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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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할 때 사물함 문 안쪽에 5X7 사이즈의 제법 큰 여자 사진을 붙여놓았었다. 당시 이런 것이 내무반의 유행이었는데 큰 사진은 자랑거리였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사진을 보는 일은 군 생활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됐다. 내무반 선임과 후배들이 부러워했던 사진 속 주인공은 교회 일 년 후배의 친구였다.

입대 전 여러 차례 만나긴 했지만 사귀는 사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빨간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전신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편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겼다. 지금까지도... 제대 후 후배에게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그 후배도 그 친구를 만난 게 오래전이어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버려진 사이가 아니라 헤어진 사이라서 동하 씨 생각이 났어." (p. 94)'

서른 남짓의 세주와 동하. 일 년 전에 헤어진 세주가 어느 날 동하에게 '관용'이란 꽃말을 가진 '문샤인 산세베리아' 화분 하나와 책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함께 동하가 없을 때 집에 놓고 간다. 동하는 책 갈피에서 초등학교 때 찍은 세주 가족사진을 발견한다.

'사진 뒤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로 이해했다. (p. 41)'

육 개월이 지나 여행에서 돌아온 세주에게 동하는 자신의 방을 며칠 동안 내어준다. 세주도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라는 글자가 적힌 동하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발견한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세주와 동하는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다. 세주의 가족사진과 동하의 사진, 두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서로의 아픈 상처를 알게 된다. 그리고 둘은 돌아가야 할 방향이 다를 때 하는 인사를 나눈다.


'동갑인 우리는 이상하게 사귈 때부터 호칭이 서로 달랐다. 나는 세주라고 불렀고 세주는 내 이름에 꼭 '씨'를 붙였다. 처음에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갑이라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그 거리감을 이해하자 호칭에는 금방 익숙해졌다. (p. 92)'

나는 이름을 불렀고, 후배의 친구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것 같다. 세주와 동하처럼 처음엔 거리감 있지만 금방 익숙해지는 호칭이었을듯하다. 하지만 세주와 동하의 관계와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받은 사진 뒤편엔 어떤 메모도 없었다. 나 역시 그 후배에게 어떤 메모도 없는 사진을 보냈다. 겪은 아픔은 물론 그 어떤 사연도 서로 모른다.

우린 만났고 이별을 했다. 세주와 동하도 만난 후 서로 떨어져 있는 이별을 했다. 우리에겐 지금까지 이어진 이별만 있을 뿐 작별은 없었다. 세주와 동하에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작별이 있었다.

세주와 동하에게는 사랑이 시작될 때 어설픈 풋풋함 그리고 계획이 어긋나 얻은 좌절, 서로 감정을 드러내며 용기를 나누는 서사가 있지만 우리 둘에겐 그런 것이 생략됐으니 미완성이다. 서로의 아픔을 알고 이해하는 감정은 사랑일 테지만 나와 후배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참 궁금했다. 어떤 감정으로 사진을 보내는지. 그리고 왜 연락을 끊었는지.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 만나고 싶었다. 시작도 끝도 정리된 것이 없어 아련함을 동반한 찜찜함이 지금도 내게 남아있다.

'세주는 무슨 말을 하려고 'ㅁ'자를 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ㅁ' 자에 이어 쓴 문장은 이러했다.
몹시 보고 싶어. 그것은 동하의 글씨체였다. (p. 54)'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나도 'ㅁ'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써보고 싶어진다. (p. 131, 추천의 글,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 차경희 대표는 동하에게, 세주에게 'ㅁ'으로 시작하는 글을 남겼지만...

만약 내게 사진을 보내주었던 그 후배가 SNS라든지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지금 내 글은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ㅁ'으로 시작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마음 써줘서 고마워~ 그때 힘든 일이 네게 있었다면 나도 마음 써줄 준비가 돼있었는데...'라는 글을 남기며 이별 상태를 끊고 제대로 된 작별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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