶어서 숨겨두기까지 했으면서 이 컵을 꺼내는 날은 정말이지 미친 듯이 사진을 찍는다. 이 귀여움을 나만 알 순 없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놓은 듯 셔터를 누른다. 자랑은 할 거지만 아무에게도 실물을 보여 주진 않을 거야, 하는 심술 맞은 마음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p. 159)'


"'소서'가 뭐야?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 자기는 알고 있었어?" 먼저 이 책을 읽은 아내에게 물었다.
"그럼 남자들이나 모르지 웬만한 여자들은 다 알걸?"

남자가 그릇만 모를까? 생각해 보니 아내의 취미도 잘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손목이 아픈 아내를 대신해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가끔 그릇을 깨뜨려 아차 싶어
"이거 아끼는 그릇 아냐 어떡하지?"
"괜찮아 그래야 새로 사지. 계속 쓰면 질리잖아"
오래 같이 산 남편도 질려 하지 않을까 겁난다. 아내 취미도 모르는 남편, 맘속으로 깨져버리길 바라는 건 아닌지.

'나는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것이 최소한 한 가지는 있어야 그것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묻는다면 나는 사람은 위로로 산다고 하겠다. 물론 무엇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는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 (pp. 189, 190)'

책에 빠져있는 날 부러워하는 아내 모습을 보면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동안 바이올린에 기대어 살아왔는데 손목이 아파 그것마저 내려놓은 요즘... 기댈만한 새로운 것이 아내에게 필요하다. 돈 많이 들어가는 그릇 취미 말고 뭐 없을까?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컵을 사용하는지. 어떤 접시를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아니, 꼭 컵과 접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당신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p. 191)'

난 뭐 아무 컵이나 사용하는데... 다행히 아내에겐 위로가 되는 전용 컵이 새로 생겼다. 10년 넘게 해온 교회 오케스트라를 그만 두던 날, 같은 오케스트라 단원인 권사님이 선물한 컵, 권사님 따님이 수작업한 컵이다. 보면 볼수록 우러나오는 색이 마치 고려청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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