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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평점 :
예전엔 다른 사람 집에서 살면서 집안일을 돕는 식모살이라는 게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 고향에서도 잘 사는 집에는 어김없이 식모살이하는 누나가 있었다. 적게는 열세네 살부터 스무 살 남짓이었고 대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식모살이를 했다.
이 식모살이 누나들은 한쪽 구석에서 아기를 업고 동네 아이들이 노는 데 끼지 못한 채 그냥 쳐다만 보거나 훈수를 두곤 했다. 집안을 먹여살리려고 타지에 와서 또래 아이들이 보내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아마 그때는 가족의 삶을 짊어지느라 자신의 삶 한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으리라.
대학생인 스물네 살 틸다는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동생 이다를 돌보며 함께 살아간다. 술에 취했을 때 엄마는 마치 괴물 같다. 틸다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수영장 레인을 스물두 번씩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베를린에서 펼쳐질 미래를 꿈꿔보지만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한 이다의 모습이 떠올라 틸다는 갈등한다.
'나는 이다가 나 없이 생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 봐, 무너지는 엄마에게 대처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전자와는 달리 후자가 일어날 확률은 의심할 여지 없이 100퍼센트이고, 아마도 곧 일어날 것이다. (p. 182)'
자신의 진로를 찾아 하나둘 떠나는 친구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집을 떠나야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 엄마로부터 동생 이다를 보호하려면 꿈을 접어야 한다.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까.
'내가 떠나면 이다에게는 학교와 집과 엄마밖에 없다. (p. 233)' 선택의 갈림길에 선 틸다에게 옳은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어린 시절 내가 본 식모살이 누나, 남의 집 아기를 업고 있던 그 누나에게 어쩌면 업어줘야 할 친동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동생을 업어줘야 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친동생을 포함한 가족을 위해 남의 집 아이를 업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선택은 어린 나이임을 따져보면 자신이 한 것은 아니다.
커서 생각했겠지. 가족을 위한 사랑과 책임이었다고 여겼으면 후회하지 않았을 테고 만약, 만약에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해 내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면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을 것이다.
한때는 가출한 청소년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바깥보다는 집이 안전하니깐. 하지만 요즘은 집보다 차라리 바깥이 더 안전한 경우가 늘고 있다. 그 청소년에게 집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질 짐조차도 되지 않으니 틸다보다 더 낫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후회나 아쉬워할 선택의 기회도 없으니 더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내가 아는 식모살이 누나도 가족을 위한 식모살이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집이 싫어 가출한 누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건, 삶의 주도권을 쥘지 포기할지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건,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그나마 다행이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가 될 테니까.
'옷을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고 머리부터 물로 뛰어들어 깊이 잠수한다. 풀장 바닥에 앉아 물 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올려다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버둥대는 아이들의 다리,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 흔드는 노인들의 다리, 잠수하는 아이들의 몸, 풀장 가장자리에 머무는 여러 다리. 이런저런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합동 공연은 여기서 보면 대체로 재미있다. 나는 레인을 스물두 번 돌기 위해 바닥을 박차고 올라온다. 스무 번을 돌았는지 스물두 번을 돌았는지 헷갈리면 짜증이 나서 스스로에 대한 벌칙으로 다섯 번을 추가한다. (p.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