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 내가 좋아하는 것들 17
길정현 지음 / 스토리닷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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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찐 절친인 아내분도 그릇 덕후다. 그릇장은 꽉 차 받침대가 휘워질 정도고 침대 밑은 물론 집안 여기저기 그릇이 쌓여있다 보니 가끔씩 내 친구는 아내분의 그릇 취미에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그래도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예쁜 그릇에 대접받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아까 경화 씨가 내놓은 그 그릇 좋더라~"
"나도 그릇 좋아해~"
날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과 말속엔 '당신이 돈을 못 벌어와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나도 예쁜 그릇 사고 싶다고, 으이그~'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해 멋쩍게 대화가 마무리된다. 같이 쇼핑 가면 그릇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다 놓곤 하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지켜봤는데도 이런 헛소릴 하니 아내는 얼마나 허파가 뒤집어질까 싶다.


취미 부자 나예 작가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은 그릇을 바라보면 인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부르겐란트에는 새침데기 같은 케이크보다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호밀 빵이나 숭덩숭덩 썰어낸 바게트 따위가 잘 어울린다. 샐러드처럼 여러 색감이 섞인 음식을 올리면 굉장히 정신이 없게 보인다는 게 단점인데 단순한 음식을 단출하게 올린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휘뚜루마뚜루 쓰기에 아주 좋은 녀석이다. (pp. 29, 30)'

마치 아이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히듯 그릇을 대한다. 그런가 하면 깨진 그릇을 옻으로 이어 붙이는 공예 기법 킨츠기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그릇에 생기는 빙열을 쳐다보며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주름이라는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릇에 담긴 계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릇을 보며 그 그릇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엄마와 엄마의 삶을 생각나게 하는 그릇도 있다. 아코팔 아네모네 접시에 송편을 올리던 까칠한 할머니는 또 어떻고? 누구나 혼자만 간직하고픈 (하지만 친한 한두 명에겐 풀어놓는) 비밀이 있듯이 나예 작가에게는 그런 그릇이 있다.

'나만 알고 싶고 나만 쓰고 싶어서 숨겨두기까지 했으면서 이 컵을 꺼내는 날은 정말이지 미친 듯이 사진을 찍는다. 이 귀여움을 나만 알 순 없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놓은 듯 셔터를 누른다. 자랑은 할 거지만 아무에게도 실물을 보여 주진 않을 거야, 하는 심술 맞은 마음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p. 159)'


"'소서'가 뭐야?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 자기는 알고 있었어?" 먼저 이 책을 읽은 아내에게 물었다.
"그럼 남자들이나 모르지 웬만한 여자들은 다 알걸?"

남자가 그릇만 모를까? 생각해 보니 아내의 취미도 잘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손목이 아픈 아내를 대신해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가끔 그릇을 깨뜨려 아차 싶어
"이거 아끼는 그릇 아냐 어떡하지?"
"괜찮아 그래야 새로 사지. 계속 쓰면 질리잖아"
오래 같이 산 남편도 질려 하지 않을까 겁난다. 아내 취미도 모르는 남편, 맘속으로 깨져버리길 바라는 건 아닌지.

'나는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것이 최소한 한 가지는 있어야 그것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묻는다면 나는 사람은 위로로 산다고 하겠다. 물론 무엇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는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 (pp. 189, 190)'

책에 빠져있는 날 부러워하는 아내 모습을 보면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동안 바이올린에 기대어 살아왔는데 손목이 아파 그것마저 내려놓은 요즘... 기댈만한 새로운 것이 아내에게 필요하다. 돈 많이 들어가는 그릇 취미 말고 뭐 없을까?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컵을 사용하는지. 어떤 접시를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아니, 꼭 컵과 접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당신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p. 191)'

난 뭐 아무 컵이나 사용하는데... 다행히 아내에겐 위로가 되는 전용 컵이 새로 생겼다. 10년 넘게 해온 교회 오케스트라를 그만 두던 날, 같은 오케스트라 단원인 권사님이 선물한 컵, 권사님 따님이 수작업한 컵이다. 보면 볼수록 우러나오는 색이 마치 고려청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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